3월 22일 부송(付送, 물건을 부치어 보내는 것)하며 무안에 답장을 한다 [答務安 三月二十二日 付送]
5일에 전주(全州)에서 보낸 편지는 8일에 받아보았고, 10일에 보낸 편지는 15일에 받아보니 위로와 기쁨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다. 11일에 저 읍의 이방(吏房)인 삼촌 박준근(朴準根)편에 부친 편지는 그 사이에 받아보았을 것이다. 월준(月俊)이 돌아와서 다시 편지를 받아보니 위로됨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편지가 온 뒤에 여러 날이 되어 봄빛이 저물어가는 때에 해변가의 장기(瘴氣)가 있는 곳에서 정무(政務)를 살피는 형편에 허물은 없고, 상하의 권속(眷屬)들도 두루 좋은지 매우 걱정스럽다. 그리고 집결하여 다시 일어나면 괴로울 듯하여 근심이 적지 않다. 이 아비는 여전하고 집안에 별고가 없다. 손녀딸은 잘 웃고 재롱이 날로 달라져서 오랫동안 이 즐거움을 누릴만 했으나 마침 두의(痘醫, 마마)를 만나 바로 우두(牛痘)를 맞고 6~7일이 되어 비로소 겉으로 드러났는데, 진짜인지 아닌지는 상세하지 않다.
동학의 무리가 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보은(報恩)·옥천(沃川) 등지에서 근래에 더욱 크게 일어나서 원한을 갚고 돈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행세를 부리던 집들이 모두 곤경을 당하던 중에 구타하는 폐단이 많이 있었다. 사부(士夫)라고 하는 집이 두려워서 도망하여 곧 난리와 같게 되었다. 500년 동안의 명분(名分)과 법례(法例)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끊어져서 반상(班常)의 구별이 없어지니 한탄스럽고 한심스런 곳이 되었다. 외제(外弟)인 원규(元圭)가 사판(祠板)을 모시고 식구를 인솔하여 문경(聞慶)에서 12일에 갑자기 왔다. 나의 외가가 어찌 이처럼 몰락했는가? 외조(外祖) 내외분의 신주(神主)가 동서로 떠돌아다니며 모실 곳이 없으니 마음이 차갑고 뼈가 시려서 통곡하였다. 여비를 겨우 변통하여 18일에 용인(龍仁)의 유광주(兪光州) 농막에 보냈다. 3일에 길을 떠나 안읍(安邑, 안성인 듯) 점막(店幕)에서 부친 편지를 17일에 받아 보았다. 상놈을 만나 모욕을 당한 것은 들어서 말할 수가 없다. 자세한 것은 네 어머니가 쓴 편지 안에 있는 듯하다. 저 읍의 외읍면(外邑面) 고절(高節)에 사는 사인(士人) 송영술(宋榮述)과 함열(咸悅) 수령은 친분이 자별(自別)하다고 한다. 특별히 문안을 하고, 사안(賜顔, 좋은 낯빛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으로 후하게 대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