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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7월 초 7일 [甲午七月初七日]

서천포·청양·이인 등의 읍과 역에서 동학배들이 모여서 소란을 피우는 연유는 이미 임금께 급히 보고하였으며, 오늘 접한 임천군수 신영휴의 보고 내용에, “6월 29일 신시 무렵에 도인(道人)이라 칭하는 20여 인이 혹은 총과 창을 지니고 혹은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전라도 성당(聖堂)에서부터 방향을 바꾸어 임천에 도착하여 작청(作廳)에 난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물품을 공급하고 먹이는 절차는 공형(公兄)이 맡아서 하게 지시하였습니다. 하루 밤을 머물고 그 다음날인 7월 1일 신시 무렵에 다시 성당 등지로 향해 갔습니다. 그들은 말로는 문득 위국안민(爲國安民)한다는 것을 핑계댔지만, 기세는 감히 누구냐고 물어 밝힐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합니다. 마을을 순찰하여 정탐하여, 사사로이 총과 마필을 마음대로 가져갔으며, 또한 요호(饒戶)를 쫓아내고는 궁민(窮民)을 구호한다고 말하면서 곡물꾸러미를 압류하고 돈과 재산을 빼앗아갔습니다. 이미 그러한 일을 겪었으니, 읍에서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압류된 곡물과 빼앗긴 돈의 내역을 책으로 만들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책(成冊)의 내용은 압류된 조(租) 271석 10두, 쌀 15석, 소 1마리, 돈 150냥이었습니다. 같은 때에 도착한 공주목 판관 신욱의 보고 내용에, “공주의 대교(大橋)·공수원(公壽院)·반송(盤松) 등지에 동학배 10명 혹은 100명 정도가 무리를 이루었는데 모이는 것이 일정치 않으며, 압류한 돈과 곡물의 정황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속하여 접한 정산현감(定山縣監) 서상면(徐相冕)의 보고 내용에, “7월 6일 오시 무렵에 전해오는 말들을 들어보니 정산현의 관현면(冠峴面) 신대리(新垈里)에 사는 진사 조창하(趙昶夏)가 갑자기 동학인에게 맞아서 그대로 사망하였습니다”라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급히 형리(刑吏)를 보내 자세히 탐문하니, 7월 5일 진시 무렵 정체를 알 수 없는 18명이 각각 총과 칼을 지니고 부여(扶餘)의 경계에서부터 뒤쫓아 와서 먼저 총 2발을 쏘고, 곧바로 조진사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바깥마당에서는 조진사가 마침 사랑에 앉아있었는데, 그것을 보고서 매우 놀라고 당황하여 피하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저들 무리 중 1인이 총을 들고 쫓으며 말하기를, ‘네가 감히 어디로 도망가려 하느냐?’라고 하면서 총으로 잔혹하게 목덜미를 쳤으며, 곧바로 계단 아래로 발길질하여 떨어뜨리니 그대로 기절하여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저들 중 여러 명이 일제히 힘을 합쳐 결박하고 마구 때리면서 이야기하기를, ‘17년 전의 상관전(相關錢), 빌린 돈 1,000냥은 지금 이자와 합치면 몇 만냥이 되는지도 알 수 없다. 특별히 2,000냥으로 감해 줄 것이니 당장 내어 놓아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곧 그의 두 동생들도 울면서 애걸하여 만류하여 매달려보았으나, 또한 묶여 매 맞을 형세여서 어찌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간청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이 묶어서 때린들 어떻게 돈을 마련하겠습니까? 바라건대 모두 풀어주시고 때리는 것을 멈추면 돈은 마땅히 갚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저들이 잠시 풀어줄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비록 진사는 이미 의식이 없었으나, 두 동생들은 곧 도망쳐서 살아났습니다.
그 무리들이 다시 안마당에 뛰어 들어가서 의복과 집물 중에서 값비싼 물건을 골라내고, 마필 또한 끌고 부여의 경계 쪽으로 향하여 달려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천 접소(接所)의 사람이다. 돈 2,000냥을 7월 10일 이내에 모두 마련하여 임천읍내의 중군(中軍) 이씨의 집으로 보내라. 그래야만 너희들이 멸문을 당하는 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기에 동민들은 모두 도망하여 흩어져서, 구해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보고하기를, ‘진사 조창하는 당일 미시 무렵에 곧바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두 동생들은 목숨은 겨우 보전했으나 온 몸에 상처투성이로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정산현의 경계 내에 허다한 집들이 돈·곡식·마필 등 빼앗긴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집에서처럼 이와 같이 인명을 살육하기에 이른 것은 극히 놀라운 일이기에, 연유를 첩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도착한 보은군수 정인량(鄭寅亮)의 보고 내용에, ‘본군의 경계 내에 있는 동학의 무리[東學之類]는 이번 봄에 동학의 도를 배반한 후에도 오히려 다시 복귀하여, 자주 상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7월 2일 수백여 명이 사각면(思角面) 고승리(高升里) 천변에 모였다고 들었는데, 들어온 첩보가 사실이어서 군수가 효유하기 위하여 직접 갔는데, 과연 들은 바와 같이 이미 모여 있었으며, 술과 국수를 많이 준비하여 왔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니 ‘고승리의 소민(小民) 김개조(金介釗)는 노병(老病)에 걸린 무리였는데, 그의 생일이 임박하여 스스로 이렇게 시끄러운 때를 당하여 사는 날이 멀지 않다고 여기고, 그의 아들에게 사방으로 손님들을 청하게 하여 갑갑한 마음이나 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개조는 일찍이 동학에 가담한 자로서 부른 자들이 모두 동학의 무리[東學之徒]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속을 알 수 없고 겉은 수상하여, 마치 잘못하여 소란을 일으킬 것 같은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개조의 아들을 불러 장차 효유하여 금지하려고 할 때에, 그들 중 두령(頭領)인 자가 ‘우리들이 하는 일에 관이 어찌 상관하려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팔을 걷어 부치고 말로 핍박하였으며, 남은 무리들은 둘러싸서 시끄럽게 떠들었습니다. 심지어 관속들을 쫓아내려하다가 끝내 말하기를, ‘수령[官家]의 이와 같은 행차는 이방(吏房)이 아뢰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방을 잡아갔습니다. 함부로 날뛰는 것이 매우 심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으나, 만일 하나라도 묻지 못하고 그만두면 장차 백성들에게 명령을 시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군수가 그들이 가는 곳을 따라 갔는데, 5리 정도 떨어진 산골짜기 사이 숲이 있는 가운데에 멈추어 열을 지어 앉았으며, 군수를 영접하여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흥을 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초에 모인 것은 단지 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개 마음에 품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소요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창의(倡義)해야 하는데, 수령께서 이미 행차하셨으니 우리들의 창의두령(倡義頭領)이 되어 주셔야 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수가 답하여 말하기를, ‘만일 경사(京司)가 위급한 날에 창의하겠다는 이야기는 괴이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지금 서울의 소식이 어떠한지 모르는데 망녕된 생각을 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너희들은 동학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 수령된 자가 동학배의 두령이 될 수 있겠는가? 의리상 할 수 없다’라고 하였더니, 저들이 말하기를, ‘이른바 동학 두 글자는 지금 이미 그 학(學)을 저버렸으니[背學] 동학으로 말하지 말고, 모름지기 선비[士儒]가 창의한다고 이름을 붙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수가 말하기를, ‘비록 그렇게 하더라도 만일 창의를 하게 되면 마땅히 순영과 병영 양쪽에 보고해야 한다’라고 하였더니, 저들이 말하기를, ‘영문에 보고하는 것은 불가한 것은 아니나, 만일 위급한 때를 당하였다면, 어느 겨를에 영문의 회답[回題]을 기다리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녹명기(錄名記)를 지어 바치고 머리제목을 ‘사유창의(士儒倡義)’라 쓰고, 도약장(都約長)을 ‘군수(郡守)’라 쓰고, 부약장은 그 두령들을 차례로 썼으며, 이방의 이름도 써넣었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이 무리들이 나라를 위해 창의했다고 말하는 것을 위력으로 막을 수 없으므로, 여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맡은 바를 해야 한다고 하고, 이어서 ‘너희들이 이른바 요구하는 것이 만일 오직 나라를 위해 충의를 행하는 것이라면, 후일을 기다려서 순영과 병영에 보고하고, 서울의 기별을 탐지한 후에 창의하는 것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망령되게 민심을 어지럽힌다면 함께 모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엄하게 타일러 발송하였으며, 그 녹명기를 직접 베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뒤에 이름을 적은 기록 내에, “사유창의하는 자는 도약장 정인량, 약장 임규호(任圭鎬)·황하일(黃河一)·이관영(李觀榮)·김재현(金在顯), 이방 이상준(李商準)”이라고 하였습니다.

서천군수 김인수(金麟洙)의 보고 내용에, “7월 초 9일 오시 무렵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 57명이 각각 총과 창을 지니고 한산에서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총을 쏘면서 읍에 들어와 각 관청건물에 머무르며 술과 음식을 토색하면서 이르기를, ‘우리들은 부안(扶安)의 동학인이다. 전라도 연해에 일본배가 와서 정박한 것이 수백 척이어서, 도 전체가 위급하고 황망하여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마필과 무기가 모자란다. 너희 읍에 남아 있는 총과 말의 상황을 나는 이미 자세히 들었으니, 총 1,000자루와 말 100필, 화약과 철환을 충분히 가져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고, 이방과 수성포수대장(守城砲手隊長)을 잡아가서 죽인다고 협박하여 재물을 빼앗는 것이 끝이 없었으며, 수성포수가 지닌 총 6자루, 화약 3근, 철환 100개, 창 2자루, 시골 당나귀 2필, 말 1필 등을 빼앗아서, 신시 무렵 나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산현감 이병제의 보고 내용에, “7월 초 6일에 동학배 20여 명이 각각 총과 창을 지니고 쏘면서 돌입하여 총 4자루, 돈 30냥, 백성의 말 3필을 빼앗아 갔으며, 초 7일 미시 무렵에 100여 명이 또 갑자기 들이닥쳐 돈 100냥을 토색해 갔고, 초8일에는 10여 명이 총을 쏘면서 들어와서 읍의 말 1필을 빼앗아 가서 읍과 마을에서 폐단을 저지르고 민정을 시끄럽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무리들이 수령을 위협하여 억지로 이름을 기입하였고, 옛날 채무를 강제로 받으려고 인명을 죽였으며, 관청건물에 들어와서 협박하여 재물을 빼앗아 가는 것이 끝이 없었고, 또 수성포군이 지닌 무기를 빼앗았으며,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거리에서 멋대로 다니면서 돈·곡물·마필·총·칼 등의 물건들을 빼앗아 가는 등의 일을 저지르니, 이는 변괴이며 들어도 매우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각각의 읍에 엄히 깨우치는 공문을 내려서 한편으로 효유하고 한편으로 잡아들여 징계하기를 도모하며, 이후부터의 상황은 차례로 아뢸 생각으로 연유를 아울러 임금께 급히 보고합니다.

주석
황하일(黃河一) 북접의 강경파 지도자로 김개남 전봉준 등 남접 지도자들을 이끌었는데 이 시기 충청도 서해안지역에서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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