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5일 [甲午七月二十五日]
일본 병사가 충주를 지나간 일은 이미 임금께 급히 보고하였으며, 오늘 접한 연풍현감 한진태(韓鎭泰)의 보고 내용에, “7월 17일 문경부(聞慶府) 공형의 방위사통(防僞私通)을 접해 보니, 일본 중장(中將) 일행 30여 명이 방금 도착하였으며, 고군(雇軍) 355명을 연풍현에 통문으로 연락하여 내일 이른 아침에 색리(色吏)를 정하여 안보참(安保站)에서 인솔하여 기다려 달라고 일본인이 직접 청하러 왔습니다. 이는 동래(東萊)에서부터 올라오는 연로의 각 읍을 통행하는 관례라고 하였습니다. 짐꾼의 삯과 먹을 것에 대한 값은 수대로 내어 주어 처음부터 폐해를 끼친 일은 없으며, 백미·피모(皮牟)·간장·큰 나무로 된 반상·사기·솥 등의 물건들은 요청한 것에 의거해 주겠다고 하였으므로, 고군 355명과 함께 장리(將吏)를 입회하여 안보참으로 보내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18일 지나갈 때, 짐꾼 중에 짐을 지지 않은 자들에게는 고가(雇價)를 주지 않았는데, 등이 구부러지고 넘어지는 등 모습이 애처로웠습니다. 조령(鳥嶺)에서 충주에 이르기까지 50리의 근처 5개 동(洞)은 백성들이 모두 놀라서 겁을 먹고 도망하여 마을들이 비었으며, 일본군들은 매일 30~40명, 혹은 40~50명 정도가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았고, 또 전기를 가설한 후에 안보동(安保洞)에 분국을 설치하였는데, 거의 수백 명이 여전히 머물고 있어서, 놀라서 흩어진 백성들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잘 타일러 경계하도록 하여도 조금도 정돈되지 않아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통과하는 일본군은 적절하게 응대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이후의 상황은 연속하여 급히 보고하라고 단단히 타이르고 명령을 보냈습니다. 그러한 연유를 임금께 급히 보고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