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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면양행견일기
일러두기

1일 乙酉.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면서 화창했다.

나는 신묘년[辛卯年, 1891]가을에 영탑(靈塔)에서 화정(花井)으로 옮겨왔다. 집 아이와 며늘아기, 덕실[德室, 시집간 딸의 호칭], 계집종 갑년(甲年), 정순(貞順), 옥섬(玉蟾)과 계집종의 남편 복석(福石), 학현(學玄), 고노(雇奴) 광록(光祿), 성일(性一)과 함께 해를 보냈다. 시동(侍童) 김장운(金壯雲), 김도성(金道性), 원회(元會)는 예전대로 같이 거주하며, 서울 집은 아직 안동(安洞)에 있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도숙(道叔) 인운거(印雲擧), 인영식(印英植), 이인성(李寅性), 이석주(李錫周), 현봉재(玄鳳在), 구재(龜在), 강촌(康村)에 사는 동자(童子) 조용덕(趙龍德), 김봉기(金鳳起)와 윤병석(尹炳奭), 유규항(兪圭恒)이 왔다. 백거(伯渠)가 와서 묵었다. 동자(童子) 김기동(金奇童), 기남(奇男), 기성(奇成)이 왔으며, 정기(正基) 스님이 왔다.[정초(正初)라서 적는다.]

2일 丙戌. 화창했다. 우수절(雨水節).

최성여(崔誠汝)와 동자 황구준(黃龜俊), 용준(龍俊), 김윤경(金倫卿),[정초(正初)라서 적는다.] 박진일(朴鎭一), 인진(仁鎭), 김천(金千), 순흥(順興), 순명(順明), 윤진(允進), 인주(仁周), 인성(仁成), 준역(準易), 준봉(準鳳), 윤부걸(尹富傑), 이방(吏房) 박동환(朴東煥), 수형리(首刑吏) 박한표(朴漢杓), 선달(先達) 유치면(兪致冕), 이선(李先), 강생(姜生)[마을사람이다.] 형제, 김여수(金汝壽) 형제, 유한여(劉漢如)가 오고 백거(伯渠)가 갔다.

저녁에 선산(善山)의 수령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고 아울러 술과 안주, 부채종이와 꿰미 돈[緡錢]을 보내왔다. 선산 수령은 윤옥거[尹玉居, 秉觀]이다. 심부름 온 종이 추위에 막히고 도적을 피하는 고생을 하면서 10여일이 걸려 비로소 도착하였다.

3일 丁亥. 맑고 찼다.

최영습(崔永習), 현경전(玄景田), 조생 춘식(趙生春植), 영습(永習)의 손자 병세(炳世), 박용하(朴用夏), 유치백(兪致百), 유대열(兪大悅), 임생 선준(任生善準), 애자[哀子, 상주] 조종국(趙鍾國)과 그의 14살 된 아들 장업(壯業), 만지동(蔓支洞) 사는 김익두(金益斗)와 그의 조카 봉기(鳳起), 인세경(印世卿), 박종욱(朴琮郁), 박종헌(朴琮憲), 종렬(琮烈)이 왔다. 학현(學玄)은 당진(唐津)에 갔다. 그의 아내 선녀(仙女)의 병세를 물어보니 그 사이 벌써 땀이 나고 열이 내려 조금 살아났다고 하니 다행이다. 선녀의 오빠와 남동생, 숙부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니 재앙이 너무 심하고 참혹하다. 오늘 마을 사람들에게 탕과 떡을 대접했다. 저물녘에 영탑(靈塔)에 오르니 계곡 길에 쌓인 눈이 아직도 무릎이 빠질 정도였다. 이언용(李彦容)이 왔다.

4일 戊子. 아침에는 흐리고 저녁에는 개었다가 해질녘에 땅이 움직였고, 밤이 되자 가는 비가 잠시 뿌리더니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양생 찬환(梁生贊煥), 조생 영원(趙生英元), 황생 종필(黃生鍾弼), 퇴리(退吏) 박재문(朴在文), 본군(本郡) 군수(郡守) 홍종윤(洪鍾奫), 김생 기홍(金生基洪), 기성(基成), 장생 영세(張生英世), 김응래(金應萊)가 왔다. 순득(順得)이 와서 묵었다. 학현(學玄)이 해서(海西)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기에 그의 편에 서울로 보내는 편지와 평택(平澤)으로 보내는 편지를 보냈다.

6일 庚寅. 맑고 화창했다.

은경(殷卿), 희경(羲卿), 한경(漢卿), 도은(陶隱), 초계(草溪) 이민승(李敏升), 황생 태연(黃生泰淵), 윤부걸(尹富傑)이 왔다. 은경(殷卿)과 도은(陶隱)은 머물러 자고, 다음날 이초계[李草溪, 초계군수를 지낸 사람]가 서울로 길을 떠나므로 재동(齋洞)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8일 壬辰. 맑고 찼다.

문봉(文峯) 김생 한기(金生漢基), 좌수(座首) 이인성(李寅性)이 왔다. 교관(敎官) 유진만(兪鎭萬)이 백씨(伯氏) 혜거[兮居, 兪鎭一]의 초상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멀리 길을 돌아 방문하였다. 7~8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백발의 늙은이가 되어 마주하였으니, 서로 서글퍼하고 위로하였다. 곧바로 헤어졌다. 현순좌(玄舜佐)가 왔다.

9일 癸巳. 맑았다.

평택(平澤) 임백헌(任百憲), 유생 인명(柳生寅明), 이생 민규(李生敏奎), 박인주(朴仁周)와 그의 아들 용봉(龍鳳), 도사(都事) 안춘식(安春植)이 왔다. 황자천[黃紫泉, 鐘敎]이 이날 밤, 노환으로 갑자기 죽었다. 〈그는〉 문재(文才)와 풍류로 호남에 소문이 난 사람으로 나와는 오랫동안 돈독하게 지내왔는데 하루아침에 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다.

15일 己亥. 흐리다가 저녁에 가는 비가 잠시 뿌렸다.

김석운(金石雲), 이도은[李陶隱, 敏夔]이 와서 묵었다. 시사(詩社) 가운데 혜거(兮居), 자천(紫泉)은 모두 고인(古人)이 되었고 오직 석운(石雲) 만이 모임에 와서 함께 정월 대보름을 완상하니 생사(生死)의 감정에 서글픔을 주체할 수 없다. 석운(石雲), 도은(陶隱), 세경(世卿)과 함께 영탑(靈塔) 선방 (禪房)에 오르니 월해(月海)는 몸져누웠고 죽산(竹山)의 승려 세 사람이 와서 묵었다. 저녁에 세경(世卿), 도숙(道叔), 학중[學仲, 永祿의 字], 은경(殷卿), 여성(汝成)이 갔다.

20일 甲辰. 새벽에 안개가 끼었다.

가득 낀 구름 속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홍(吳來洪), 최성여(崔誠汝)가 왔다. 평기(坪基), 풍동(洞) 두 곳의 편지가 죽동(竹洞)에서 왔다. 공주(公州) 사람으로 당진(唐津)에 오는 사람이 있어 편지를 받아 전한다고 한다. 비로소 설을 지내고 난 다음 두 곳의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창손(昌孫)이 순산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니 기특하다. 답장을 써서 보냈다. 천구(千駒)가 또 대영전(大榮煎)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21일 乙巳. 맑았다.

비로소 봄기운이 있어 소나무, 대나무, 대추나무를 심었다. 백치(柏峙) 이초계[李草溪, 敏升] 가 상경(上京)했다. 돌아온 〈그 집〉 종 편에 이번 달 13일과 15일 재동(齋洞)에서 보낸 편지(金晩植)와 여러 조카들의 편지와 안동 집에 머물고 있는 육성대[陸聖臺, 鍾倫]의 편지를 받아보았다. 새해에 서울과 시골, 모두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다행스럽다. 10일 정흥[丁興, 官名은 裕平]이 부인을 맞는 예를 치렀는데, 바로 승지(承旨) 이면상(李冕相)의 딸로 새 사람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니 기쁘다. 지난 섣달 춘천 승지(春川承旨)가 이조 참의[三銓]로서 인사 행정을 하여 귀천(歸川)의 재종제(再從弟) 주경(周卿)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벼슬을 하게 되었으니, 적막한 끝에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지난 섣달 응제과(應製科)와 일차과(日次科) 대강(代講)을 하였고, 신년에 다시 인제과(人製科)와 일차과(日次科)를 베풀었다. 금년의 과거(科擧) 정시(庭試)는 3월 12일로 정해져있다. 성천(成川), 강계(江界)에서 민란이 나서 집안 동생 인식(寅植)이 안핵사(按覈使)를 맡았다. 민란이 일어난 읍의 수령은 조병익(趙秉益)이었다. 서울에도 자못 돌림병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 보다는 심하지 않다고 한다. 덕산(德山)은 감기에 걸려 이음전(理陰煎) 두 첩을 복용하였다. 한초정(韓蕉亭)이 와서 묵었다.

22일 丙午. 맑았다가 흐렸다.

이생 규헌(李生圭憲)이 왔다. 오위장(五衛將) 이경서(李景西)가 와서 자고, 초정(蕉亭)이 갔다. 새댁이 설사를 오래하고 혈분(血分)이 너무 부족해서 승양익위탕(升陽益胃湯)을 복용하기로 하였는데, 박진일(朴鎭一)의 처방으로 10첩은 오늘 복용하기 시작했다.

23일 丁未.

어제 밤이 깊어 또 학질기운이 있었다. 이경서(李景西)가 갔다. 장운(壯雲)과 대성(大成)이 함께 왔다. 승지 박제경(朴齊璟)이 왔다. 덕실(德室)이 삼소음(蔘蘇飮)을 복용하였다.

24일 戊申. 흐렸다. 하루종일 남풍이 세차게 불었다.

이군선(李君先), 이이송(李二松), 이학원(李鶴遠), 수원(水原) 홍생 원식(洪生元植)이 왔다. 어도사(魚都事) 집의 산소 자리를 보아 주기 위한 행차이다. 오늘 밤 두 번째로 학질이 발작했다.

25일 己酉. 맑았다. 바람 없이 따뜻했다.

연화봉(蓮花峯)에 올랐다가 송학동(松鶴洞)으로 내려왔다. 백거(伯渠)를 조문하고 돌아왔다.

28일 壬子. 바람이 찼다.

세경(世卿), 은경(殷卿), 박인주(朴仁周), 당진(唐津) 아이 김복록(金福祿)이 왔다. 일찍 송락환(松落丸) 21개를 복용했다. 오늘 네 번째 발작하여 줄곧 고통스러웠다. 은경(殷卿)이 한기(寒氣)는 있고 열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음분학질(陰分瘧疾)이니 마땅히 과부탕(果附湯)을 복용해야 한다고 한다.

29일 癸丑. 맑았다.

새벽에 과부탕(果附湯) 한 첩을 복용하였다. 윤부걸(尹富傑)이 오고, 학현(學玄)이 왔다. 23일자 서울 편지를 받았는데, 서울과 시골 각 곳이 모두 무고하였다. 이번 달 8일이 동궁(東宮)의 생신으로, 비록 도감(都監)은 설치하지 않았지만 20살이 된 동궁을 경하(慶賀)드리기 위해 궁궐 안에서 진찬의절(進饌儀節)을 하고, 문무과(文武科)를 설치하며, 3월에 양로연(養老宴)을 한다고 하였다. 평택(平澤) 홍실(洪室,) (시집간 딸)의 편지를 받았다. 새 아이가 설사병을 앓고 있다고 하니 매우 걱정된다.

주석
응제과(應製科)와 일차과(日次科) 대강(代講)을 하였고, 신년에 다시 인제과(人製科)와 일차과(日次科) 응제과는 임금의 특명에 의해 임시로 보이는 과거시험인데 임금이 직접 임석한다. 일차과는 경서 강독을 장려하려 경서 외우는 시험, 인제과는 가일(佳日)로 치는 인일(人日, 정월 초7일)에 보이는 글을 짓는 시험을 말한다.
정시(庭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궐에서 보이는 과거. 3월 12일은 동궁의 생일이어서 경과(慶科)가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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