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甲寅. 흐리고 찼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일찍 과부탕(果附湯)을 복용하였다. 영탑사(靈塔寺)에 올랐다. 덕산(德山) 황생 태연(黃生泰淵)이 왔다. 그의 형 동연(東淵)이 일간 서울로 간다고 하기에 재동(齋洞)으로 보내는 편지와 안동(安洞)에 머무는 손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대치(大峙)에서 벽오동 한 그루를 캐서 뜰 앞에 심었는데 크기가 3자 남짓으로 살리기 힘들까 걱정이 된다. 박진일(朴鎭一)이 왔다.
3일 丙辰. 맑았다. 춘분절(春分節)이다.
오랜 가뭄에 날씨는 아직 차가워 꽃이 피기에는 아직 멀었다. 한초정(韓蕉亭), 인세경(印世卿)이 왔다. 정월부터 곳곳에 미친개가 많아 소와 당나귀가 물려 죽는 일이 많았다. 초정(蕉亭)의 며느리도 〈개에〉 물려 약을 구하러 왔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두 몽둥이를 어깨에 메고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고 있으니 이 역시 괴이한 일이다. 돌림병도 도처에서 치성하여 어떤 사람은 하루이틀사이에 죽기도 해서 미처 약을 쓸 겨를도 없다고 한다.
12일 乙丑. 맑고 바람이 불었다.
도은(陶隱)이 갔다. 며느리가 승양익위탕(升陽益胃湯) 20첩을 오늘 다 복용하자 설사는 그쳤다. 어제 박진일(朴鎭一)이 연달아 보익탕(補益湯)을 복용한 뒤 익원탕(益元湯)을 시험해보자고 했다.
16일 己巳. 흐리다가 때때로 보슬비가 뿌렸고 밤에 바람이 불었다.
유치각(兪致恪)이 왔다. 천구(千駒)는 최성여(崔誠汝)의 회갑잔치에 가기 위해 송평(松坪)에 갔다. 술시(戌時) 쯤 공주(公州)의 전보국(電報局) 고인(雇人)이 와서, 14일 내린 사면 은전[赦典]의 전보를 전하였다. 나를 향리로 방축한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전하는, 이달에 보낸 것으로 보이는 재동(齋洞)의 전보이다. 7년 동안의 유배로 스스로의 분수로 보아 죽어야 마땅한데,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은혜를 입어 감읍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본래 고향집이 없으니 망연자실 돌아갈 곳을 모르겠다. 이번 석방의 은전은 동궁의 보령(寶齡) 2순(旬) 초도(初度)가 되는 경사로 인해 내려진 큰 은택인데, 아직은 서울의 자세한 소식을 듣지 못해 답답하다. 은경(殷卿) 형제와 세경(世卿) 부자와 천구(千駒)가 밤에 와서 만나고 새벽에 떠났다.
17일 庚午.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에 공주감영(公州監營)의 종이 순찰사 훈(勛) 대감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대개 은혜로운 명령을 축하하는 것으로 언제 길을 나설지 물었다. 또 평기(坪基) 큰 생질의 편지를 받았다. 두루 모두 잘 있다고 하는데, 장전(長田)의 생질이 1월 28일 양부(養父)의 상을 당했다. 벗 이운식(李雲植)의 상이다. 저녁에 안동의 별배(別陪) 손봉악(孫奉岳)이 도착하여 15일자 재동(齋洞) 편지와 여러 조카들의 편지를 받으니, 대개 용서하는 은전을 알리는 것이었다.
18일 辛未. 흐렸다.
한초정(韓蕉亭), 최성여(崔誠汝), 채여성(蔡汝成), 김성실(金聖實), 현경전(玄景田), 인택여(印澤汝), 인운거(印雲擧), 황종필(黃鍾弼), 김은경(金殷卿)・희경(羲卿), 박종헌(朴琮憲)・종렬(琮烈), 윤부걸(尹富傑)이 왔다. 윤경(倫卿)의 아들 기동(奇童)이 오늘 관례(冠禮)를 하기에 가서 축하하였다.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하인 안상진(安尙鎭)과 김수남(金壽南)이 서울에서 와서 묵었다. 8일 동궁(東宮)의 생신에 문무과(文武科)를 베풀어 문과(文科) 6명, 진사과(進士科) 51명을 뽑았다. 12일 갑술생과(甲戌生科)를 베풀어 문과(文科) 3명, 진사과(進士科) 30명을 뽑았다고 한다. 9일 또 응제과(應製科)를 베풀어 문과(文科) 2명, 진사과(進士科) 20명을 뽑았다고 한다.
19일 壬申. 흐리고 보슬비가 뿌렸다.
승지 박제경(朴齊璟), 평택(平澤) 임백헌(任百憲), 조운포(趙雲圃), 현순좌(玄舜佐), 이서 유규항(兪圭恒), 윤생 병석(尹生炳奭), 김수용(金壽容), 이생 도성(李生道性)・석주(錫周)가 왔다. 박인주(朴寅周), 박순흥(朴順興)이 와서 묵었다. 이순득(李順得)이 와서 묵었다.
20일 癸酉. 바람이 찼다.
김생 병복(金生炳福), 상인(喪人) 최일여(崔日如), 인생 영식(印生英植), 조안교(趙顔敎), 안해중(安海重), 최성여(崔誠汝), 현경교(玄景郊)가 왔다. 김은경(金殷卿)・희경(羲卿), 채여성(蔡汝成)이 왔다. 천구(千駒)와 함께 영탑(靈塔)에 올랐다가 돌 틈에서 게를 잡으며 해가 저물어 내려왔다. 은경(殷卿), 여성(汝成)은 그대로 유숙하였다. 한기(閒基) 안사형(安士衡), 김돌생(金乭生)이 와서 묵었다. 박인주(朴仁周)・순흥(順興)이 가고, 이도은(李陶隱)도 갔다. 본관[本官, 면천군수] 홍종윤(洪鍾奫)이 왔다. 오시중(吳時中)이 와서 묵었다.
21일 甲戌. 바람이 차고 계곡사이로 구름이 몰려왔다.
이경사(李景四), 이군선(李君先), 조생 춘식(趙生春植), 좌수 이인성(李寅性), 최덕우(崔德祐), 어생 윤철(魚生允徹)이 왔다. 은경(殷卿), 여성(汝誠), 사형(士衡)이 갔다. 김수남(金壽南), 안상진(安祥鎭), 손봉악(孫奉岳)이 서울로 돌아가는 편에 재동(齋洞)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어제 홍도(紅桃)와 앵두나무 각 한 그루씩을 백치(柏峙)에서 뜰로 옮겨 심었다. 오늘 또 배나무를 밭두둑에 옮겨 심었는데 크기가 몇 아름이나 되어 6~7명이 겨우 지고 왔다. 현순소(玄舜韶)가 왔다. 선녀(仙女)가 지난 겨울 돌림병이 매우 심하여 백거(伯渠)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늘에야 병이 차도가 있어 돌아갔다고 하니 다행이다.
23일 丙子. 흐렸다가 해가 났다.
처음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에 어머니의 제사를 지냈다. 여성(誠汝)이 갔다. 도숙(道叔) 왕천(王千)이 그 아들 대규(大圭)와 이경률(李景律), 김은경(金殷卿), 이서 유동환(兪東煥), 황생 동연(黃生東淵)과 함께 왔다. 황생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13일 재동(齋洞)과 안동(安洞)에서 보낸 편지를 가져왔다. 이생 보성(李生輔性)이 왔다. 서울의 기별을 보니 양로연(養老宴)은 영조(英祖) 계사(癸巳) 때의 예(例)에 따라 세자궁(世子宮)에서 날짜를 나누어 시행하고, 또 내연(內宴)과 외연(外宴)을 길일에 베풀기로 하여, 외연(外宴)은 4월 20일이고, 내연(內宴)은 같은 달 22일로 잡았다. 청주(淸州)의 통어영(統禦營)을 남양부(南陽府)로 옮기고 해군통어영(海軍統禦營)이라고 부르고, 민응식(閔應植)을 해군도통어사(海軍都統禦使)에 제수하였다. 또 해연총제사(海沿總制使), 호위청대장(扈衛廳大將) 및 부장(副將) 등을 이전에 장신(將臣)을 지낸 인물로 제수하였다. 재상의 임명은 심합[沈閤, 沈舜澤]을 영상(領相)으로, 조합[趙閤, 趙秉世]을 좌상(左相)으로 삼았다. 학교에서 강학하는 일로 새로운 규약을 만들고 성균관(成均館)과 한가지로 반장[泮長, 성균관 책임자인 大司成]이 돌아가면서 시험을 보이기로 하였다. 동학당(東學黨)이 그의 스승 최제우(崔濟愚)의 원통한 일을 설욕하려고 궁궐의 문에 엎드리자, 지평(持平) 조강환(曺康煥), 부호군(副護軍) 이남규(李南珪)가 상소를 하여 이단을 척결할 것을 청하였다. 8일 문무과(文武科)를 베풀고 조신(朝臣)으로 나이가 80인 사람들에게는 자급(資級)을 더해주고 나이가 20인 사람에게는 표리[의복] 한 벌 감을 내탕금으로 내리고, 사서인(士庶人)으로 나이가 80인 사람에게는 옷감을 내리고, 나이 20인 사람에게는 각각 한필씩 주고, 내탕금 30만 냥을 공계(貢契)와 시전(市廛)에 나누어 주고, 감옥의 문을 열어 죽을 죄를 지은[死罪] 자들도 모두 석방하였다. 3월 10일 수릉(綏陵), 숭릉(崇陵), 경릉(景陵)에서 친히 제사를 드리고, 4월 10일 전에 헌릉(獻陵), 인릉전(仁陵展)에 배알하고, 초시(初試)를 생략하고 정시(庭試)를 베풀어 5월 17일 과거급제자 명단을 발표한다고 하였다. 이생 사원(李生思元)이 와서 묵고, 왕천우(王千友)가 와서 묵었다. 윤부걸(尹富傑)이 왔다.
24일 丁丑. 맑고 화창했다.
천구(千駒)가 서울로 떠났고 복석(卜石), 학현(學玄)이 따라 갔다. 세경(世卿), 성여(誠汝), 현경교(玄景郊), 이생 주성(李生周聲)과 그의 아들 공익(公翼)・후창(厚昌), 이민정(李敏鼎), 구례(求禮) 구대식(具大植)이 왔다. 현순소(玄舜韶)가 왔다가 천구(千駒)와 함께 서울로 갔다. 왕천우(王千又), 이사원(李思元)이 떠났다. 박용하(朴用夏), 유대열(兪大悅)이 왔다. 안애석[安厓石, 鼎遠]이 와서 묵었다. 함께 영탑사(靈塔寺)에 올라 해가 저물어 돌아왔다. 박원택(朴元澤)이 와서 묵었다. 서울의 하인 김영규(金永奎)가 와서 묵었다. 21일 재동(齋洞)에서 보낸 편지와 각 곳의 편지를 받아보았다. 태학의 유생(儒生)들과 외방(方外) 유생들이 두 곳에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동학의 무리들을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동학의 무리들이 프랑스 공관(法公館)에 글을 내걸고 말하길 “우리 나라에서 금지된 것으로 당(堂)을 설치하고 교(敎)를 베풀었으니, 만일 짐을 꾸려 급히 돌아가지 않으면 3월 7일 우리 무리가 마땅히 관(館)에 들어가 소탕하겠다”고 하였다 한다. 프랑스 공사(公使)도 뜻밖의 사태를 방비하기 위해 본국의 병선(兵船) 3척을 불러들여 인천(仁川) 바다에서 기다리게 하니, 이 때문에 도읍 사람들의 마음이 자못 소란스럽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