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癸未. 맑고 화창했다.
차례(茶禮)를 행하고 화전(花煎)을 올렸다. 덕산(德山 )박생순(朴生淳)이 왔다.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비자(婢子) 선녀(仙女)의 종제(從弟)이고 6살이 된 여자아이 남순(男順)을 성일(性一)을 시켜 데려 왔다.
2일 甲申. 맑고 화창했다.
제비가 왔다. 양생 찬환(梁生贊煥), 현경교(玄景郊), 안해중(安海重)이 왔다. 도은(陶隱)과 함께 윤경(倫卿)의 집에 방문했는데 조안교(趙顔敎)도 있었다. 앞산 두견화가 만발한 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밭둑길을 걸어 산에 올라 꽃을 감상했다. 마침 술과 떡을 윤경의 집에서 보내와 함께 마시고 돌아왔다. 윤경의 대인(大人) 송평(松坪) 지사(知事) 김현순(金賢淳)이 와서 만났는데, 올해 나이가 88세나 되었지만 시력과 청력이 쇠하지 않고 정력은 아직도 왕성하니 참으로 신선 중의 사람이었다. 오시중(吳時中)이 와서 묵었다.
6일 戊子. 맑았다.
안해중(安海重), 김인목(柳寅穆)이 왔다. 당진(唐津) 선달(先達) 박봉권(朴鳳權)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2일자 집 아이 편지를 전해 주었다. 서울에서는 동학당(東學黨)이 양관(洋館)에 글을 내걸고 7일 날 몰아내겠다고 한 이야기로 인해 매우 소란스럽다고 하였다. 영남(嶺南)의 문관(文官) 권봉희(權鳳熙)가 상소하여 시폐칠조(時弊七條)를 올렸다. 글이 솔직하고 숨김이 없어 삼사(三司)에서 장차 교대로 장소(章疏)를 올려 죄를 청한다고 한다. 영남백[嶺南伯, 경상감사]에 이용직(李容直), 완백[完伯, 전라감사]에 김문현(金文鉉), 동백[東伯, 강원감사]에 민형식(閔享植), 광류[廣留, 광주부유수]에 윤영신(尹榮信)이 되었다고 한다. 최성여(崔誠汝)가 와서 묵었다. 은백(殷百)이 와서 묵고 시중(時中)이 갔다.
7일 己丑. 바람이 차고 매우 가물었다.
가야산(伽倻山)에 산불이 크게 나서 6~7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 세경(世卿), 은중산(殷中山), 김치명(金致明), 박원택(朴元澤)이 왔다. 죽죽동(竹竹洞) 윤복손(尹福孫)이 왔다. 성여(誠汝), 시중(時中)이 갔다. 덕실(德室)이 자신의 아버지를 뵈러 황곡(篁谷)에 갔다. 원택이 유숙하였다.
8일 庚寅. 새벽에 된서리가 오고, 종일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원근에 산불이 나서 연기가 사방에서 모였다. 오후에 김을 한번 맬 수 있을 정도로 비가 내리자 곧 산불이 꺼졌다. 바람이 한 겨울처럼 찼다. 밤에는 달이 밝았다. 성취묵(成醉黙)이 서울에서 왔다. 그사이 통정도정(通政都正)에 오르고 또 가선(嘉善)에 올랐으며, 일간 다시 서울로 가서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고 또 한 자급(資級)이 오른다고 한다. 〈동학당이〉 완영[完營, 전주감영]으로 보낸 동학당의(東學黨議)를 보니, “충・효・열(忠孝烈)을 세 가지 어려움[三難]으로 삼고 일본과 서양을 물리치는 것을 대의(大義)로 삼는다”고 한다. 또한 그 무리들에게 통문을 보내고 백성들을 회유하기를, “밭가는 사람은 밭을 갈고 글을 읽는 사람은 글을 읽으면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라. 우리들은 일본과 서양을 섬멸할 뿐으로 평민들에게는 간여할 바가 없으니, 삼가하여 민간에서 폐단을 일으키지 말며 이를 범하는 자는 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운포(趙芸圃)가 왔다. 최성여(崔誠汝), 도사(都事) 어윤호(魚允浩), 윤부걸(尹富傑)이 비에 길이 막혀 유숙하였다. 도성(道成)이 문봉(文峯)에서 돌아왔고 취묵(醉黙) 편에 안동(安洞)으로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부쳤다.
9일 辛卯. 흐렸다. 세차게 바람이 불어 벽이 흔들렸고 비가 뿌려 먼지를 적셨다. 신시(申時)에 우박이 왔고 밤에 달이 밝았는데 새벽녘에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섞인 눈이 내렸다.
최성여(崔誠汝), 어도사(魚都事)가 갔다. 세경(世卿), 도숙(道叔)이 왔다. 학현(學玄)이 서울에서 돌아와 집에서 보낸 6일자의 두 번째 편지와 재동(齋洞) 형님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권봉희(權鳳熙)의 소초(疏草)가 내려왔는데, 모두 7조(條)로 말이 자못 절실하였다. 정원(政院)의 탄핵 계문에 대해 아직 처분이 없었다. 태학(太學)과 방외(方外)의 사람들이 옥당(玉堂)과 함께 차자(箚刺)를 올렸고, 벼슬아치 3~4명이 모두 동・서학(東西學)을 배척하였다. 동학당이 대궐문에 엎드려 상소를 올렸는데, 소두(疏頭)는 서병학(徐丙學)이라고 한다. 또 동학당(東學黨)이 완영(完營)에 보낸 의송(議送), 관에 몇 차례 보낸 통문(通文), 양관(洋館)과 왜관(倭館)에 붙인 방을 보았다. 서울에서는 자못 의심하고 두려워한다고 한다.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10일 壬辰. 맑고 바람이 불었다.
현순소(玄舜韶)가 서울에서 돌아와 평택(平澤) 홍실(洪室)의 편지를 받았다. 당진(唐津) 하헌무(河獻武)가 왔다. 도은(陶隱), 세경(世卿), 은경(殷卿), 정기(正基)와 더불어 원평(元坪)으로 길을 나섰다가 강기(康基)를 지나 조운포(趙芸圃)을 찾아갔다. 잔에 술을 따라 즐겁게 마시고 손을 잡고 함께 갔다. 해미(海美)의 중산(中山)을 지나다가 김생 규희(金生奎熙)를 방문하였는데, 바로 기홍(基洪)의 부친이다. 또 술과 안주를 내와 일행을 대접하고 경렬[景烈, 基弘字]을 데리고 동행했다. 홍주(洪州) 원평(元坪)에 이르렀는데 화정(花井)과는 10리(里) 거리이다. 석운(石雲)이 지팡이를 짚고 밭 사이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황석정(黃石汀)은 약속한 날보다 먼저 도착해 있어 함께 당(堂)에 들어가 즐겁게 이야기를 하니, 주인이 술과 국수를 내와서 먹었다. 석운과 함께 집 뒤 동산에 올라 온 동네의 형상을 보니, 마을은 산 위에 있고 들이 넓게 트이고 땅은 기름졌다. 마을의 집이 100호(戶)이고 백공(百工)들이 모두 갖추어져있고 산세가 준엄하면서 주위를 감싸고 있으며, 서쪽으로 고개와 물 어귀가 첩첩으로 석운의 집을 닫아걸고 있는 듯했다. 북쪽 산 아래 있는 크고 작은 두 집은 행랑・처마・부엌・목욕간들로 100여 칸이나 되었고, 밭두둑은 가지런하고 계단과 마당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시골에 사는 즐거운 일들이 하나도 빠짐이 없는 참으로 복 받은 곳이었다. 저녁밥과 밤참이 모두 성대하게 차려져 여러 손님들은 취하고 배부르게 먹었다. 문생 추(文生錘)의 집이 이 마을에 있는데, 글방을 두 곳으로 나누어 열어 어린 학생 3~40명을 가르쳤다. 모두 총명한 자제들로 과제(課製)를 받아 읽어보니 모두 볼만하였다. 크게 발전하여 그 효과가 기대되었다. 밤에 유숙하였다.
11일 癸己. 맑고 크게 바람이 불었다.
밥을 먹고 석운(石雲) 및 여러 손님들과 함께 원당(元堂)의 수석(水石)을 찾아갔다. 동남쪽으로 2리(里) 쯤에 있는데 마을 어귀에 있는 원당곡(元堂谷)에는 반석과 기이한 돌들과 맑은 물살이 부딪치고 여울이 일고 누운 폭포와 드리워진 폭포가 있어 쌍룡폭포(雙龍瀑布)라고 하였다. 그 아래 맑은 못이 있어 씻고 목욕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어 동쪽 바위 아래로 바람을 피했다가 돌 위에 자리를 깔고 두율운(杜律韻)을 대고 함께 근체시(近體詩)를 지었다. 근처에 최영습(崔永習)의 집이 있어 술과 삶은 닭을 사와 먹었다. 석정(石汀)은 돌 위에 앉아 높이 노래를 부르고 이 마을 이생 양현(李生養賢)이 화답을 하였다. 비록 사죽(絲竹)의 음악은 없었지만 유쾌하고 즐거웠다. 석운(石雲)이 유람할 때 필요한 도구를 옮겨와 술자리가 매우 풍성하였다. 화전[花糕]을 구워 술안주로 삼아 위아래 사람이 실컷 먹고 해가 저물어 서로 이끌고 돌아왔다. 지나다 문생(文生)의 학당(學堂)에 들러 어린 학생들이 글을 외우는 것과 지은 시를 보니 과연 들은 것과 같아 기뻤다. 지나다가 쇠를 불리는 용광로에 풀무질하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가마솥・쟁기를 한창 만들고 있었다. 비록 기이한 기계는 없었지만 볼만하였다. 석운의 집에 돌아오니 덕산(德山) 윤동돈 계(尹同敦桂)도 약속을 듣고 와서 모여 밤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경(世卿)이 먼저 돌아갔다.
12일 甲午. 맑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집 종 가마꾼이 와서 집 아이가 보낸 세 번째 편지와 평택(平澤) 홍실(洪室)의 편지를 받았다. 8일 충량응제과(忠良應製科)가 있어 사위 홍사필(洪思弼)이 곧바로 전시(殿試)에 나아갔다고 한다. 기특하면서도 기뻤다. 평기(坪基) 큰 생질 이병규(李秉珪)가 어제 와서 묵으면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서, 곧바로 주인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김경렬(金景烈)이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의 집에 꼭 들르기를 요청하여 마침내 석운(石雲)과 여러 사람들과 같이 중산(中山)에 다시 들렀다. 치명(致明)이 술과 안주를 갖추어 일행들에게 대접하였다. 여기서 석운(石雲)은 원평(元坪)으로 돌아가고, 윤동돈[尹同敦, 벼슬이름]은 앞서 이미 떠났고, 이도은(李陶隱), 황석정(黃石汀)도 인사하고 갔다. 모두 욕불일(浴佛日)에 죽동(竹洞)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이양현(李養賢), 최영습(崔永習), 문추(文錘)도 함께 인사하고 갔다. 홀로 운포(芸圃), 은경(殷卿)과 더불어 대치(大峙)의 여관에 이르러 운포는 강기(康基)로 향하고 은경은 화정(花井)에 도착하자 돌아갔다. 해가 지는 신시(申時)에 도착하니 이생(李甥)이 맞이하였다. 성여(誠汝), 시중(時中), 원회(元會)가 모두 있었다.
14일 丙申. 맑고 따뜻했다.
표주박・온갖 채소・목화・마・감자 등을 심었다. 성여(誠汝), 순좌(舜佐), 이생 교섭(李生敎燮), 한초정(韓蕉亭), 안해중(安海重), 박래홍(朴來洪)이 왔다. 새댁이 익원탕(益元湯)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모두 20첩으로 박진일(朴鎭一)이 처방했다. 덕실(德室)이 팔물탕(八物湯)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모두 20첩으로 왕춘식(王春植)이 처방했다.
19일 辛丑. 맑았다.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도은과 함께 학곡(鶴谷) 김희경(金羲卿) 형제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황백거(黃伯渠)을 찾아갔다.
20일 壬寅. 맑고 바람이 불었다.
순좌(舜佐)가 왔다. 아침을 먹은 뒤에 갑자기 미친 듯 흥겨움이 발동하여 성전(聖田)을 유람하고 싶었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해가 이미 오시(午時)가 지났고 성전은 여기서 거리가 10리(里)나 되니 오가기가 바쁠 것인데 언제 유람하면서 감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직 겨울철 하루해가 남아 있으니 상심하지 말자”라고 하고, 드디어 사람들에게 밥 지을 도구와 술 한 병・쌀 한 되・절인 콩잎과 푸성귀・소금(小琴)・동금(銅琴)・바둑판과 줄을 꼬아 만든 소반 따위를 부탁하고 두 종들에게 명하여 나누어 짊어지도록 하였다. 또 종 하나를 급히 보내 세경(世卿) 부자(父子)와 은경(殷卿)에게 편지로 초청하여 곧바로 도은(陶隱), 옥포(玉圃), 해사(海史), 가운(稼雲), 스님 월해(月海), 동겸(童傔) 장운(壯雲)・도성(道成)과 함께 길을 떠났다. 월해(月海)는 고사리와 병술을 가지고 따라왔다. 해가 지는 신시(申時)에 성전에 도착하니 초청한 사람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드디어 성전 절벽 위의 절집에 오르니 몇 칸 초가가 황폐하였고 사람이 없었다. 다시 산을 내려와 장인암(丈人岩)아래로 갔다. 세경 삼부자, 은경, 성여, 인여춘(印汝春)이 와서 모였다. 세경과 윤경(倫卿)이 모두 술을 가지고 와서 시냇가에 자리를 펴고 솥을 걸고 밥을 하였다. 시내에서 그물질하여 작은 고기 몇 백 마리를 잡아 온갖 푸성귀를 넣고 국을 끓이니 맛이 참으로 좋았다. 고노(雇奴) 광록(光祿)이 산에 올라가 두릅 한 바구니를 따오니 향기가 담백하고 먹을 만하였다.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면서 운(韻)을 불러 시를 짓고는 해가 저물어 횃불을 들고 돌아오니 밤은 이미 해시(亥時) 초가 되었다.
21일 癸卯. 흐렸다.
앵무새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도은(陶隱), 옥포(玉圃), 해사(海史), 능석(菱石), 가운(稼雲)과 함께 대치(大峙)에 가서 김성실(金聖實)의 아내 초상을 위로하고 채여성(蔡汝誠)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그의 아들과 조카만 만나고 돌아왔다. 김현(金峴) 이생 승서(李生升緖)가 서울에서 돌아와 9일에 보낸 집 아이의 네 번째 편지를 받았다. 8일 날 또 응제과(應製科)를 실시하여 100명을 취하였는데, 대과(大科) 2명, 진사 3명이라고 한다. 밤에 여러 손님들과 함께 육률[陸律, 陸放翁의 詩]의 운(韻)을 넣어 시를 지었다.
22일 甲辰. 맑았다.
도은(陶隱), 옥포(玉圃), 해사(海史), 능석(菱石), 가운(稼雲)과 더불어 의두암(倚斗岩)에 올랐다.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인운거(印雲擧)도 따라왔다. 잠시 후 미정(眉亭)과 최생 영습(崔生永習)이 와서 모여 각자 율시 한수를 짓고 날이 저물어 돌아왔다. 도은・옥포가 갔다. 광주(廣州) 이방(吏房) 김효근(金孝根)이 사람을 보내 임금께서 용서하신 것을 경하하였다.
23일 乙巳. 흐렸다. 신시(申時)부터 비가 내려 밤이 되자 큰 비가 내렸다.
조운포(趙雲圃), 황석정(黃石汀), 김경렬(金景烈), 김생 동만(金生東萬) 형제, 최성여(崔誠汝)가 왔다. 박범수(朴範壽)가 와서 묵었다. 동학당(東學黨)이 서울에 방을 붙여 이번 달 7일 양왜(洋倭)를 섬멸하겠다고 하여서 서울사람들이 자못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아무소리 없이 지나 도성은 조용하였다. 이로부터 시골 구석구석까지 방(榜)이 곳곳마다 붙었는데 모두 양왜(洋倭)를 쳐부수자는 말이었다. 이들은 청주(淸州)・천안(天安)에서 약속하여 모여 장차 서울로 향한다고 한다. 도내의 영동(永同)・보은(報恩)・목천(木川) 등지에 무리지어 주둔하여 흩어지지 않자 도백[道伯, 충청감사]이 사람을 보내 자세한 것들을 염탐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향촌의 소동과 유언비어가 사라지지 않았다.
24일 丙午. 아침까지 비가 오다가 그쳤다. 비가 세차게 지나가 보리농사에 방해가 되었다.
광주(廣州)에서 내려온 사람 석용순(石容淳), 김재석(金再石)이 돌아가는 편에 안동(安洞) 집 아이에게 세 번째 편지를 부쳤다. 박범수(朴範壽) 홍일(洪一)이 갔다. 순득(順得)이 3일 전에 왔다가 오늘 갔다. 성여(誠汝)가 왔다. 백치(柏峙) 이초계[李草溪, 敏升]의 집 편에 집 아이의 다섯 번째 편지를 받았는데, 이것은 바로 25일 정미(丁未)의 일이었다.
26일 戊申. 맑았다.
박원택(朴元澤)이 왔다. 윤성빈(尹聖賓)이 와서 묵었다. 읍리(邑吏) 유규항(兪圭恒)이 감영의 기별을 보내왔는데 금백[錦伯, 충청감사]이 체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그 대신인지는 아직 자세하지 않다. 동학당(東學黨)들이 보은(報恩) 속리산 속[속리산 서쪽 장내땅]에 모여 있었는데, 순상[巡相, 충청감사]이 아전을 보내 정탐하니 모인 사람들은 27,000여 명으로 성채를 쌓고 깃발을 꽂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장차 왜양(倭洋)을 공격한다고 표방하였다. 영리[營吏, 감영의 아전]가 그 무리의 우두머리를 만나 사정을 묻고 또 당(黨)을 해체하고 돌아가 농사지을 것을 권하자, 대답하기를 “수십만 사람들을 어떻게 관의 명령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은 비록 조그마한 무기도 없지만 막강한 왜양(倭洋)을 무찌르려고 한다. 각기 믿는 바가 있으니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관문(關文)에 ‘이런 부류’란 글자[那類]가 있는 것을 두고, “체면을 잃은 듯하다. 모두 같은 양반으로 하필이면 이와 같은가?”라고 하였다. 관문에 물러가지 않으면 체포한다는 말에 저들은 “천하에 어떻게 수십만을 가두는 감옥이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사방 봉우리 위에 두 방향으로 깃발을 세우고 돌 성채 안에는 진을 베풀어 놓은 듯하였다. 장내(帳內)의 주변 인가(人家)는 백 여 호(戶) 정도가 되는데, 집집마다 모여 앉아서 글을 읽다가[주문] 매일 사시(巳時)가 되면 돌 성채에서 훈련을 하고, 신시(申時)에는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경포교[京捕校, 포도청의 포교] 7명이 가서 돌담 옆에 앉아서 망을 보는데 저들이 불러서 가보니, 왜양(倭洋)을 물리치는 모임[斥倭洋聚會]이라고 타이르고 노자 10냥을 주며 보내주었다. 그 우두머리는 문경(聞慶)의 이름을 모르는 최반[崔班, 時亨], 그 다음은 충주(忠州) 서병학[徐丙學, 學은 鶴의 오식], 청주(淸州) 송산(松山) 손병희[孫丙喜, 秉熙], 충주(忠州) 이국빈(李國彬), 운량도감(運糧都監) 이름을 모르는 충주(忠州) 전도사(全都事)라고 한다. 조정에서 대감 어일재[魚一齋, 允中]를 삼남도어사(三南都御史)로 삼아 청주와 보은 등지로 보내 기미를 살펴 처리하게 하였다고 한다.
28일 庚戌. 맑았다.
금백[錦伯,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이 체직되어 편지를 보내 작별을 고하였다. ‘동학당(東學黨)을 금지시키지 못하여 함사(緘辭)로 추고하라는 처분을 받고 아울러 체직되어, 조병호(趙秉鎬)가 새로운 백(伯)으로 임명되어 30일 교대한다’고 하니, 신속하게 올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삼남도어사(三南都御使) 어윤중(魚允中)은 이미 청주(淸州)로 길을 나서 보은(報恩)으로 향한다고 한다. 또 평기(坪基)의 큰 생질의 편지를 보니 풍동(豊洞)・평기(坪基)・장전(長田)의 여러 곳은 모두 편안하다고 한다. 다행스럽다. 동학의 시끄러움이 날로 심하여져 보은(報恩) 주둔지로 보은・상주(尙州) 등의 읍재(邑宰)들을 부르고, 읍재가 가지 않으면 이방(吏房)과 호방(戶房)을 잡아와 군량(軍糧)・군기(軍器)를 책임지고 내게 하였다. 또 토호와 부민(富民)들도 곤욕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금구(金溝) 원평(院坪)에 무리 수만이 모여 곧바로 인천(仁川) 제물포(濟物浦)로 달려갈 것을 표방한다고 오시(午時)에 박원택(朴元澤)이 와서 말하였다. 감영의 우편소(郵便)에서 감영의 기별을 가지고 왔다. 동학당(東學黨)들이 줄곧 창궐하여 순영(巡營)에서 관문을 발송해 여러 읍병(邑兵)을 징발하였다. 좌도[左道, 내륙지방] 27개 읍과 하내포(下內浦) 7개 고을에서 모두 군사를 징발한다고 한다. 한참 농사지을 때 소란스러워 민간에서는 농사를 망치는 지경에 이를 듯하니 걱정이다. 또 들으니 동학당들이 서울로 향해 서로 잇달아 점막에 도착하였지만 좁아서 몸을 들일 곳이 없어 모두 밖에서 노숙한다고 하였다. 현순좌(玄舜佐), 한초정(韓蕉亭), 서혜춘(徐惠春)이 왔다. 유진사(兪進士)가 왔는데, 혜거(兮居)의 아들로 상을 당한 사람이다.
29일 辛亥. 맑았다.
인택여(印澤汝)가 왔다. 이사원(李思元)이 매전(梅田)에서 왔다. 들으니 생질 이훈재(李勳宰)가 그 두 누이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서울이 소란스러워서라고 한다. 이매(李妹)는 귀천(歸川)으로 가서 모자(母子)가 서로 만나고 경율(景律)이 모시고 왔다고 한다. 예산(禮山) 감찰(監察) 이성희(李性熙), 왕천우(王千又), 감찰 윤영제(尹永濟)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