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癸丑. 흐렸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안성(安城) 스님 계선(戒僊)이 왔다. 계선이 평택(平澤)을 지나다 홍실(洪室)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현순좌(玄舜佐), 박종헌(朴琮憲)이 왔다.
2일 甲寅. 맑았다.
최성여(崔誠汝),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아산(牙山) 재종제(再從弟) 도경(道卿)이 이생 명하(李生鳴夏)와 함께 와서 묵었다. 매전(梅田) 이훈재(李勛宰)가 돌아오는 편에 25일 보낸 집 아이의 여섯 번째 편지를 받았는데, 재동[齋洞, 金晩植] 형님께서 형조판서에서 체직되었다고 한다. 가평(加平) 이랑(李郎) 내외의 편지도 보았다. 이실(李室)이 얼마 전 낙태를 하였다니 매우 놀랍고 애석하다. 그간 양로연(養老宴)은 이미 지났다. 술과 음식, 음악으로 노인들을 즐겁게 하고, 또 내외연(內外宴)을 베풀어 임금님과 동궁께서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솜씨 좋은 사람에게 노래하도록 하고 관현(管絃)을 불게 하니 성대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일본 공사(公使) 오오이시 마사키[大石正基]가 북도(北道) 콩[黃豆]의 일로 임금을 뵙고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오만 방자하게 굴어 온 조정에서 분하게 여겼는데, 일본(日本) 민당(民黨)들은 오오이시(大石)가 우리나라에서 배척을 당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분하게 여겼다고 한다.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니 걱정스럽다. 동학당(東學黨)의 소란으로 서울도 흉흉하여 시장가게에서는 거래가 아울러 끊기고 부녀자들이 고향으로 많이 내려갔다고 한다.
3일 乙卯. 맑았다.
새댁이 조경익원탕(調經益元陽)을 다 복용하였다. 나는 흑노두(黑櫓豆)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도경(道卿) 이생(李生)이 갔다. 유규항(兪圭恒)이 감영의 기별을 기록하여 보냈다. 25일 보은군수(報恩郡守)가 장내[場內, 場은 帳의 오식]에 있는 동학당회소(東學黨會所)로 가서 정황을 물어보니, 모인사람들이 7만 여 명이나 되고 그 무리 수 백 명이 접장(接長) 4~5인을 끼고서 돌담 옆에서 문답하기를, “조정에는 충언(忠言)을 하는 사람이 없고 밖에는 정직한 사람이 없으니 우리들이 왜양(倭洋)을 물리치기 위해 모인 것이고,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保國安民, 保는 輔의 오식] 할 계획이다”라고 하니 그 말이 매우 장황하고 사람을 현혹하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재(卿宰)로서 모인 자가 수 백 명이 되고 수령(守令)은 천 명 가까이 된다. 인심이 절로 이와 같은데 해산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깃발에 표지를 달았는데, 깃발 면에 모두 군현(郡縣)의 이름을 쓰고 군현의 글자 아래에는 모두 의(義)자와 경(慶)자로 표시를 하였다. 또 부유한 백성들에게 발통하여 양미(糧米)를 빌려갔다고 한다. 어제 매전(梅田)으로 돌아가는 인편에 집 아이에게 네 번째 편지를 부쳤다.
5일 丁巳. 맑았다.
세경(世卿), 은경(殷卿), 이성도(李聖道), 인문식(印文植)이 왔다. 장전(長田) 별제(別提) 생질이 와서 묵었다. 풍동(豐洞)에서 보낸 편지와 평기(坪基)의 편지를 받았다. 풍동의 누님이 얼마 전 손녀 금희(金姬)를 잃었으니 참혹하다. 들으니, 보은(報恩)의 동학당(東學黨)들이 지난 달 26일 양남도어사[兩南都御史, 어윤중]가 직접 가서 회유하니 모두 사죄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고 결단코 다른 뜻이 없음을 상달하기를 청하며 왕의 비답을 받은 뒤에 곧바로 마땅히 해산할 것이라고 했다 한다. 병사(兵使) 홍재희(洪在羲)가 군대 300명을 이끌고 내려와 곧장 보은으로 향했다고 한다. 황간 탐문기(黃澗探問記)를 보니, 괴수(魁首) 최시형은 나이가 60남짓으로 상주(尙州)에 살고 서병학[徐丙學, 學은 鶴의 오식]은 청안(淸安)에 살며,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였는데, 괴수의 깃발 부호는 왜양(倭洋)을 물리치고 정의를 부르짓는다[斥倭洋倡義]’이고, 또 가운데가 황색인 작은 깃발을 항상 몸 가까이에 두었다. 청주(淸州) 사는 이국빈(李國彬)은 장군의 지략이 있는데 깃발의 부호를 붉은 색깔로 하여 높이 매달아 온 진영을 통솔하는 주장(主掌)으로 삼았다. 나머지 깃발은 모두 읍의 이름으로 하였다. 전라도(全羅道)는 모두 금구 원평에 모였으며, 괴수(魁首)는 보은(報恩)에 사는 황하일((黃河一), 무장접주(茂長接主) 손해중(孫海中)으로 만 여 명을 거느리고 21일 〈보은으로〉 올 뜻이 있다는 사통을 보냈다고 한다.
6일 戊午. 흐리고 밤에 비가 왔다. 소만절(小滿節)이다.
최성여(崔誠汝),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오시중(吳時中)이 와서 묵었다. 들으니 예산(禮山)・덕산(德山) 등지의 동학당(東學黨)들이 모두 해산하여 돌아가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 대개 도어사(都御史)의 회유로 귀순한 것이라고 한다.
7일 己未. 맑았다.
별제(別提) 생질이 갔다. 원평(元坪) 김석운(金石雲)이 서울소식을 보냈다. 들으니 그의 둘째 아들과 손자 금린(金麟)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집 아이에게 편지를 받아온 것으로, 바로 이달 2일 집에서 보낸 여덟 번째 편지이다. 임금께서 동학당(東學黨)들이 점점 소란스러워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고, 도어사(都御史)를 바꾸어 선무사(宣撫使)로 삼고 그로 하여금 직접 가서 윤음을 읽어주도록 하였다. 홍재희(洪在羲)가 군대 3백 명을 이끌고 보은(報恩)으로 향하였다. 이로써 도성의 소란과 유언비어가 크게 일어나 부녀자들 가운데 난을 피하는 자들이 성문을 가득 메우며 나갔다. 전보가 잇달았다. 지난달 보름날에 들은 바로는 보은에 모인 당(黨)들은 끝내 해산하지 않았다. 관서(關西) 함종(咸從)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는데, 기백[箕伯, 평안감사]이 부상(負商)의 우두머리 세 명을 죽이자, 현선달(玄先達)이라는 자가 천 여 명의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대개 보은의 일을 듣고 때를 틈타 난리를 일으키려는 것이다. 북도(北道)의 회령(會寧)・종성(鍾城)에 민란이 일어나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콩[黃豆] 관련으로 일본에 배상하는 문제로 일본의 민권당(民權黨)의 의론이 끓어올라, 천진(天津) 북양(北洋)으로 전보를 보내 조선이 규정을 어긴 실수를 북양이 중간에서 조정하기를 청하고, 또 원관(袁館)에 전보를 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외무독판[外務督判, 判은 辦의 오식]과 주일공사일본공사(日本公使) 김가진(金嘉鎭)을 이조참의 김사철(金思轍)로 대신하고, 외무독판(督辦) 조병직(趙秉稷)을 대감 남병철(南秉哲)로 대신하였다으로 체직하고 다시 협상하여 타결하도록 했는데, 상황으로 보아 배상금은 9만원 내외가 될 것이라고 한다. 조운포(趙雲圃)가 왔다. 채생 규명(蔡生奎明), 규상(奎商), 규흥(奎興)이 왔다. 황석정(黃石汀)이 왔다. 김오겸(金五謙)이 왔다.
8일 庚申. 흐리고 밤에 맑았다. 달빛이 매우 아름다웠다.
지난달 원평(元坪)의 모임에서 욕불일[浴佛日, 초파일]을 기다려 죽동(竹洞) 인세경(印世卿)의 집에서 모이자고 약속하였다. 김석운(金石雲)이 감기를 앓으면서도 병을 무릅쓰고 왔다. 함께 송평(松坪)에 가서 지사(知事) 김현순(金賢渟) 노인을 찾아갔다. 나이가 88세로 윤기가 온 얼굴에 가득하고, 〈사람을〉 맞이하고 보낼 때 무릎 꿇고 절할 수 있었고, 등불아래에서도 달력의 작은 글씨도 보고 치아도 젊을 때와 같았다. 그의 자식은 다섯이었는데 모두 건강하게 집안일을 잘 하고 있었고 은경(殷卿)은 더욱 효자로 소문이 났다. 손자가 10여 명으로 수복(福壽)을 모두 온전히 하였으니 지상의 신선이라 할 것이다. 은경이 술과 국수를 마련하여 먹었다. 은경, 윤경(倫卿), 원회(元會), 시중(時中), 경렬(景烈), 여성(汝成)과 이생 태현(李生泰賢)과 함께 죽동(竹洞)의 세경(世卿)의 집에 갔다. 운포(芸圃), 석정(石汀), 한초정(韓蕉亭), 최성여(崔誠汝)가 약속보다 먼저 와 있었다. 인씨(印氏) 사람들로서 도숙(道叔), 택여(澤如), 운거(雲擧), 여춘(汝春), 원유(元有)와 당진(唐津) 인생 문식(印生文植), 홍주(洪州) 류생(柳生)이 있었다. 죽동(竹洞)은 아미타불(峨眉多佛)의 북쪽에 있는데 고요하고 깊고 넓고 평평하며 땅은 비옥하였다. 한 마을에 30여 호(戶)가 살고 있는데 모두 인씨(印氏)로 한 집도 다른 성이 없었다. 대개 10여 대를 이어온 곳이었다. 세경이 사는 집은 그 조부 죽계(竹溪)가 남겨주신 집이다. 죽계는 어질고 문재(文才)로 경향(京鄕)에 이름이 났었고 그의 아들은 효자로 소문이 났었다. 세경의 부자(父子)에 이르러서는 능히 그 가세를 떨쳤다. 내가 정해년[丁亥年, 1887년]에 남쪽으로 온 이후로 세경을 동도[東道, 東은 同의 오식]로 삼았으며, 이곳은 영탑(靈塔)과 10여 리 떨어진 곳이지만 〈세경이〉 하루라도 만나러 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원회(元會)는 밤낮으로 〈내곁을〉 지켰지만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죽동(竹洞)을 보게 되었다. 모인 사람들은 20여 명으로 주인이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여러날 연이어 머무르며, 모두 배부름을 이기지 못하였다. 밤 달빛이 매우 고운데, 사람들이 오늘은 욕불일(浴佛日) 저녁으로 등불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대나무를 쪼개고 종이에 풀칠하여 네 개의 등을 만들어 뜰앞 나무위에 걸어두고 서로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11일 癸亥. 새벽에 가랑비가 오더니 저녁에 개었다. 그러나 여전히 하늘은 먹구름이 끼어 비가 올듯하였다.
오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몸을 일으켜 각기 돌아갔다. 단오날 함께 보덕사(報德寺)로 유람할 것을 약속하였다. 석운(石雲), 운포(雲圃), 석정(石汀), 김경렬(金景烈)은 모두 화정(花井)에 이르러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12일 甲子. 맑았다.
은경(殷卿), 희경(羲卿), 이생 기완(李生起完), 안해중(安海重), 성노포(成老圃), 김지사(金知事), 박원택(朴元澤)이 왔다. 저녁을 먹고 윤경(倫卿)의 집으로 가서 김지사(金知事)를 만났다. 다음날 윤경의 아들이 부인을 맞이하는 예를 치르는 날이라서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지난 임갑년 간에 나라에 근심이 많고 일이 번잡하였다. 나는 당시 인재가 부족한 탓으로 일을 맡게 되어 억지로 노둔한 솜씨를 채찍질하여 힘껏 달렸다. 지금 10년이란 오랜 시간이 흘러 정신은 허비되어 내손을 거쳐 간 지난날의 일들이 아득하여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없다. 계사년[癸巳年, 1893년] 봄, 취당 종형[翠堂 從兄, 김만식]이 편지를 부쳐 지금 조정에서 한성(漢城)의 개잔(開棧) 철거 일을 해결하려고 논의하는데 근거로 삼을 것이 없어 걱정이므로, 상자 속의 오래된 종이를 검사하여 살펴볼 만한 문자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하였다. 이에 먼지 낀 상자를 털고 옛 자취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4~5일의 공부가 필요했다. 그러나 끝내 객잔 철거 공문을 얻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누락이 된 듯하다. 찾는 와중에 손으로 쓴 잡다한 원고 수 백본(本)을 얻었다. 이것들은 모두 나라의 중요한 업무와 외교 관련 문서들이다. 대개 대신 지은 주자[奏咨, 임금에 올린 공문]는 괴원등록[槐院謄錄, 承文院謄錄]에 실려 있고 교령(敎令)과 포고(布告)와 비지(批旨)[疏批는 아울러 기록하지 않았다.]는 후원일기[喉院日記, 承政院日記]에 실려 있는 것들이고, 조회 공문서는 통서존안(統署存案)에 실려 있다. 지금 이 초고가 집에 남아 있는 것은 10분의 일이나 100분의 1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어지러운 초안과 교정을 본 흔적을 보니 예전 일을 맡았던 상황들이 마치 새벽에 있었던 듯하여, 거듭해서 살펴보고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마침내 대신 지은 주자(奏咨), 교령(敎令), 서독(書牘), 치제문(致祭文), 조회(照會), 공사(公私)간에 오간 문서, 잡저(雜著) 등 일곱으로 분류하여 임갑영고(壬甲零稿)라고 이름을 붙이고, 인동식(印東植) 군에게 부탁하여 정서하여 보관하도록 하였다.
나는 본래 시문에 대한 재주가 부족하고 또 대부분 갑자기 초안을 쓴 것이라 윤색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에 절대로 볼만한 문채(文采)가 없다. 또 잃어버리고 흩어져 족히 자료로 살펴보기에 부족하기는 하지만 실제의 담화이고 실제의 일로서 하나도 한가롭게 쓴 것이 없어 한만하게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글과 비교할 것이 아니다. 뒷날 만약 각사(各司) 존안(存案)을 살펴보아 빠진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면 그런대로 완비할 수 있을 것이다. 계사년(癸巳年) 초여름 초순에 내쳐 쫓겨난 신하 김윤식(金允植)은 면천(沔川) 화정우사(花井寓舍)에서 쓰다.
16일 戊辰. 맑았다.
오늘은 도미를 천신[薦新, 새 음식을 조상에 바침]하고 새벽에 죽은 아내 이씨(李氏)의 제사를 지냈다. 일관(日觀)이 가고 박인주(朴仁周)가 왔다. 석교(石橋) 김감역(金監役)이 내일 서울로 떠난다고 하기에 집 아이에게 다섯 번째 편지를 부쳤다. 읍리(邑吏) 유규항(兪奎恒)이 왔다가 감영의 소식을 전하였다. 1일, 선무사[宣撫使, 魚允中]가 전보로 보내온 윤음(綸音)을 받들고 공주영장(公州營將), 보은군수(報恩郡守) 이중익(李重翼)과 더불어 장내[場內, 場은 帳의 오식]의 동학당회소(東學黨會所)를 왕복하면서 성지[聖旨, 임금의 효유]를 읽어 밝게 회유하자 동학당들은 모두 감격하여 우는 자들도 있었다. 그 중에 서병학(徐丙鶴)이라는 자는 스스로 이 당에 잘못 들어왔다고 후회막급이라고 하면서 취회내역서(聚會來歷書) 한 통을 올렸는데, 대개 전 금백[錦伯,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탐학이 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허물을 돌렸다. 또 말하기를 “호남(湖南)에 모인 당[黨, 금구원평취회]들은 우리들과는 다르니 절대로 뒤섞어 보지 말고 옥석을 가려 달라”고 하였다. 드디어 3일, 모든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선무사는 곧바로 금구 원평의 회소(會所)로 갔다고 한다. 기지(機池) 사예(司藝) 김헌영(李憲永)이 와서 묵었다.
김후몽 시랑 학진에게 답하는 편지[答金後夢 侍郞鶴鎭書]
후몽 인형 집사(後夢仁兄執事)께.
형의 편지를 오랫동안 받지 못했습니다. 도은[陶潛, 중국 당나라 문인 도연명]의 정운시(停雲詩)에 이르기를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그대를 그리는 마음 참으로 깊네. 원하는 말 얻지 못하였으니 포한(抱恨)이 어떠할까?’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매번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몇 번이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를 가지고 생각해보건대 제가 평소에 교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문안해 주기를 사람들마다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우리 형에게만은 유감이 있었는데, 얼마 전 보내신 편지에 조리 있는 수십 줄의 절실하고 도타운 정성으로 몇 년의 막혔던 회포가 하루아침에 눈 녹듯 녹아 마치 영포(英布)가 집으로 나아간 것 같았으며, 저도 모르게 또 바람보다 과분함에 크게 기뻤습니다. 복 많이 받으시고 공훈과 꾀가 크게 드러났음을 알았으니 기대하던 끝에 어찌 기쁨과 위로되는 마음을 이길 길 있겠습니까?
저는 남소(南昭)에서 도깨비들에게 막힌 지 7년이나 되었다가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 죽으라는 명을 받았는데, 예로부터 영해[嶺海, 산골이나 섬]로 귀양 간 자들은 평생을 돌아갈 수 없었으니 저 같이 임금의 은혜를 만난 것이 어찌 다행히 아니겠습니까? 다만 약한 몸으로 여러 차례 풍상을 겪고 또 내포[內浦, 충청도 내포지방 곧 면천일대]의 생활에 익숙지 않은 채 수년을 지내다보니 머리가 빠지고 형상은 초췌하여 사람의 꼴이 아닌데, 만나는 사람들은 본래 그렇다고 여깁니다. 지금 자세하게 자주 꾸짖어 주시는 말씀을 받았으니 정에 과분한 꾸짖음은 아닌지요?
대저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은 빈궁하고 영달한 상황에 처하여서는 모든 것들을 천명에 맡겨 두고 스스로에게 진실로 태연하였기 때문에 즐거움을 잃지 않고 몸과 정신이 절로 왕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명을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도의(道義)를 즐기고 성경(誠敬)을 귀히 여기는 것에는 끝내 한 점도 실제로 터득하여 의지한 것이 없었던 까닭에 〈마음을〉 외물에 빼앗기어 한결같이 젖어드는 대로로 내맡겨두었으니 어찌 날마다 쇠모(衰耗)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랫동안 밖에 있어 조정의 일은 듣지 못해 지어 놓은 사적인 글은 야인의 한가한 말에 불과하여 남에게 보인 적이 없으며 어디를 통해 보여드릴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진실로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편지에서 말씀하신 임금을 이끄는 한 가지 일은 진실로 만물을 교화하는 근본이라고 하셨으나 전(傳)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몸에 간직한 것을 미쳐 풀어내지 아니하고 남을 깨우치는 자 있지 않다[所藏乎身不恕, 而能喩諸人者, 未之有也]”라고 말입니다. 저는 몸과 마음의 공부가 아직은 갈피를 잡지 못해 사치스럽게 임금을 바로잡는 것(格君)을 말해도 누가 믿으려 하겠습니까? 일이나 단서에 따라서 선을 펴고 악을 막는 것과 같은 일은 〈임금의 곁에서〉 보도(輔導)하고 간하는 자들의 임무이지 야인(野人)이 할 바는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금을 이끄는 도리는 빈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어진 사보(師保)를 선발하여 덕의(德義)로 전하고 경전(經典)으로 가르쳐 큰 인물을 먼저 세우게 한 다음 좌우의 사람을 신중히 가려 선한 단서의 발로로 인하여 개도(開導)하고 그릇된 마음의 싹을 살펴 없앤다면, 성덕(聖德)이 날로 이루어져 절로 광명(光明)한 곳으로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보고 느끼는 것에서 얻는 것이 으뜸이오, 일로 인하여 경계하고 반성하는 것이 그 다음이 될 것입니다. 지금 무사(無事)한 때 말을 확고히 하는 동안에 옛 말씀을 줄줄이 꿰며 군덕(君德)을 면려하고 성학(聖學)을 면려하라고 지리하게 늘어놓습니다. 무릇 올리는 말이 이런 것을 말머리로 삼아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음이 없어 찬란하여 볼 만합니다만, 당세(當世)의 임금이 보고 한낱 문구(文具)로 여기고 살피지 않는다면 군덕(君德)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대저 일의 요체는 말이 반드시 간명하여야 하니 요・순・우[堯舜禹, 중국 고대 성군]가 서로 주고받을 때 그 요체는 정일(精一) 몇 구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열[傅說, 중국 고대 은의 어진 재상]이 은 고종(高宗)에게 아뢴 것도 전학(典學) 몇 구절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정치를 하는 방법을 논한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제 양공(齊梁公)에게 유세할 때 그치지 않고 거듭해서 말한 것은 바로 왕정(王政)을 닦고 백성의 산업을 제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이와 반대이니 정일(精一)하고 지극한 요체가 되는 일을 다반사의 말로 마침내 그럴싸하게 꾸밉니다. 그러나 정치를 닦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말을 많이 하여도 병통으로 여기지 않을 것인데 사공(事功)이라 여기고 생략해버립니다. 인주(人主)로 하여금 살펴보게 해놓고는 별안간 착수할 곳이 없게 만드니, 그 번다하고 간략함의 마땅함을 잃은 것은 아닌지요? 보내오신 말씀에 맹자(孟子)가 세 번이나 제왕(齊王)을 만났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맹자가 임금을 바로잡는 도리를 깊이 터득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저 세 번 만났음에도 말하지 않았던 것은 비단 그 어긋난 마음을 고치게 할 뿐만이 아니라 말할만한 단서를 얻어 신중하게 말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선왕[宣王, 齊宣王]이 환문[桓文, 齊桓公과 晉文公]의 일을 묻고 또 소를 바꾼 한 가지 일로 그 말의 단서를 통해 반복하여 경계하고 꾀어 왕도정치의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진실로 왕도정치를 실행한다면 군덕(君德)에 있어서는 어떠합니까? 이때 제왕(齊王)의 막혔던 것은 거의 열렸습니다. 한번 말씀드려보자면, 만약 훗날 군자(君子)가 제왕(齊王)을 만나 반드시 말의 단서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임금을 바로잡는 말을 시작하여 천인(天人)이 만나는 즈음과 성명(性命)의 근원을 종횡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자기가 배운 바를 다 말하고야 그친다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왕(齊王)은 이미 하품을 할 것입니다. 그러한데 어느 겨를에 정치를 닦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중용(中庸)에서 말한 “도(道)가 밝지 못하고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질고 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난 폐단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이 되니 우리 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의 거친 소견은 본래 이와 같아 지난 날 형과 의논할 때 의견이 조금 일치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는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형께서 저를 보시기를 마치 주자(朱子)가 진동보(陳同甫)를 대하듯이 하니 저 역시 대해주시는 것이 과분하여 감히 견주지 못합니다. 저는 이미 늙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죽기 전에 자리를 함께 하여 한번이라도 말씀을 나누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답장을 하면서 말이 많아져 결국 여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편지를 띄우는 날, 〈형께서〉 구레나룻을 흔들며 한번 웃으시면서 ‘이사람 광노[狂奴, 김윤식의 별호]는 여전하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을 상상해 봅니다. 나머지 많은 것들은 다 쓰지 못하니 모두 살펴주십시오.
17일 己巳. 맑았다. 밤에 습하였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이사예(李司藝)가 갔다. 생원 유순(柳淳),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박원택(朴元澤)이 갔다. 시중(時中), 원회(元會)와 함께 임갑영고(壬甲零稿)를 베겨 적었다. 윤경(倫卿), 희경(羲卿)이 왔다. 저녁에 김석운(金石雲)이 소식을 보내왔는데 오는 13일 정사(政事)에 그의 맏아들 용학(容學)이 인릉 참봉(仁陵參奉)에 제수되었다고 하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다.
18일 庚午. 맑았다.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평택(平澤) 홍랑[洪郞, 思弼]이 집의 종을 보내 집 아이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지난달 28일에 쓴 일곱 번째 편지이다. 이는 은보[殷輔, 洪思弼]가 집으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것인데 은보가 그간 독감을 앓아 지금 전해준 것이다. 들으니 지난 달 그믐사이에 동학(東學)의 소란이 있어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군대를 보내는 것이 편리한지 아닌지를 의논하여 마침내 홍계훈(洪啓薰)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려 보내 도하(都下)가 흉흉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동학당(東學黨)들이 물러나고 흩어졌다는 전보를 받고 민심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교리 송정혁(宋廷奕), 은진(恩津) 김량한(金亮漢)이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내려온다고 한다. 성취묵(成醉)(黙)이 와서 묵었다. 참석했던 양로연(養老宴)의 태평(太平)・풍예(豐)(豫)의 거조에 관하여 성대하게 말하였다. 두 번 세 번 술을 마시는 일은 소란스러운 때라 시행하지 않으며, 외도(外道)의 각 읍에서도 양로연(宴養老)을 베푸는데 25일에 있다고 한다.
22일 甲戌. 흐리기도 하고 해가 나기도 하였다.
새벽에 조모의 제사를 지냈다. 매전(梅田) 이경률(李景律)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15일에 집 아이가 보낸 아홉 번째 편지를 전하였다. 들으니 5일에 선무사[宣撫使, 魚允中]가 진산군(珍山郡)에 도착하여 금구(金溝)의 회소(會所)에서 올라온 동학당(東學黨) 4백 여 명에게 객사(客舍) 문밖에서 깨닫도록 타이르니, 〈그들이〉 말하기를 “모인 당(黨)은 도주(道主) 최시영[崔時榮, 崔時亨]의 지시로 왜양(倭洋)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또 수령의 침탈로 고달프다”라고 하였다. 도어사(都御史)가 거듭거듭 타일러 임금의 말을 선포하니 모두 “예예” 하면서 명령에 복종하고 즉시 돌아가 흩어졌고 금구에 모인 많은 사람들도 차례로 해산하였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나 이 당(黨)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걱정을 놓을 수 없기 때문에 선무사(宣撫使)가 아직은 돌아가 복명(復命)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리영 정령관(經理營正領官) 홍재희(洪在羲)가 군대 수 백 명과 소포(小砲) 세대[尊]를 이끌고 보은회소(報恩會所)에 이르러 포를 쏘면서 무력을 과시하니 당(黨)은 무서워 떨며 달아나면서 살아 돌아가기를 애원하였다. 선무사(宣撫使)가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략 말한 바로는, 이번에 뽑아온 서울의 병사 일초[一哨, 100명]는 보은읍(報恩邑)에 주둔시키고, 일초(一哨)는 회인읍(懷仁邑)에 숨겨놓았으며, 옥천 군수(沃川郡守)에게 병사 천 여 명을 모집하라고 하였고, 또 본군(本郡)의 오위장 한경오(韓慶五)에게 3~4민정(民丁)을 뽑고 읍내에 포수와 한량들을 모아놓고, 만약 명령을 어긴다면 나아가 토벌할 것이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이에 윤음(綸音)을 선포하였기 때문에 그 당(黨)은 머리를 숙이고 절로 달아났다고 한다. 승지 이건창(李建昌)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민당(民黨)이라 일컫는 것들은 바로 난리의 근본이니 적을 적자(赤子)로 보아서는 안되고 마땅히 섬멸해야 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또 어 대감[魚台, 魚允中]이 밝게 타이른 것을 논박하면서 보내온 말이 타당함을 잃었고 상소의 말이 매우 많아서 상소문의 원본은 보관해두었다고 한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초기를 올려 당괴(黨魁) 서병학[徐丙學, 學은 鶴의 오기]과 전가(全哥), 운량도감 직책를 붙잡아 국문하여 사실을 알아내기를 청하자 임금께서 윤허하였다.
일본이 누른 콩을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처음 외서(外署)에서 4만원으로 말을 하자 이 또한 따르려고 하지 않아 6만원으로 더 보탰지만 이도 따르려고 하지 않고 저들은 상인을 철수시켜 귀국하였고 파병한 군선(兵船)으로 위협하여 부득이 11만원으로 정하였다. 북도(北道)의 손해를 물어주는 조항은 9만원이고 해서(海西)의 손해를 물어주는 조항은 2만원이다. 5일 시임(時任)・원임대신(原任大臣)이 회의차 입시(入侍)한 것은 동학당(東學黨)들이 물러간 뒤에 이후 잘 처리할 방법과 일본에 배상을 지급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논의가 정해지지 못하고 “북쪽 건은 마땅히 조병식(趙秉式)을 징계하고 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서쪽 건은 당시 해백(海伯)이었던 오준영(吳俊泳)을 마땅히 징계해야 한다”고 했다 한다. 양로연(養老宴)이 있은 뒤, 오는 11일 처음으로 잔치를 열었고, 13일 두 번째 잔치를 열었다. 모두 기생의 춤과 노래, 놀이 기구가 있었다. 8일 사용한 화구(火具)는 구입한 본 가격은 은 3천 냥이고 당일 화비(火費)로 들어간 돈은 80만 냥으로, 연일 쓰는 비용은 그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 화구 가운데에는 희자등(戱子燈), 가화등(假花燈), 불탑등(佛塔燈)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이 있었고 각종 상으로 준 것이 지난해에 비하여 곱절에서 다섯 곱절이나 되어 어쩔 수 없이 외국에서 돈을 빌려 마련하였다. 이건창(李建昌)의 상소에도 이를 언급하여 간하였다. 예산(禮山) 선달 강영로(姜永老), 온양(溫陽) 김생 헌식(金生憲植)이 와서 묵었다. 장운(壯雲)이 귀가했다.
23일 乙亥. 흐리기도 하고 해가 나기도 하였다.
강변(姜弁), 김생(金生)이 갔다. 김생 동욱(金生東旭)이 왔다. 원평(元坪) 김석운(金石雲)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해왔다. 내일 서울 가는 인편이 있었는데 편지를 마무리하여 집 아이에게 여섯 번째 편지를 보냈다.
원위정관찰에게 보내는 편지[與袁慰廷觀察書]
지난번에 답장을 보내드렸는데 이미 받았을 것입니다. 이어 근래 조지[朝旨, 조정의 임명장]를 받고 승진하여 절강 온주(浙江溫州)의 결원에 보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8월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임무를 맡으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 이길 길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각하(閣下)께서는 젊은 나이로 큰일을 해낼 재주가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에서 12년이나 머물러 늘 걱정이 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에 높이 벼슬길이 높이 열리어 뛰어난 재주를 펼칠 날이 있어 먼지를 떨치고 흙덩이를 넘어 일순간에 만 리나 날아갈 것이니 오랜 친구로서 어찌 기쁜 마음을 이기겠습니까? 각하께서는 늘 저를 불초하다 여겨 버려두지 않고 욕되게도 함께 교제하여주시고 여러 차례 가르침을 주시니 저 역시 마음으로 정성스럽고 기쁘게 복종하였으며, 스스로 평생의 지기로서 세상에 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임・갑[壬甲, 1882년~1884년] 이후로 하루도 헤어진 적이 없이 환난과 달고 고통스러움을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정해년[丁亥年, 1887년] 남쪽으로 귀향 온 지 7년 동안 소식과 만나보는 것조차 모두 막혀 실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살면서도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다시 만날 기약이 있어 마음에 절로 위로로 삼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으니 걱정이 되어 즐거운 마음이 다시 없어졌습니다. 각하께서 멀리 떠나시고 저도 늙고 폐인이 되었으니 이 세상에 살아서 어찌 다시 만날 날이 있겠습니까? 각하께서 이렇게 떠나시니 이별하는 마음 온 나라가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이 들지만 저보다 깊고 절실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뒷날 다행히 죽지 않고 또 왕래하는데 막힘이 없다면 비록 만 리 먼 길이라도 쫓아가서 한번 얼굴을 뵙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여길 것입니다. 비록 길에서 걸식하고 길에서 넘어지고 자빠지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조화로 어떻게 인연이 맺혀져 나에게 이러한 뜻을 이루게 할지요? 각하의 재주와 덕망은 반드시 지금 세상에 쓰이게 되어 있으니 원컨대 노력하고 스스로 담임(擔任)하여 대국(大局)을 유지하는 것에 유념하십시오. 만약 중국이 안정이 되면 우리나라가 그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데, 또한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깊이 이러한 뜻을 아시고 저의 권면을 기다리지 마시고 살펴 헤아리십시오.
생각하건대 지금 태석인(太碩人)께서는 기력 왕성하시고 조카와 형제들도 잘 지내시는지요? 준수한 자손들이 눈앞에 두루 펼쳐져 있는데도 한번 만나지도 못하여 몹시 한스럽습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아직 수개월 뒤일 것이라 생각이 되지만 그때가 되면 인편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편지로 다하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속에 있습니다. 원컨대 나라를 위해 자애(自愛)하시고 계절에 따라 편안하시기를 청하며 이만 줄입니다. 주옥산(周玉山) 관찰(觀察)은 아직 나루에 있습니까? 대신 안부를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신〉
거듭 말씀 드리는 것은 근래 우연히 상자를 검사하다가 지난날 각하께 드렸던 수십 시(詩)를 얻었습니다. 대개 그때는 바쁘게 휘갈겨 써서 곧바로 보내드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다가 지금 멀리 이별하니 어찌 차마 끝내 숨기겠습니까? 이에 보잘것없는 솜씨로 써서 보내드립니다. 눈은 어둡고 붓은 거칠어 세속 사람의 눈에 보여줄 만하지는 못하지만, 이로써 옛날 홍설(鴻雪)의 인연의 증거로 삼을 뿐입니다.
집안의 종형(從兄) 취당[翠堂, 金晩植] 선생 환갑연(還甲宴) 시(詩)와 소서(小序).
집안의 형 취당선생(翠堂先生)은 벼슬한지 30년 동안 편벽되는 행동이 없이 뛰어난 풍모로 충신(忠信)・정직을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풍류가 돈독하고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아 조야(朝野)에서 추중을 받았다.
계사년(癸巳年) 여름 사구(司寇)의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자 호서의 분위기는 새로이 다스려졌고 보리농사가 크게 풍년이 되어 조정에서는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시골에까지 두루 소고기와 술을 내리자 기쁜 소리와 어우른 기운이 천하에 다다랐다. 5월 초하루에 날씨는 화창하고 봄바람이 온화하여 뜰에 핀 접시꽃은 붉은색을 머금고 연못의 부들은 푸른색을 하늘 그렸다. 선생의 육순 생일날이 마침 이날이라 천시(天時)와 인사(人事), 철에 나는 산물과 풍광이 하나도 선생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평소에 선을 닦은 아름다운 응보가 아니겠는가? 멀리 이날을 생각해보면 자제(子弟)들과 손님과 벗들이 술잔에 가득 술을 마시고 태평성대를 즐거워하며 오랜 우의를 이야기하니 평화롭고 즐거운 풍모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머리를 들어 남쪽을 바라보며 우러러 탄식하고 고개 숙여 한숨 쉬는 것은 유독 산수유가 어린 것이 한스러워서 일뿐이다. 나의 이날 서글프고 사모하는 회포는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삼가 장구(長句) 두 수(首)를 지어 답답한 회포를 써서 잔치의 축하를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