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壬午. 맑았다가 흐렸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시중(時中)이 갔다. 오늘은 재동[齋洞, 金晩植] 형님의 육순(六旬)생신이다. 형제는 남은 두 사람뿐인데 모시고 지내지 못하여 서글프고 그리운 마음 이길 길 없었다. 올해 비가 고르게 내려 논물이 곳곳마다 넘쳐 높고 낮은 전답을 막론하고 이미 모내기를 하였으니 10년 안쪽으로 처음 있는 일이다.
2일 癸未. 맑았다가 저녁에 흐렸다.
서울 집에서 배로 보낸 생활용품 두 짐이 와서 성의 구미포(九尾浦)에 정박하고 있어 광록(光祿)과 촌의 일꾼 한 사람을 보내어 지고 오도록 하였다. 성여(誠汝), 군선(君先)이 와서 함께 영탑(靈塔)의 뒷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고 돌아와 노전(爐殿)에 이르러 은경(殷卿)을 만났다. 〈은경이〉 내일 서울로 심부름꾼을 보낸다고 하여, 집에 돌아와 재동(齋洞)으로 올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시중(時中)이 갔다.
5일 丙戌. 밤낮으로 비가 왔다.
단오(端午) 차례를 행하였다. 오늘 원평(元坪)에 가서 석운(石雲)과 함께 보덕사(報德寺)로 유람을 갔다. 이미 욕불일[浴佛日, 초파일]에 약속하기를 본관(本官) 초하(蕉下) 홍종윤(洪鍾奫)도 함께 유람하자고 했다. 빗방울이 떨어져 문밖을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오후에 본관(本官)이 비를 무릅쓰고 왔다. 비가 조금 그칠 때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초하(蕉下)와 동행했다. 도중에 큰 비와 큰 바람을 만났다. 원평에 도착하니 김일관(金日觀)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머지 약속한 사람들 중에 한사람도 온 사람이 없었다. 밤에 석운(石雲), 초하(蕉下), 도은(陶隱)과 함께 상을 마주하고 앉아 먹었다.
6일 丁亥. 아침에 비가오더니 저녁에 개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직 비가 내렸다. 주인과 손님이 걱정하며 앉아 있었는데 오후에 날이 개었다.
마침내 석운(石雲), 초하(蕉下), 도은(陶隱), 이생(李生) 태현(泰賢), 문생(文生) 추(錘), 월해(月海) 스님, 김일관(金日觀), 시동(詩童) 장성록(張成祿), 이우린(李又麟), 최생(崔生) 시철(時澈)과 함께 가야동(伽倻洞)으로 동행했다. 원당곡(元堂谷)을 경유하여 다시 쌍룡폭포(雙龍瀑布)를 보았다. 비온 뒤라 물소리가 매우 커 전에 비해 더 좋았다. 이로부터 가야동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했다. 남연군(南延君)의 묘소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伽倻寺)의 유적지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 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끗했다. 옛부터 이 산은 왕기(王氣)가 있다고 일컬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 10여 년 뒤에 성인(聖人)이 탄생하고 이어서 용흥[龍興, 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地官)들이 풍수(風水)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 각(閣)을 짓고 비(碑)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陵所)보다 덜하지 않았다. 보덕사(報德寺)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밤에 절에서 묵었다. 주지 각률(覺律)은 법호가 한송(漢松)으로 해월(月海)의 스승으로 일전에 경산(京山)으로 갔다. 승려는 30여 명이고, 불당(佛堂)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외에 새로 지은 어필각(御筆閣), 칠성각(七星閣)이 있고, 또 여승 2명이 그 곁에 살고 있었다. 저녁에 황석정(黃石汀)이 쫓아왔는데 약속했던 사람이다. 윤성빈(尹聖賓)이 갔다. 현재 집이 교동(橋洞)에 있으니 이곳과는 10리(里)쯤 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7일 戊子. 맑았다.
성취묵(成醉黙)이 와서 모였는데 약속했던 사람이다. 주사(主事) 이철의(李喆儀)가 와서 만났다. 밥 먹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면서 옥병계(玉屛溪)를 보니 맑은 시냇물이 벼랑을 휘감아 돌아 하나같이 모두 명승지였다. 윤병계(尹屛溪) 선생은 이로써 스스로 호를 붙인 것이다. 시냇가에 자리를 펴고 둘러 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이주사는 거문고를 잘 탔다. 도은[陶隱, 李敏夔]은 동금(銅琴)을 타고, 김일관(金日觀)은 생황을 불고 나는 거문고를 타면서 화답하였다. 거문고 연주가 끝나자 시를 지어 읊조리며 함께 묘소의 재실(齋室)에 들어갔는데 바로 윤신창(尹新昌)의 고택(故宅)이었다. 그 옆에 오래된 윤온양(尹溫陽) 어른의 고택이 있었는데, 내 나이 17살에 성주(星州)의 중부(仲父)님 부임지에서 경과[京科, 서울과거]에 가기 위해 구불구불한 길로 이곳을 지나갔다. 그때 망실[亡室, 죽은 아내]이 와서 그의 조부인 온양(溫陽) 어른을 뵈었는데 지금부터 40여 년 전 일이다. 당시 만났던 사람은 한사람도 남아 있는 사람이 없고 집도 남의 물건이 되어버렸으니 물거품이나 환영 같은 세상과 변하는 인사(人事)에 진실로 마음이 허무하다. 홍생(洪生)이란 자가 재실(齋室)에 머물고 있었는데 일찍이 도은(陶隱)에게서 수업을 받았던 사람으로 점심밥과 술과 음식을 장만하였는데 동행한 사람이 매우 많아 폐를 끼치는 것이 적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나만 홀로 몸을 일으켜 교동(校洞)으로 윤성빈(尹聖賓)을 방문하여 외구고(外舅姑) 사당에 절을 하였다. 다시 재실(齋室)로 돌아와 여러 사람들과 다시 보덕사(報德寺)로 돌아가서 은경(殷卿), 세경(世卿), 윤경(倫卿), 도숙(道叔)을 만났다. 〈이들은〉 지금 비로소 뒤미쳐 도착하여 절의 누각에서 막 밥을 먹고 있었다. 해가 저문 뒤 윤성빈 형제와 이주사, 황생 동연(黃生東淵) 형제가 각기 술과 음식을 마련해와 일행들이 실컷 취하고 배불리 먹었다.
8일 己丑. 맑았다. 오늘은 하지절(夏至節)이다.
아침을 먹고 돌아갈 짐을 꾸렸다. 윤성빈(尹聖賓) 형제, 황조여(黃朝汝) 형제, 이주사(李主事), 김일관(金日觀)은 모두 덕산(德山)사람이다.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황석정(黃石汀)은 이주사(李主事)의 초청을 받아 가고,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나와 함께 길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강당(講堂)에 들러 수석(水石)을 구경할 것을 약속했다. 대개 강당(講堂)의 수석은 근방 시골에서 이름이 나 내가 오랫동안 한번 보고 싶었지만 지금 돌아가는 길이 멀지 않아 들러서 볼 수 있다. 오시(午時) 무렵에 강당곡(講堂谷)에 도착하니 계곡은 길이가 10리(里)나 되고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 솟아난 곳은 폭포를 이루었고 고인 물은 맑은 못이 되었다. 푸른 나무그늘과 반석(盤石)은 곳곳마다 감상할 만하였다. 물이 끝나는 곳의 경치가 가장 빼어나다는 말을 들었지만 여러 사람들이 피곤해하여 끝까지 갈 수 없어 폭포 중에 아름다운 곳을 골라 다시 바위에 둘러앉았다. 종인(宗人) 익경(益慶)은 강당리(講堂里)에 사는데 술을 가지고 와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마시고 해 저무는 신시(申時)에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맑은 물이 흐르는 반석을 골라 앉으니 강당에 사는 이생 집봉(李生集鳳)이 술과 밥을 마련해 와서 먹었다. 일행들이 밥을 다 먹고 시를 다 짓기도 전에 해는 벌써 저물었다. 마침내 일어나 산을 내려오면서 이생(李生)과 익경(益慶)의 집을 찾아보고 바삐 가면서 옛 절터를 보았는데 두 개의 탑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 후에 들어보니 강당은 옛날 대가람(大伽藍)이 한창일 때는 절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고 미륵부처가 계곡에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철불(鐵佛)과 두 개의 탑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철불(鐵佛)은 매우 높고 컸으며, 또 최고운[崔孤雲, 崔致遠]이 쓴 비석은 비록 판각이 마멸되어 분별하기 어려웠지만 천년의 고적(古蹟)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보배로 일컬어진다. 이곳을 지날 때 마침 해가 어두워져서 일러주는 사람이 없었으면 헛걸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니 탄식이 나올 만하였다. 초경(初更) 즈음에 인암(印岩)에 도착하니 이곳이 강당동(講堂洞)의 문이었다. 쌓인 돌이 벽을 이루어 높이가 10길[丈]로 앞으로는 맑은 계곡의 흰 돌을 임하고 있고 마주보면 푸른 벽이 병풍처럼 둘러 뛰어난 경치였다. 고란사(皐蘭寺) 유적(遺墟)이 산위에 있었다. 마을 어귀 양 옆으로 여덟 자되는 큰 돌로 대(臺)를 만들고 그 위에 홍교(虹橋)를 만들어 고란사로 통하는 길로 삼았는데 다리는 무너지고 석대(石臺)만 남아 있었다. 당시 절의 물력(物力)이 번성하였음을 볼 수 있었고, 또 무릉동(武陵洞), 군장동(軍長洞)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일컫는 병란을 피할만한 복된 곳으로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해는 저물고 길은 구불구불하여 다 찾아 볼 수 없다. 또 매우 궁벽한 곳이라 살만한 땅을 아니었다. 성취묵(成醉黙)은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익경(益慶)과 이집봉(李集鳳)이 모두 작별하고 갔다. 이때부터 불을 들고 원평(元坪)에 도착하니 기해일(己亥日) 새벽이었다.
9일 庚寅. 밤에 비가 왔다.
아침을 먹고 석운(石雲)을 이별하고 초하(蕉下), 은경(殷卿) 형제, 세경(世卿), 도숙(道叔)과 함께 동행하였다. 다시 대치현(大峙峴)에 이르러 초하와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 아이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답답했다. 이성도(李聖度)는 내가 보덕사(報德寺)로 유람갔다는 말을 듣고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모임에 갔지만 내가 이미 돌아갔다는 것을 알고는 뒤좇아서 이곳으로 왔으니 애석하다.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나는 기침과 감기 기운이 심하여 10여 일 동안 건강하지 못한데다가 또 보덕사를 다녀와 연일 섭생을 제대로 하지 못해 돌아온 뒤로 고통스러웠다.
13일 甲午. 맑았다.
보리타작을 하였다. 평기(坪基) 이생(李甥)이 또 사람을 보내 편지를 부쳤다. 대개 어도어사[魚都御史, 允中]가 금영[錦營, 충청감영]에 와서 지금 전 감사(趙秉式)의 장범(贓犯)을 조사하고 있는데, 산송(山訟) 일로 〈어도사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것이었다. 원택(元澤)이 갔다.
선무도어사 일재 어윤중에게 주는 별지[興宣撫都御史一齋魚允中別紙]
지난 날 동학당(東黨)의 일은 역시 한때의 운수와 관련된 것입니까? 어찌하여 그리 쉽게 그 많은 사람을 모았습니까? 그들이 하는 바를 보면 재주가 없고 무능하여 장각[張角, 중국의 의적]과 묘청(妙淸)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조정이 기회를 타서 그 흉악한 꾀가 정해지기 이전에 일찍부터 도모하지 않거나, 악업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군대의 위협으로 겁을 주고 은혜로운 말로 깨우쳐 살길을 열어주어 그 자리에서 흩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일이 오래되고 변화가 생겨 만연한 피해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태형(台兄)께서 이를 행함에 묵묵히 좋은 꾀를 운용하여 일이 생기기 전에 난리를 중지시켰으니 그 공로가 백만의 군대보다 낫습니다. 근래 물정을 살펴보면 바야흐로 요사스런 기운이 날로 불어나니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한마디 말로 해산하기에 이르자 또 너무 너무 쉽게 여깁니다. 태형(台兄)이 이루어 놓은 일을 보고서는 입으로는 비록 좋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속으로는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배척을 나타내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공명(功名)을 얻는 때에는 옛부터 처신하기 어려웠으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봉조[鳳藻, 李建昌]의 상소와 같은 것은 일을 책임지는[當局] 처지가 아니면서 다만 한때의 어두운 견해를 믿고서 법도를 지키는 논리로 삼는 것이니, 굳이 깊이 따져 볼 필요는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크게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은 신(信)이란 한 글자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 선유(宣諭)한 뒤로 마땅히 조정에서 곧바로 한번 명령을 내려, “지난 일은 묻지 않겠다. 이후 만일 부적과 주술과 사술로 백성들을 선동하고 의혹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고 죽일 것이다.”라고 하고, 명령을 내린 후에 몇 개월의 기한을 두어 다시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잡아들여 법대로 하는 것이 어찌 광명정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지금 한편에서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 타이르고, 한편에서는 무리의 우두머리[黨魁]를 붙잡아 심문하라고 행회(行會)한다면 저들이 어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입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말해놓고도 끝내 식언(食言)으로 돌아간다면 어찌 명령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이 일의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니 당괴(黨魁)는 이미 체포가 되었습니까? 이는 조정의 백성을 다스리는 계책에 달려 있는 것이니 저 같은 야인(野人)이 관여할 바가 아니겠지만 그러나 사태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른바 동학당(東學黨)들은 모두 여우나 쥐처럼 서로 모여 오로지 부적만을 믿고 걸출한 인재가 하나도 없어 다행히 깊이 근심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우려가 되는 것은, 지금 민심이 흩어져 마치 물이 흐르듯이 난리를 좇고 있고 조정에 대한 굳은 믿음이 없는데다가 지방의 탐오(貪汚)한 장리[長吏, 수령]가 또 몰아서 함정에 빠트리고 있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벌써 민심이 흩어져 분을 풀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탁한 사람을 배제하고 맑은 사람을 올리며 이로움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하여 민심의 크게 그릇된 것을 되돌려야 할 것인데, 태형(台兄)께서 이미 그러한 권한이 없는 터에 한갓 구설로 미봉하여 비록 근근이나마 눈앞의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뒷일까지 잘 처리할 방법이 되겠습니까? 한가하게 일없이 살면서 칠실(漆室)의 근심이 깊은 때 마침 인편이 있어 간략하게나마 회포를 풀었으니 한번 보시고 불태우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14일 乙未. 흐렸다.
내가 감기가 줄곧 낫지 않아 몸의 기운이 편안하지 않다. 세경(世卿)이 왔다. 수십 년 전 내가 돌아올 당시 여름에 몸의 기운이 이러하여 여곽탕(茹藿湯), 청륙탕(淸六湯)을 복용했었는데 효과가 있었으므로 밤에 여곽탕 한 첩을 복용했다.
15일 丙申.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향을 사르고 보리[大麥][보리는 5섬 10말[斗]을 수확하였다]를 올렸다. 어제 여곽탕(茹藿湯)을 복용하였는데 기침은 줄곧 났지만 기운은 조금 나았다. 이윽고 청륙탕(淸六湯)을 복용하였다. 은경(殷卿)이 왔다. 문추(文錘)가 왔다. 유한(劉漢)이 왔다.
16일 丁酉. 가는 비가 뿌렸다. 종일 남풍이 불었다.
보리밭을 갈고 콩을 심고 사이사이 들깨를 심었다. 은경(殷卿)집 종이 서울에서 비로소 집으로 돌아와 집 아이가 9일 날 보낸 11번째 편지와 지난달 27일 날 보낸 10번째 편지를 받았다. 집 아이가 노자를 마련하지 못해 아직도 지체되어 머물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17일 수릉[綏陵, 익종의 능]에 왕께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28일 명릉[明陵,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의 능]에 왕께서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민씨(閔氏)에게 모두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응제과(應製科)를 베풀어 100명을 뽑았고 또 문묘[文廟, 공자사당], 북관묘[北關廟, 관우사당]를 차례로 배알한다는 명이 있었고 또 삼선평(三仙坪)에서 왕께서 직접 군대를 사열한다는 명령이 있었다. 들으니 동학당의 괴수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상주(尙州) 우복동(牛腹洞), 호남(湖南) 두류산(頭流山) 등의 곳에 자주 주둔하여 모인다고 하는데 조용하고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보은(報恩)에서 해산하여 돌아갈 때 선무사(宣撫使)에게 소장을 올려 당시 정사의 득실을 말하며 장차 안으로는 다스리고 밖으로는 물리치려고 한다[內修外攘]고 하였다. 선무사(宣撫使)가 지금 공주(公州) 쌍수(雙樹), 읍내의 쌍수산성에 있으면서 전 금백(前錦伯)의 장범(贓犯)을 조사하고 있는데, 동학당(東學黨)이 글을 걸어 말하길, “장리(贓吏)를 죽이고 뇌물을 추심하여 민간에 되돌려 주지 않으면 장차 다시 모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서양의 영국 ・독일・러시아・미국 다섯 나라가 각기 전권대신(全權大臣)을 파견하여 은밀히 일을 의논하였다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양(東洋)은 자못 그 때문에 걱정이 되고 의심이 된다고 하였다. 나는 오늘도 여곽탕을 복용하고 새댁은 대보탕 한 제를 다 복용하였다
19일 庚子. 흐렸다. 남풍이 종일 그치지 않았다.
밀 5섬 5말[斗]을 수확하였다.[곡사자(穀楂子)를 갈고, 팥과 메밀을 심었다.] 심경성(沈景誠)이 찾아왔다. 세경(世卿), 군선(君先)이 왔다. 일관(日觀)이 고산(高山) 이씨(李氏)집에 갔다. 서울 인편이 있어 집 아이에게 여덟 번째 편지를 보내니 일관이 가지고 갔다.
25일 丙午. 맑고 더웠다.
고노(雇奴) 둘을 세거리(細巨里)로 보내 소금을 사오게 했다. 도은(陶隱), 가운(稼雲)이 영탑사(靈塔寺)에 올랐다. 도은이 갔다. 평기(坪基)의 편지가 면천 읍의 감영 사람 편에 왔는데 안에 선무사(宣撫使) 일재[一齋, 魚允中]의 편지가 있었다. 전 금백[前錦伯, 趙秉式]의 장물(贓物)을 한창 조사하면서 금영(錦營)에 머물고 있는데 전백의 장물이 80여만 냥이라고 한다.
26일 丁未. 맑고 매우 더웠다.
세경(世卿)이 왔다.
오늘 남산 아래 호맥(蒿麥) 밭을 갈았다. 세경(世卿) 부자와 가서 보니 불볕더위에 땀이 비처럼 흘렸다. 저녁에 천구(千駒)가 왔다. 복석(卜石), 학현(學玄)이 따라왔다. 들으니 서울은 모두 편안히 잘 있고 올 때 평택(平澤)에 들러 홍실(洪室)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홍랑(洪郞)이 과거에 급제하여 날을 물려 4일 날 온다고 한다. 그사이 또 응제과(應製科)가 여러 차례 베풀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