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辛巳. 혹독한 더위가 갈수록 더하였다.
차례를 행하였다. 양찬환(梁贊煥)이 어제 묵고 오늘 갔다. 서사휘편[西事彙編, 서양관련책]을 살펴보았다.
3일 癸未. 혹독한 더위가 날로 심하여 밤낮으로 한결같았다. 오늘의 더위는 더욱 감당할 수가 없다.
아침을 먹고 책과 거문고를 가지고 영탑사(靈塔寺) 법당(法堂)에 올라 더위를 식혔다. 높은 누각이 깊고 느릅나무 그림자가 땅에 가득하여 인간세상의 견디기 힘든 더위와는 달랐다. 법당 경계에 배롱나무꽃[紫薇花]이 한창 피어 마치 내린 눈이 가지를 꿰고 있는 듯하였다. 해가 저물어 산을 내려왔다. 밤에도 찌는 듯한 더위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4일 甲申. 혹독한 더위는 어제와 같았다.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박순흥(朴順興), 김삼룡(金三龍)이 왔다.
5일 乙酉. 낮에는 덥지만 밤이 깊어지자 서늘한 기운이 있었다.
도은(陶隱)과 영탑(靈塔)에 올라 더위를 식혔다. 서교(書橋)를 맞이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8일 戊子. 서늘한 기운이 너무 심하였다.
도은(陶隱), 백거(伯渠), 순좌(舜佐)가 갔다. 소리꾼 박기춘(朴基春)이 왔다. 한초정(韓蕉亭), 최성여(崔誠汝), 인운거(印雲擧), 인여춘(印如春), 백춘흥(白春興)이 왔다. 김돌생(金乭生)이 왔다. 최학현(崔學玄)이 해서(海西)에서 돌아오면서 서울을 들러 와서 재동(齋洞)에서 4일에 보낸 편지를 받았다. 8월 8일에 임금께서 친히 문묘(文廟)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과거를 베풀어 그날 과거급제자를 발표할 것인데, 동궁(東宮)이 아헌(亞獻)이라고 한다. 초정(蕉亭), 성여(誠汝)가 유숙하였다.
11일 辛卯. 맑았다.
김돌생(金乭生)이 갔다. 세경(世卿)이 왔다. 박인주(朴仁周), 인진(仁鎭)이 왔다. 어린 계집 종 옥섬(玉蟾)이 달아나 사방으로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14일 甲午. 맑고 더웠다.
어젯밤에 겪은 것은 곽기(霍氣)였다. 종일 먹을 것을 물려 설사는 다행히 다시 나지 않았다. 내일이 바로 원평(元坪) 김석운(金石雲)의 생일이다. 가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고 오늘 또 원평에서 심부름꾼이 와서 재촉을 하였지만 병으로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제 김일관(金日觀)이 와서 묵었다. 내가 소서패독산(消暑敗毒散)과 가미양위탕(加味養胃湯)을 복용했다.
15일 乙未. 맑고 더웠다.
밤은 깊었는데 달이 밝아 자다가 일어났다. 몸은 아직도 피곤하지만 원평(元坪)에 간다는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어 흰죽 한 사발을 먹고 가마를 타고 원평으로 갔다. 일관(日觀)도 갔다. 석운(石雲)의 집에 도착을 하니 주인이 맞이하였다. 조운포(趙芸圃), 황석정(黃石汀), 이도은(李陶隱)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있었고 또 손님들이 매우 많았다. 술잔이 이러 저리 오고갔다. 밤에 달을 대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16일 丙申. 맑고 더웠다. 아침저녁으로 몹시 세찬 바람이 불었다.
주인이 손님을 붙잡았다. 군장동(軍將洞) 앞 내에 은구어[銀口魚, 은어] 그물을 쳤는데 오시(午時)에 사람들과 함께 가보았다. 은어 잡을 철로는 조금 늦어 남은 것은 얼마 없었다. 어부 5~6명이 아래위 두 곳에 그물을 치고 구석구석 찾아 뒤쫓아 잡았다. 혹은 그물로 건져 올리기도 하고 혹은 찔러 잡고 보니 모두 25~6마리여서 무료함을 면할 수 있었다. 냇가에서 밥을 지어 풀자리를 깔고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해가 저물어 원평으로 돌아오니 벌써 초경(初更)이 지났다. 밤에 달빛은 그림 그린 듯했고 해는 이미 멀리 보였다. 여러 사람들은 남은 흥취가 끝나지 않아 함께 쌍룡폭포로 가기로 약속하고는 일행은 모두 삿갓과 장의(長衣)를 벗고 지팡이를 쥐고 갔다. 이슬을 띤 풀을 헤치고 노래를 서로 주고받으며 쌍룡폭포에 도착하여 바위위에 앉아 달을 감상하니 고운 물빛과 달빛이 뜻밖에 맑고 상쾌하였다. 일관(日觀)이 달을 향해 생황을 불고 좌중에 노래할 수 있는 사람 여럿이 서로 화답하니 빼어난 흥취가 빠르게 일었다. 그리하여 밤이 깊어지자 서늘함이 갑자기 휘감기고 바람이 원당곡(元堂谷)에서 불어왔다. 게다가 물기운과 돌기운의 서늘함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석운(石雲)의 집에서 술과 새로 마련한 화로를 가져와 추위를 막았다. 취하여 돌아오면서 모두 율시 한 수(首)씩 지었다.
17일 丁酉. 낮에는 덥고 밤에는 서늘하였다.
낮에 영인[伶人, 재주꾼] 박기춘(朴基春)의 노래를 들었고, 밤에 또 들었다. 나는 연이어 향곽양위탕(香藿養胃湯)을 복용했다.
18일 戊戌. 흐렸다. 오후에 가는 비가 뿌리다가 그쳤다. 가뭄이 심해 팥밭과 채소밭이 다 말랐다.
장운(壯運)이 갑자기 토사곽란(吐瀉亂)이 나서 소금물과 생강즙을 마시고 사관[四關, 네 관절]에 침을 맞고서 저녁이 되자 조금 차도가 있었다. 가마꾼이 도착하여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시중(吳時中)이 와서 묵었다.
23일 癸卯. 어제 아침처럼 비가 왔다. 저녁에 동남풍이 크게 불어 마당 앞에 있는 앵두나무 뿌리가 들렸다. 오늘 바람이 불었는데 원근이 모두 바람으로 피해를 보았다.
백거(伯渠)가 갔다.
24일 甲辰. 어제 저녁에 바람이 심하게 불면서 비가 왔다. 바람의 기세가 매서웠다. 근년에 처음 있는 일로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맑았다.
김은백(金殷百)이 와서 묵었다. 박원택(朴元澤)이 서울에서 돌아와 만났다. 박진일(朴鎭一)이 왔다. 황조여(黃朝汝)가 갔다.
26일 丙午. 맑으면서도 덥고 흐렸다.
새벽에 망실(亡室) 윤씨의 제사를 지냈다. 안도사(安都事), 서교(書橋), 도은(陶隱), 은백(殷百)이 갔다. 이성도(李聖道), 조안교(趙顔敎), 채여성(蔡汝成), 인세경(印世卿)이 왔다. 세경(世卿)가를 통해 편지가 왔는데 18일 재동(齋洞)에서 보내신 편지였다. 전 정언(前正言) 안효제(安孝濟)가 상소(上疏)하여 진령군(鎭靈君)을 주살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소가 거두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섶나무를 베었다.
27일 丁未. 흐리고 해가 나고 더웠다. 종일 남풍이 불고 저녁에 크게 비가 내렸다. 오늘은 백로절(白露節)이다.
안해중(安海重), 진사 임회준(任晦準)이 왔다. 순영[巡營, 감영]이 각 고을에 동학을 금지시키도록 명하였다. 들으니 동당(東黨)이 또 충주(忠州)에 모여 장차 경성(京城)으로 향한다고 하기에 이와 같은 영문의 감결[甘結, 공문]이 있었다고 한다.
29일 己酉. 종일 비가 오면서 멈추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였다.
연일 비바람이 불어 논밭의 곡식이 많이 손상되었다. 비로소 오늘 양주(楊州)의 선산(先山)으로 가려고 했다. 세경(世卿), 은경(殷卿)과 약속하고 동행하였다. 비가 내리는 기세가 이와 같아 부득이 오는 3일로 날짜를 미루었다. 인도숙(印道叔), 택여(澤如), 운거(雲擧), 여춘(汝春)이 왔다. 여러 사람들이 나의 선산(先山) 행차를 송별하였다. 최덕유(崔德裕)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