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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일 庚戌. 흐렸다. 종일 남풍이 불다가 때때로 비가 뿌렸다. 밤에 큰 바람이 불어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차례를 지내면서 햇곡식과 감을 올렸다. 은경(殷卿)이 왔다. 어제 양촌(陽村) 이성도(李聖道)의 집종이 와서 행차하는 때를 묻고 오늘 아침에 갔다. 한초정(韓蕉亭)이 왔다.

2일 辛亥. 흐렸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종일 가는 비가 뿌렸다.

조운성(趙雲成)이 서울에서 돌아와 지난 24일 재동(齋洞)에서 보낸 편지와 평택(平澤) 홍랑(洪郞)의 편지를 받았다. 운성이 내가 선산(先山)에 간다는 말을 듣고 따라 가려고 왔다. 23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는데 서울에서도 그랬다고 한다. 도목정사(都目政事)는 지난 28일에 있었다.

3일 壬子. 비가 내렸다.

복상 중인 김동식(金東植)이 왔다. 김희경(金羲卿), 한경(漢卿)이 왔다. 오늘도 맑지는 않았다. 아직 짐을 꾸리지 못하였다. 세경(世卿), 은경(殷卿)이 왔다. 동행이 이미 모여 드디어 출발했다. 월해(月海) 스님이 처음에는 수행하려고 했지만 절에 사람이 없어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운성(雲成), 장운(壯雲), 복석(福石), 광록(光祿) 등이 같이 간다. 가마꾼 안성현(安成賢), 고국연(高國淵)이 겨우 동네를 빠져나가자 또 비를 만나 진흙탕이 바다와 같아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올 때를 회상해보면 더위를 무릅쓰고 길을 재촉하여 향할 곳을 몰라 곧바로 쓸쓸한 절에서 붙어 산지 지금 벌써 7년이 되니 곧 고향이 되었다. 비록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오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오히려 떠나고 머묾에 그리움이 인다. 오시중(吳時中)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동행하여 큰 개울에 이르렀다. 오늘은 바로 장시가 열리는 날이다. 언덕을 쫓아서 사람들이 길로 이어졌는데 소 수백 필이 자못 맹렬하게 싸우려는 듯한 형상이었다. 양촌(陽村) 이성도(李聖道)의 집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신시(申時)가 지났다.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아래는 진흙이라 나아가지 못해 유숙하였다.

4일 癸丑. 맑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짙은 안개가 들에 가득하고 아직도 비가 올 듯하였다.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자 오주사(吳主事)가 이별하고 떠났다. 사시(巳時)의 끝 무렵 거덕포(巨德浦) 나루를 건너 용산(龍山)을 지났다. 초암사(草岩寺)가 길 가에 있어 들어가 보니 김추사(金秋史) 시랑(侍郞) 집의 분암[墳庵, 묘를 지키는 집]이었다. 산천저기(山泉著記)라는 추사의 편액이 있었다. 예산(禮山)의 석포(石浦)를 건너니 예산, 청양(靑陽), 대흥(大興) 등의 고을마다 조창(漕倉)이 있었다. 용호원(龍虎院)에서 점심을 먹었다. 유시(酉時)에 신창(新昌) 곡교천(曲橋川)을 건너려고 하였는데 오늘은 물이 넘쳐 배를 탔다. 밤에 곡교(曲橋)의 여관에서 잤다.

5일 甲寅. 바람이 차고 흐리고 비가 왔다. 신시(申時)에 비가 그쳤다. 일찍 일어나니 서늘한 비가 오고 또 북풍이 차 겹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출발하여 아산(牙山) 신점(新店)에 도착하여 아침밥을 먹고, 다시 30리를 가서 둔포(屯浦)에 도착하여 잠시 쉬었다. 둔포는 바로 각 고을의 조운선(漕運船)이 출발하는 곳이다. 시장의 가게와 여염집이 거리에 즐비하였다. 광부(狂夫) 정학조(鄭學朝)가 문으로 들어와 시끄럽게 반 식경(食頃)을 떠들고 갔다. 다시 10리를 가서 평택(平澤) 서원촌(書院村)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홍학사[洪學士, 翼漢]의 서원 터이다. 학사의 무덤이 이 마을 산에 있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사손[祀孫, 종손] 홍사필(洪思弼)은 나의 사위이다. 금년 봄 충량 응제과(忠良應製科) 합격자를 발표할 때 관함(舘啣)을 제수하고 악(樂)을 내리고 치제(致祭)케 하였다. 어제 면천(沔川)으로 나를 만나러 길을 나섰는데 우리 행차와 어긋났으니 한탄스럽다. 딸아이와 네 손녀 딸과 한 손자아이를 만났다. 손자아이의 이름은 수범(壽範), 혹은 흑룡(黑龍)이라 부르고 지난해 겨울에 태어났다. 골격과 생김새가 자못 빼어났는데 한창 학질을 앓고 있어 얼굴빛이 황백색이었다. 이 마을은 바로 홍씨(洪氏) 집안이 대대로 전해온 터로, 마을 50여호(戶)가 모두 관역(官役)을 면제 받아 〈마을사람〉 부리기를 마치 행랑붙이처럼 하였다. 그러나 물과 땅이 좋지 않은 것이 흠이라고 할 것이다. 홍랑(洪郞)의 종숙(從叔) 기서(岐瑞)와 그의 재종숙(再從叔)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6일 乙卯. 맑았다.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 군문진(軍門津)에 도착하였다. 칠원(七原)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는데 경성(京城)과 귀천(歸川)으로 가는 길이 여기에서 갈린다. 운성(雲成)이 먼저 경성으로 향하였고 재동(齋洞)으로 편지를 부쳤다. 여기서부터 산기슭의 오솔길을 따라 예제(禮齊), 울산(鬱山), 두이보촌(豆伊寶村), 빈양(濱陽)을 지나 천곡(泉谷)에서 유숙하였는데 이곳은 바로 용인(龍仁) 땅이다. 산간의 토지는 비옥하고 벼와 기장이 무성하며 민가가 서로 이어져 있고 여관의 모습도 쓸쓸하지 않았다.

7일 丙辰. 맑았다.

천곡(泉谷)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김량(金良)까지 10리를 다다르니 해가 산꼭대기에 떠올랐다. 두계(杜溪)까지 10리, 돌자개(乭者介)까지 10리를 다다랐다. 여기서 독고개(獨古介)를 넘어 광주(廣州) 늑현(勒峴)까지 20리를 다다라 묘지기 신삼천(申三千)의 집에서 자고 중부(仲父)・중모(仲母)님의 산소를 돌보았다. 산소를 돌보지 않은지 벌써 10년 쯤 되었다. 우러러 소나무 삼나무에 기대니 슬픈 감정을 이길 길 없었다. 점심을 먹고 분원[分院, 자기만드는 광주분원]까지 30리에 이르러 상서[尙書, 판서] 박온재(朴溫齋)를 방문하고 소식이 막혔던 끝이라 손을 잡고 회포를 풀었다. 찬술한 환재[瓛齋, 朴珪壽]선생의 가장(家狀)을 보여주셨는데, 해가 저물어 다 읽어볼 수가 없어 빌려가지고 왔다. 초경(初更)에 귀천(歸川) 천운루(天雲樓)에 이르니 온 집안이 조용하였다. 유장(裕章)이 오늘 아침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을 하고 구수(龜壽)는 계동촌(溪東村)으로 갔다. 지탄(芝灘)도 윗마을로 가서 안팎으로 물어볼 사람이 없었고 어떤 한 소년이 홀로 방에 깊이 잠이 들어 있었는데 그에게 물어보니 바로 유형(裕衡)이었다. 오늘 마침 춘천(春川)에서 왔다고 한다. 드디어 마을 사람들을 불러 각 집에 두루 알리자 마을 사람들이 차례대로 와서 만나니 자못 낯이 익은 사람이 많았고 연로한 사람들은 벌써 죽고 없었다. 예전의 어린아이들이 모두 의젓하게 성장을 하여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구수(龜壽) 모자가 왔는데 구수도 꽤나 장대하여 기뻤다. 주경(周卿)과 유경삼(柳景三), 한성인(韓聖人), 한경복(韓景福)이 와서 만났다. 산정 노인(山亭老人)을 방문하니 노쇠하기 짝이 없었다. 조(趙)・홍(洪) 두 누이와 조씨(趙氏) 누이의 아들딸 넷이 앞에 나열하여 서니 모습이 모두 단정하고 묘하여 노인이 이로써 소일하였다. 넷째 종형수에게 절을 하였다. 유장(裕章)의 아내가 병으로 서울로 올라가 치료를 하는데 증상이 매우 가볍지 않다고 하니 걱정이다. 각 집마다 모두 묵은 근심이 있어 보고 있자니 매우 걱정스럽고 답답하였다. 좌랑(佐郞)・진사(進士)는 모두 서울에 있어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 더욱 느낌이 쓸쓸하였다. 지난날의 광경을 회상하니 나도 모르게 한탄이 나왔다. 밤에 천운루(天雲樓)로 돌아와 묵었다. 두 나그네가 길을 잃어 우천시장(牛川場市)에서 묵었다.

8일 丁巳. 맑았다. 밤에 흐리고 가는 비가 때때로 뿌렸다.

아침을 먹고 큰댁의 사당(祠堂)과 종조(從祖)의 사당에 절을 하였다. 세경(世卿), 은경(殷卿)이 계동촌(溪東村) 좌랑(佐郞)의 집에 갔다. 다섯째 형수가 매우 노쇠하셨고 구수(龜壽)의 두 누이는 모두 예뻤다. 좌랑(佐郞)은 막 호조좌랑(戶曹佐郞) 임무를 띠고 서울에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족인(族人) 공간(公幹)을 찾아뵈었는데 늙고 병들어 병상에서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나이가 올해 73세로 마을의 연로하고 덕이 높은 분으로서는 오직 공간만이 남아 계신데, 세상에 오래 계시지 않을 것 같은 걱정에 매우 슬펐다. 여러 족인(族人)들에게 들렀다가 공간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올 때 가는 비에 옷이 젖었다. 오늘 서울로 심부름꾼을 보내면서 재동(齋洞)으로 편지를 보냈다. 마을의 아랫사람들이 모두 와서 만났다. 예전에는 어린아이였었는데 모두 노성하여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연로한 사람은 모두 돌아가셨으니 개탄스럽다. 근래 우천장시(牛川場市)에 미곡(米穀)이 드물어 곡식 값이 치솟고, 햇곡식이 비록 익기는 했지만 아직 수확하지 않은 상태라 문중의 여러 집들은 모두 양식 걱정을 하는데 온 동네가 모두 그러하여 빌릴 곳도 없어 왕왕 밥을 굶는다고 하니 걱정스럽다.

9일 戊午. 종일 비가 내렸다.

이날 비에 가로막혀 예전에 유람하던 곳을 두루 돌아볼 수가 없었다. 다섯째 형수가 평구(平邱)댁과 화순(和順) 발발[勃勃, 오식인 듯]을 데리고 와서 한 집에 모여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니 여러 해 동안 쌓였던 회포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아침저녁을 산정(山亭)에서 먹고 오늘 저녁은 판서(判書)댁에서 먹었다.

10일 己未. 맑고 바람이 불었다.

일찍 일어나 사곡(寺谷) 도사(都事) 재종(再從)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종조묘(從祖廟)에 작별하고 지나는 길에 첨지 한봉혁(韓鳳爀)에게 곡하고 산정노인(山亭老人)과 다섯 번째 형수・조실(趙室)・판서(判書)댁 형수와 작별을 하였다. 천운루(天雲樓)로 돌아와 사당에 작별을 하고 두 조카며느리와 이별을 하니 귀천(歸川)의 여러 족인(族人)들이 모두 와서 이별을 하고 동네 사람들과도 모두 이별을 한 뒤 곧바로 출발하여 동네를 나섰다. 고향을 되돌아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슬픈 마음을 이길 길 없었다. 우천(牛川)을 나와 섶나무 배를 타고 백아곡(白鴉谷)으로 내려오다 서풍을 만나 배에서 내려 북쪽 언덕을 지나 가다가 덕호(德湖)에 이르러 경춘령(景春令)을 방문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그의 아들 유상(裕尙)・유광(裕光)・유안(裕安)을 만났다. 신시(申時)에 월곡(月谷) 참군(參軍) 치대(致大)의 집에 도착하여 청주공(淸州公)의 사당에 절을 하고 강서(江西)댁 재종숙모의 영전에 곡을 하고 경회(景會)를 위문하였다. 구역안의 여러 산소와 처(妻), 첩(妾), 며느리의 산소에 성묘하니 묵은 감정과 새로운 슬픔에 정리(情理)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연래 나무를 베어가는 것이 적어 어린 소나무가 울창하게 형태를 이룬 것이다. 밤에 세경(世卿)・은경(殷卿)과 묘지기 원성(元成)의 집에서 잤다. 원성은 바로 완성(完成)의 아우이다. 새로 집을 지어 자못 정결하여 살만하였다. 재철(再哲), 도철(道哲)의 아내는 모두 백발 늙은이가 되었는데 동네 늙은 이 중 두 사람은 벌써 죽었다고 한다.

11일 庚申. 맑았다.

일찍 일어나 산에 올라 아버지의 묘에 작별을 하였다. 초목이 마치 비를 맞은 듯 이슬이 맺혀 지역 안을 두루 돌아볼 수가 없어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원성(元成)의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두 사람과 함께 길을 나서 평구(平邱)로 향하였다. 경회(景會)와 치대(穉大) 종형제도 수행하여 평구에 이르렀다가 만나지 못했다. 자형(子亨)도 진릉직(鎭陵直)이라서 묘동(廟洞)댁을 방문하니 삼종질(三從姪) 진사(進士) 용식(龍植)의 어릴 적 이름이 상쾌(爽快)인 족질 원주댁(原州宅)은 만나지 못하고 치화령(致和令)을 방문했지만 역시 아들이 있었다. 지역 안의 여러 분의 산소에 성묘를 하고 두 나그네와 가마꾼 등은 묘노(墓奴) 학린(學麟)의 집에서 밥을 먹고 나는 원주댁에서 밥을 먹었다. 잠시 후 자형이 숭릉(崇陵)에서 왔다. 자형의 집에 가서 서흥공(瑞興公)의 사당에 절을 하였는데 자형의 아우도 있었다. 정읍(井邑)댁의 사손(祀孫)과 회인(懷仁) 진사의 양자와 서로 대면하였고 검서(檢書) 유선(有善)이 귀천(歸川)에서 와서 만나 노자를 주고 갔다. 이후 출발하여 휘경원(徽慶園)에 이르기 전에 조운성(趙雲成), 김수남(金壽南)이 중도에 와서 맞이하였는데 순악(舜岳)도 왔다. 휘경원에 이르자 종질(從侄) 영흥(永興)・호랑[戶郞, 호조좌랑]도 모두 길가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려 만나니 헤아릴 수 없이 기뻤다. 동문 밖 산정(山亭)의 집에 도착하여 조금 쉬고 둘러 싼 성 밖으로 이태원[利泰院, 利는 梨의 오식] 부어현(富於峴)을 경유하니 비교할 수 없이 험하였다. 달빛을 타고 20리를 가서 남문 밖 창녕(昌寧) 구종렬(具鍾烈)의 집에 도착을 하였는데 겸인[傔人, 심부름꾼] 권광의(權光義)의 집이 근처에 있었다. 아침저녁은 권겸(權傔)이 마련하여 대접하였고 경유(景有)의 여러 손님들 중에 천만(千萬), 운성(雲成) 등이 있었다. 탑동실(塔洞室)도 와서 만났다. 밤에 듣는 종소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 소리를 듣지 못한지 어느덧 7년이나 되었다. 또 종소리가 마치 근처에서 들려오는 듯하여 물어보니 종현[鐘峴, 명동성당], 정동[貞洞, 성공회] 등의 여러 곳 교당(敎堂)에서 치는 것이라고 했다. 승지 송종억(宋鍾億)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만났는데 이 사람은 회덕(懷德)댁의 형으로 손을 잡고 회포를 풀며 지난 감정에 젖어 슬픔이 절실하였다.

12일 辛酉. 맑았다.

재동[齋洞, 金晩植] 형님이 도착하였다. 우리형제는 같은 이불을 덮고 자랐으며, 세상에 태어난 후로 매년, 매달 서로 가로막힌 적이 없었는데, 지금 7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 만나게 되었다. 얼굴과 살쩍이 쇠약하고 침식이 모두 좋지 않다고 하니 슬프고 놀라워 한참 후에나 안정이 되었다. 종질(從侄) 승지(承旨) 유성(裕成), 좌랑(佐郞) 유정(裕定), 진사(進士) 유장(裕章), 유평(裕平)이 모두 와서 모였다. 황량한 바닷가에 버려진 저 같은 사람이 은혜를 입어 죽지 않고 다시 골육(骨肉)들이 서로 모이게 되었으니 남은 생에 이런 즐거운 일이 있을 줄 생각지도 못하였다. 궁지에 몰린 자취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평소 집안사람들에게 경계를 하여 겉으로 드러내지 말라고 하였는데 성중(城中)에 퍼져 자연스레 친구들이 많이 알게 되었다. 참판(參判) 박제순(朴齊純), 판서(判書) 남정철(南廷哲), 참판(參判) 심기택(沈琦澤), 교리(校理) 윤긍주(尹兢周), 승지(承旨) 윤달영(尹達榮), 승지(承旨) 이중하(李重夏), 승지(承旨) 정만조(鄭萬朝), 판서(判書) 김병익(金炳翊), 승지(承旨) 서상기(徐相耆), 참판(參判) 김영목(金永穆), 교리(校理) 이설(李偰), 참판(參判) 김명규(金明圭), 참판(參判) 조병직(趙秉稷), 참판(參判) 황기연(黃耆淵), 판윤(判尹) 변원규(卞元奎), 창원(昌原) 조희연(趙羲淵), 유변 기완(柳弁基完), 도사(都事) 유제관(柳濟寬), 선전(宣傳) 서형돈(徐亨墩), 진해(鎭海) 구연규(具然奎), 사종제(四從弟) 주사(主事) 종식(宗植), 족인(族人) 적성(積城) 기형(基衡), 주사(主事) 기조(基肇), 주사(主事) 개승(蓋昇), 내종제(內從弟) 학관(學官) 서칠순(徐七淳), 주사(主事) 서상석(徐相奭), 봉사(奉事) 유진만(兪鎭萬), 감역(監役) 이건헌(李健憲), 도사(都事) 안정원(安鼎遠), 진사(進士) 이최진(李最鎭), 주사(主事) 한철중(韓喆重), 순흥(順興) 이관식(李寬植), 주사(主事) 이응익(李應翼), 학관(學官) 양주겸(梁柱謙), 주사(主事) 박준우(朴準禹), 사사(司事) 박준설(朴準卨), 주사(主事) 박명화(朴命和), 안생 종화(安生鍾和), 위원(委員) 안준(安浚), 서실(徐室)의 아들 석증(錫曾), 희손(喜孫), 이생(李甥) 응규(膺珪), 종매(從妹)의 사위 조동욱(趙東旭), 해주(海州) 종인(宗人) 익□(益□), 주서(注書) 나두영(羅斗永), 진사(進士) 육종윤(陸鍾崙), 진사(進士) 김택영(金澤榮), 이생 학원(李生學遠), 황생 동연(黃生東淵), 겸인(傔人) 이진욱(李鎭郁), 이정식(李正植), 안상진(安尙鎭), 임봉환(林鳳煥), 권광의(權光義), 김영규(金永奎), 유천만(柳千萬), 조운성(趙雲成), 김수남(金壽南), 서리(書吏) 이붕주(李鵬周) 등, 아랫사람 강만복(姜萬福) 등, 외아문(外衙門) 사령(使令) 등이 와서 보았다. 안동(安洞) 늙은 비(婢) 완임(完任)이 범이(凡伊)의 어미와 함께 와서 인사하였다. 장령 현근(張令玹根)이 와서 만났다.

13일 壬戌. 맑았다.

애초에 오늘 길을 나서려고 하였는데 취당[翠堂, 金晩植]형님께서 하루 묵으라고 만류하여 정리상 섭섭하여 길 떠날 기약을 내일로 물려 정하였다. 매동(梅洞) 승지(承旨)댁에서 아침밥을 마련해왔는데 낙동(駱洞)의 서실(徐室)도 왔다. 판서 서상우(徐相雨), 판서 박정양(朴定陽), 승지 성기운(成岐運)이 글로 문안을 하였고, 참판 심경규(沈景奎)가 오늘 또 술을 가지고 왔다. 승지 송치삼(宋致三)이 날마다 왔다. 밤에 형님을 모시고 침상을 마주하고 잤다.

14일 癸亥. 흐렸다. 오후부터 남풍이 불며 가는 비가 저녁때까지 뿌렸다. 추분절(秋分節)이다.

오늘 떠나려는데 김은경(金殷卿)은 관추위[觀秋圍, 圍는 園의 오식]에 머물고 있고 인세경(印世卿)은 내가 외로울까봐 동행하였다. 어린 시중꾼 장운(壯雲)은 부르튼 발이 종기가 되어 은경이 탈 것을 주었다. 이에 사시(巳時)가 되어 출발을 하였다. 형제・숙질들과 이별하는 섭섭함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동작진(銅雀津)을 건널 때 시중꾼과 하인들은 작별하고 갔다. 과천(果川)을 지나니 가는 비가 뿌리고 바람이 불어 옷을 적셨다. 지지대(遲遲臺)에서 내려오는데 미끄러워 발을 댈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어 하늘이 깜깜하고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아래는 땅이 질어 일행들이 여러 번 넘어졌다. 초경(初更)에 수원(水原) 북문 밖 객점에 도착하였는데 내일이 추석이다. 객점의 주인이 한창 떡을 굽고 제구(祭具)를 베풀었다. 근래 경향(京鄕)의 곡식 값이 까닭 없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햇곡식은 아직 수확하기 전이라 도처에서 허둥댔다. 중도의 밥값도 배나 뛰었다. 농사의 상황은 경기가 호남보다 낫다고 한다. 지난달 23일 밤에 비가 왔는데 팔도에서 같이 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양서[兩西, 황해도 평안도], 북도(北道), 영남(嶺南), 호남(湖南), 강원도(江原道)에 모두 바람의 피해가 있어 장차 흉년을 면하지 못할 것 같다. 오직 기호(畿湖) 지방은 조금 낫지만 밭곡식은 흉년을 면하지 못할 듯하고 채소와 과일도 흉년인 듯하다. 믿는 것은 오직 논곡식뿐인데 비가 자주 와서 열매 맺은 것이 왕왕 싹이 터서 앞으로 수확할 때 손상을 많이 입을 것 같아 매우 걱정이 된다.

15일 甲子. 맑았다.

새벽에 출발하여 대황교(大皇橋)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고 대진(大津) 길로 향하여 용수점(龍須店)이 이르러 면천(沔川) 과유[科儒, 과거보러 가는 선비] 한초정(韓蕉亭), 인운거(印雲擧), 여춘(汝春)을 만났다. 집 아이의 편지를 보니 바로 재동(齋洞), 안동(安洞)에서 부친 편지였다. 사창점(社倉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니 벌써 해가 기울고 있어 밀물 시각을 놓칠까 걱정이 되어 달빛을 타고 급히 갔다. 2경(更)에 진두점(津頭店)에 머물러 잤다.

16일 乙丑. 종일 남풍이 불었다. 미시(未時)부터 비가 내리더니 신시(申時)에는 큰 비가 내려 밤중까지 퍼붓듯 내렸다.

인시(寅時) 초에 일어나 밥을 먹었지만 아직도 일렀다. 날씨는 맑아 배를 탔는데 남풍이 방해하듯 불어와 중간에 머물렀는데 해는 벌써 오시(午時)를 향하였다. 배에 탄 어느 사람이 뱃사람을 재촉하여 일제히 노를 저어 나루를 건너 홍주(洪州) 내도(內島)에 도착하였다. 뭍에 내려, 한기(閒基)의 도사(都事) 안기원(安基遠)을 방문했다. 그의 맏아들 참봉(參奉) 종선(鍾善), 조카 종상(鍾商), 그의 두 손자 만수(萬壽)・영수(永壽)는 모두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이었다. 안도사의 호는 방산(方山)으로 시골에서 누리는 좋은 복은 삼공(三公)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었다. 이후 비를 무릅쓰고 매전(梅田) 이정랑(李正郞)의 집에 도착하였는데 경전(景典)은 서울에 있고 경률(景律)은 금영(錦營)에 가고 없었고 경서(景西) 형제와 훈재(勳宰), 종매(從妹)를 만났는데, 일전에 서울에서 돌아올 때 그의 두 딸 남실(南室), 양실(梁室)이 모두 그와 함께 돌아왔다. 이날 밤은 머물러 묵었는데 밤새 빗소리가 들렸다. 이날 장내(場內) 도사(都事) 한복리(韓福履)와 그의 맏아들 교리(校理) 흥교(興敎)를 방문하였다. 인세경(印世卿)은 여기서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17일 丙寅. 빗방울이 떨어졌다.

매전(梅田)을 떠나 죽동(竹洞) 미정(眉亭)의 집에 도착을 하니 원회(元會)도 있었다. 점심을 먹고 비를 무릅쓰고 집으로 돌아와 김여수(金汝壽)를 불러 작은 사랑청 일을 하게 했다. 채소밭을 둘러보니 모두 비에 문드러져 탄식이 나왔다.

22일 辛未. 흐렸다.

새벽에 조고(祖考)의 제사를 지냈다. 평기(坪基) 이생(李甥)의 편지가 감영의 우편(郵便)으로 왔는데, 이달 11일 보낸 것으로 풍동(豊洞)・평기(坪基)・장전(長田)의 각 곳은 모두 잘 있다고 한다.

23일 壬申. 흐렸다.

현경교(玄景郊)가 왔다. 영탑사(靈塔寺)에 올라 승려를 찾아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25일 甲戌. 청량하였다. 밤에 가는 서리가 내렸다.

도숙(道叔), 복상 중인 김동식(金東植), 이군선(李君先), 황종필(黃鍾弼)이 왔다. 군서, 도숙, 월해와 함께 앞뜰 화정(花井)의 벼를 보러갔는데 다른 곳에 비해 피해가 심하지 않았다. 다른 곳은 처음 생각과는 크게 달라서 벼 줄기에 병이 많이 생겨 아직 열매가 단단히 여물지 않았지만 베기 시작했다고 한다.

29일 戊寅. 맑고 따뜻했다. 한로절(寒露節)이다.

새벽에 고조모(高祖母) 이씨(李氏)의 제사를 지냈다. 양생 찬환(梁生贊煥), 인생 운거(印生雲擧)가 서울에서 돌아와 26일에 재동(齋洞)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구수(龜壽)가 감시(監試) 초시(初試) 방[榜, 합격자]에 들었다고 하니, 기특하고 기뻤다. 진사(進士)의 다리가 부은 곳이 덜해지지 않고 심해져 매우 걱정이다. 일소(一所) 시관(試官)은 이헌영, 이소(二所) 시관(試官)은 조희일(趙熙一)이고, 구수는 이소방(二所榜)에 참여하였다. 세경(世卿),은경(殷卿)과 면천(沔川)의 선비들이 모두 산외로 돌아가 섭섭하였다. 세경이 왔다.

30일 己卯. 흐렸다.

저물녘에 비가 밤까지 내렸다. 읍리(邑吏) 유규항(兪圭恒)이 다음날 서울로 간다고 하기에 집 아이에게 첫 번째 편지를 부쳤다. 김생 기홍(金生箕洪)이 와서 묵었다. 진사 윤이열(尹悅)이 와서 묵었다. 인운거(印雲擧)가 왔다.

주석
도목정사(都目政事) 관원의 치적을 종합 심사해 그 결과에 따라 영전 좌천 또는 파면을 시키는 일을 말한다.
김추사(金秋史) 시랑(侍郞) 집의 분암[墳庵, 묘를 지키는 집] 추사는 명필인 김정희의 호. 김정희는 예산 신암면 용궁리에 태어나서 이곳에 고택이 있고 묘소도 있다.
관역(官役)을 면제 받아 훈신 충신의 자손일 경우, 국가와 관아에서 부여하는 부역을 면제받는 특권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토호로 군림해 평민을 사역시키기도 했다. 농민군들은 이들 토호의 징벌에 나섰다.
박온재(朴溫齋) 온재는 박선수(朴瑄壽)의 호. 박선수는 셔먼호사건을 지휘한 평안도 관찰사인 박규수(朴珪壽)의 동생으로 초기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다. 김윤식은 안국동 박규수의 사랑채를 드나들면서 박규수에게서 개화사상을 익혔고 박선수와는 친구로 지냈다.
휘경원(徽慶園) 조선 23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무덤. 박씨가 후궁이어서 능이라 하지 않고 원(園)이라 했다. 양주에 있다.
일소(一所) 시관(試官)은 이헌영, 이소(二所) 일소(一所)와 이소(二所)는 과거 보는 장소를 두 곳으로 나누어 보이는 제도로, 단순하게 숫자만을 나누어 합격자를 냈지 차이를 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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