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일 己酉. 종일 큰바람이 불어 춥고 흐리다가 때때로 비가 왔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2일 庚戌. 맑고 흐리다가 바람이 불고 추웠다.

석운(石雲), 도은(陶隱), 양찬환(梁贊煥), 인운거(印雲擧), 윤부걸(尹富傑)이 와서 묵었다. 집 아이[金裕曾]가 서울에서 돌아왔다. 탑실(塔室)도 왔다. 무장(茂長)의 김헌조(金憲祚) 숙질(叔侄)이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3일 辛亥.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왔다. 큰 천둥과 번개・큰 안개와 우박이 내렸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승지 박제경(朴齊璟), 본관(本官) 이시일(李是鎰), 인세경(印世卿), 택여(澤如), 김은경(金殷卿),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박순흥(朴順興), 김삼룡(金三龍)이 와서 묵었다. 가마꾼이 돌아가는 편에 재동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나는 치통을 앓아 밤에 형방독패산(荊防毒敗散)을 복용하였다.

6일 甲寅. 맑고 추웠다.

김일관(金日觀)이 갔다. 성여(誠汝), 여수(汝壽), 유규항(兪圭恒)이 왔다. 백거(伯渠)가 와서 묵었다. 하인 둘을 매전(梅田)에 보내어 소금 2섬을 사 오게 하였다. 의두암(依斗岩)에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았더니 벼는 이미 모두 베었고 먼 산에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아 눈길 닿는 곳이 스산하여 술 한 잔을 마시고 돌아왔다. 밤에 김윤경(金倫卿)이 급작스런 곽란으로 크게 앓았기에 가서 병세를 살펴보았다. 밤이 깊어지자 은경(殷卿)도 왔다.

7일 乙卯. 맑고 추었다. 무[蘿葍]를 캤다. 작년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밤에 흐리고 보슬비가 왔다.

백거(伯渠)가 갔다. 윤경(倫卿)의 병세를 가서 살폈다. 어제에 비해 조금은 나았다. 희경(羲卿), 한경(漢卿)이 왔다. 이후창(李厚昌)의 종손(從孫) 고산(高山) 이생(李生)이 왔다. 박기순(朴岐淳)이 왔다. 광주(廣州) 이방(吏房) 김효근(金孝根)이 사람을 보내 왔다.

10일 戊午. 맑고 따스하였다. 최근 가장 좋은 날씨이다.

일관(日觀)의 아들 종산(宗山)이 와서 서울로 올라간다 하여 서울 집에 머무는 손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박원택(朴元澤)이 편지를 보내, 내일 서울로 가는 인편이 있다고 하여 재동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세경(世卿), 도숙(道叔), 조안교(趙顔敎)가 왔다. 원평(元坪) 김중평(金仲平), 동자(童子) 금린(金麟)이 왔는데, 독서하면서 영탑(靈塔)에서 겨울을 보낼 계획이었다. 밤에 달빛을 받으며 영탑(靈塔)에 올라 잠깐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다.[이 때부터 중평(仲平),금린(金麟)이 날마다 또는 격일로 강소(講所)에 와서 독서하였다.]

11일 己未. 흐리고 비가 왔다.

김일관(金日觀)이 갔다. 유규항(兪圭恒)이 왔다. 현경교(玄景郊)가 왔다. 광록(光祿)이 평택(平澤)에서 돌아와, 홍랑 내외가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12일 庚申. 맑았다.

학현(學玄)을 서울로 보내어, 재동으로 올리는 편지와 경유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한기(閒基) 안사충(安士衝)이 윤가(尹哥)의 말을 전했는데, 서울에서 보낸 세간살이를 실은 배가 서원리(書院里) 포구에 정박하였다고 한다. 고노(雇奴) 등을 보내 강당촌(講堂村)에서 무[蘿葍]를 사 오게 하였다. 오후에 영탑사(靈塔寺)에 올랐다. 조안교(趙顔敎)가 왔다. 박원택(朴元澤)이 왔다. 선편(船便)에 안동(安洞)에 머무는 손님의 편지 및 경유의 편지를 받아보았는데, 초 5일에 쓴 것이었다.

14일 壬戌. 맑다가 밤에 흐렸다.

마을 장정들이 배로 보낸 세간살이를 운반하여 왔다. 김종산(金宗山)이 왔다. 지난번에 편지를 받아갔는데, 아직 출발하지 않아 서울로 보내는 편지를 다시 써서 주었다. 만지(蔓支) 동민 13명・원앙(鴛鴦) 동민 10명을 고용하여 서원리(書院里) 선박소(船舶所)로 보내, 밤새 세간살이를 운반해 오게 하였는데, 아직 다 져오지 못했다. 어제 원택(元澤)의 말에 서울로 가는 인편이 있다 하여 재동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김생 기홍(金生基洪)・이생 집봉(李生集鳳)이 왔다. 신촌(新村) 백성인 한영필(韓永弼)이 왔다. 동민들이 영탑(靈塔)에 사둔 재목을 운반하여 내려왔다. 김생 기홍(金生基洪)이 내일 서울로 올라간다 하여, 재동으로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19일 丁卯. 맑고 따스하였다.

학현(學玄)이 서울에서 돌아와 재동에서 내려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진사댁(進士宅)의 우환이 잦아들지 않아 안타까웠다. 안동 집에 머무는 손님이 보낸 편지와 경유가 보낸 편지를 보았다. “초 4일에 경운궁(慶運宮)에서의 진하진찬(陳賀進饌)과 춘방(春坊)에 자급(資級)을 내리는 일은 규례대로 하였다. 18일에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응제(應製)로 100인을 뽑았는데, 대과(大科) 3인・진사(進士) 5인이었다. 도로의 적환(賊患)이 자못 안정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금린(金麟)이 오늘부터 와서 묵었다.

20일 戊辰. 오전은 맑았고 오후는 흐렸다. 저녁에 조금 비가 뿌리다가 밤이 깊어지자 달이 밝았다.

월해(月海) 스님의 도제(徒弟) 응법(應法)이 옴을 옮아서, 월해도 전염되었다. 중평(仲平), 금린(金麟)은 피하여 이곳으로 왔다. 중평(仲平)은 원평(元坪)으로 돌아가고, 금린(金麟)은 머물러 자며 소학(小學) 수업을 받았다. 인운거(印雲擧), 김여수(金汝壽)가 왔다. 어제 장운(壯雲)이 귀가했는데, 그의 집이 죽동(竹洞)으로 이사하였다.

22일 庚午. 아침에 비가 오다가 저녁에 맑았다.

당진(唐津) 양생 필환(梁生弼煥)이 왔다. 탑실(塔室)의 양녀(養女)가 고산(高山)에서 왔다. 김용(金龍)도 고산에서 와서 머물렀다.

23일 辛未. 흐리다가 가랑비가 왔다.

승지 이남규(李南珪), 이생 만제(李生萬濟), 감찰 이노흥(李魯興)이 왔다. 장운(壯雲)이 돌아갔다. 박용하(朴龍夏), 조순봉(趙順鳳)이 왔다. 당진(唐津) 안생 붕원(安生鵬遠), 현순소(玄舜韶)가 왔다.

24일 壬申. 아침에 비가 조금 뿌렸다.

김종산(金宗山), 신윤필[申允弼, 조평택(趙平澤) 집의 사람]이 왔다. 세경(世卿)이 와서 내일 인탁(印卓)이 서울로 간다 하여 재동으로 올리는 편지와 안동 손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탑실(塔室)의 양녀(養女)가 갔다.

30일 戊寅. 맑았다. 대설절(大雪節).

안팎의 집에 개초(蓋草)를 하였다. 시묘동(侍墓洞 ) 조생 종호(趙生鍾灝)가 왔다. 김필주(金必周)가 와서 묵었다. 집 아이가 율리(栗里)에 가서 묵었다. 조생(趙生)이 와서 자기 선조의 『야곡집(冶谷集)』을 주었다.

주석
춘방(春坊) 세자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別稱)이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