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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일 己卯. 맑았다.

내가 영탑(靈塔)에서 화정(花井)으로 이사한 지 4년이 지났다. 집 아이 및 며느리, 덕・탑 양실(德・塔兩室), 인원회(印元會), 겸동(傔童) 김장운(金壯雲)・김도성(金道成), 고노(雇奴) 송광록(宋光彔)・윤대성(尹大成), 계집종 갑년(甲年), 계집종의 지아비 복석(卜石), 어린 계집종 안업(安業)・복섬(福蟾)・남순(男順) 등과 함께 같이 설을 쇠었다.[서울 집은 여전히 안동(安洞)에 있다.]

현경교(玄景郊) 형제, 인택여(印澤如), 영수(永壽), 운거(雲擧), 원유(元有), 이생 도성(李生道性), 석주(錫周), 현순소(玄舜韶), 황생 관수(黃生瓘秀), 연수(璉秀), 구준(龜俊), 윤생 병석(尹生炳奭), 인여춘(印如春), 만지동민(蔓支洞民), 본촌에 사는 박홍래(朴來洪)가 왔다. 김윤경(金倫卿) 부자(父子)는 이웃에 사는 사람이고 월해(月海) 및 소암리(小闇梨)인 성옥(性玉)은 이웃에 있는 스님이어서 일상적으로 왕래한다. 순좌(舜佐)가 갔다.

2일 庚辰. 흐렸고 새벽에는 눈이 오다가 저녁에는 맑았다.

현경전(玄景田), 인세경(印世卿), 강기(康基), 조동(趙童) 형제, 홍동(洪童), 채동(蔡童), 이계하(李啓夏), 한순봉(韓順鳳), 태안(泰安) 김진권(金瑨權), 박종헌(朴琮憲)・종렬(琮烈), 유규항(兪圭恒) 종형제, 이방(吏房), 호장(戶長) 및 읍리(邑吏) 3~4명, 노인 박준빈(朴駿彬), 본촌 강생(姜生) 형제, 김삼룡(金三龍)이 왔다.

3일 辛巳. 낭청(郞廳) 이재학(李在學), 최성여(崔誠汝), 김경렬(金景烈) 종형제, 이군선(李君先), 조생 춘식(趙生春植), 조안교(趙顔敎) 부자, 김유현(金有鉉) 및 그 아우 여수(汝壽)의 아들과 조카, 박진일(朴鎭一) 형제와 부자, 박인주(朴仁周) 부자, 박금천(朴金千) 형제, 박윤도(朴允道), 박순흥(朴順興) 및 그 생질인 7세 아이, 오제복[吳諸福, 곧 덕실(德室)의 아들이다], 박용하(朴用夏), 유대열(兪大悅), 유치백(兪致百), 박동혁(朴東爀), 유규항(兪圭恒)의 아우 최성원(崔星元) 및 그 조카 병세(炳世), 장평민(丈坪民) 3~4명, 황성준(黃聖準), 조생 희주(趙生 羲疇), 최영습(崔永習), 윤부걸(尹富傑), 김수용(金壽容), 박희형(朴羲亨)이 왔다. 안우경(安雨卿)이 와서 모레 서울로 가는 인편이 있다고 하여 재동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4일 壬午. 맑았다.

이생 집봉(李生集鳳), 종인(宗人) 익경(益慶), 당진(唐津) 호생(扈生), 양생 규환(梁生奎煥), 김은경(金殷卿)・희경(羲卿)・한경(漢卿)이 왔다. 도은(陶隱)과 그의 아들 용헌(容憲), 영구(靈龜), 종손(從孫) 정이(正伊), 중평(仲平), 금린(金麟)이 와서 묵었다. 은경(殷卿)도 머물며 잤다.

5일 癸未. 흐리다가 밤에 조금 눈이 왔다.

안생 종봉(安生鍾鳳)과 그 종질 만수(晩洙), 도사(都事) 어윤호(魚允浩), 오내홍(吳來洪), 조생 춘식(趙生春植)이 왔다. 도은(陶隱)의 아들, 조카, 손자가 갔다. 유원평(兪元坪)이 서울로 가는 인편이 있다고 하여 안동 손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6일 甲申. 흐리고 저녁에 맑았다.

읍내 박승지(朴承旨), 채여성(蔡汝誠), 김성실(金聖實), 이치문(李致文), 황생 태연(黃生泰淵)이 왔다. 도은(陶隱)이 갔다. 집 아이가 중평(仲平), 금린(金麟), 김윤경(金倫卿), 조생 춘식(趙生春植)과 함께 원평(元坪)에 갔다. 김돌석(金乭石)이 와서 묵었다.

7일 乙酉. 맑았다.

이중립(李仲立), 이생 교설(李生敎卨), 현경전(玄景田)・경교(景郊), 최덕호(崔德浩), 이생 민오(李生敏五)・민욱(敏郁), 감찰 윤영필(尹永弼)이 왔다. 김돌석(金乭石)이 갔다. 원회(元會)가 뒤따라서 원평(元坪)에 갔다.

8일 丙戌. 맑았다.

박치영(朴致永), 유인목(柳寅穆)・인정(寅正), 안해중(安海重), 임평택(任平澤) 백헌(百憲), 최일여(崔日如)・채생 규명(蔡生奎明)이 왔다. 집 아이가 원평(元坪)에서 돌아왔다.

9일 丁亥. 맑았다.

임생 경호(任生景鎬) 형제가 왔다.

박온재 판서 선수에게 보내는 편지[與朴溫齋判書瑄壽書]

지난 가을 한번 뵌 것으로는 10개월이나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또 저무는 해가 사람을 재촉하여 너무 빨리 고별하였기에, 기거하는 생활에 대해 자세히 여쭈어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정신과 기력이 옛날과 같아 보이시어 속으로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눈길 한번 돌리는 사이에 가을과 겨울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정(新正)에 대감의 체후(體候)가 건강하고 온 집안이 모두 경사스러우시기를 마음 속으로 빕니다. 저는 거칠고 먼 지방을 떠돌아다닌 지 지금 8년이 되고 나이가 어언 60이 되었습니다.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아마도 없을 듯합니다. 새[鳥]를 대신하여 마현(馬峴)을 넘는 그리움이 어느 때인들 마음속에 절실하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신 백씨(伯氏) 환재선생[瓛齋先生, 朴珪壽]의 가장(家狀)을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정중하게 읊어 보았더니, 황홀하게도 마치 따스한 가르침을 접하는 듯하여 저도 모르게 감격해마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선생은 충효의 큰 절개, 폭넓은 학문과 바른 예법의 곧은 공부로 원대한 꾀를 도모하시어 비록 300년 전에 태어나셨더라도 일대(一代)의 위인(偉人)이 되셨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지금의 세대가 존경하고 사모할 줄을 알지 못하니, 자운[子雲, 揚雄의 字]을 직접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시비가 밝지 못해서입니까? 각하(閣下)께서 동포지기(同胞知己)로서 유사(遺事)를 수습하는데 능력을 발휘하셨습니다. 제도를 설명할 때는 법도에 맞고 정밀하며 서사(敍事)할 때는 번쇄하여도 싫증내지 않으시고 아울러 사우(師友)와 인척의 현자(賢者)를 기록하여, 소전(小傳)을 시원스레 서술하여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 체재(體裁)가 말끔하고 넉넉하여 맹견(孟堅)의 골수를 깊이 얻었으니 이것으로 징험하기에 충분한 돈사(惇史)가 되고 선생의 뜻과 일이 후세에도 선명하게 남을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비록 그렇지만, 선생은 옛날의 이른바 대인이었습니다. 일생동안 출처・공업에 있어서 남을 따라 오르내리지 않고 오직 의리만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만년의 절조는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지금 덕을 기술한 문장은 오히려 선생의 밑에 쌓인 것과 좋아하는 것을 다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형편이 그러하기 때문이니, 애석합니다. 일본(一本)을 옮겨 적고나서 원본을 감히 오래 둘 수 없어 때마침 귀천(歸川)으로 돌아가는 인편이 있어 좋은 술병과 함께 싸서 보냅니다. 다행히 살펴 받아들이시면 고맙겠습니다. 의심스런 곳 몇 군데에 대해서는 망령되게 종잇조각을 끼워 넣었습니다. 살펴보시고 취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봄바람이 매우 찬데 음식과 몸조리를 더욱 소중하게 하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10일 戊子. 맑았다.

본관(本官) 이시일(李是鎰), 이생 종대(李生鍾大), 김성실(金聖實), 상인(喪人) 이면호(李冕浩), 이생 연학(李生淵學)이 왔다. 수복(壽卜)이 돌아가는 편에 귀천(歸川)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백거(伯渠)가 와서 묵었다.

11일 己丑. 흐리고 비가 오다가 새벽 무렵에 눈과 합쳐졌다. 종일 동풍이 불었다.

채여성(蔡汝成), 김필주(金畢周)가 와서 묵었다. 예산(禮山) 강변(姜弁)이 가야금을 보내왔다.

13일 辛卯. 맑았다. 우수절(雨水節).

평기(坪基) 큰 생질의 편지가 읍을 통해서 도착했는데, 이번 달 6일에 쓴 것으로, 각 집이 모두 온전하지만 풍동(豐洞)의 누님이 감기를 앓은 후 식사가 어려워 기력이 점점 약해진다고 하니 안타깝다. 셋째 생질 응규(膺珪)가 세밑에 경중(京中)의 태학[太學, 성균관] 월과(月課)에 나아갔는데, 23일에 편전(便殿), 임금거처 면시(面試)에 참가하여 차상으로 입격(入格)하였다고 하였다. 오늘은 본동(本洞) 화정리(花井里)와 만지동(晩芝洞)이 동계(洞禊)를 합설하였다. 당진(唐津) 온동(溫洞) 이생 병우(李生丙愚)가 와서 묵었다. 인세경(印世卿), 최성여(崔誠汝), 조안교(趙顔敎)가 왔다.

14일 壬辰. 맑다가 밤에는 흐리고 큰바람이 종일토록 불었다.

이생(李生)이 갔다. 유치면(兪致冕)이 왔다. 공주 풍동 누님이 보낸 편지와 장전(章田) 이생(李甥)이 초파일에 보낸 편지가 읍편(邑便)으로 도착하였다. 모레 본관(本官)이 감영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읍 안으로 답서를 부쳤다. 집 아이가 읍내로 가서 박영(朴令)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유병채(劉秉采)가 왔다. 양규환(梁奎煥)이 와서 묵었다.

15일 癸巳. 맑았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백거(伯渠), 혜중(惠仲), 박치영(朴致永), 인세경(印世卿), 김은경(金殷卿) 4 형제가 왔다. 세경(世卿), 치영(致永)과 함께 원평(元坪)에 가서 석운(石雲)을 방문하였다. 이도은(李陶隱), 황석정(黃石汀)과 자우현(雌牛峴) 이낭청(李郞廳)이 먼저 와 있었다. 저녁에는 뒷산에 올라 새로 뜨는 달을 보았고, 밤에는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며 술을 마시며 즐겼다. 박치영(朴致永)이 창도 잘 하고 우스갯소리도 잘 하고 제반 놀이를 못하는 것이 없었다. 좌석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웃으며 운을 따서 시를 지었다.

17일 乙未. 맑았다.

오후에 세경(世卿), 치영(致永)과 함께 화정(花井)으로 돌아오다가 옥녀봉(玉女峯)에 이르러 멀리 북촌민(北村民) 7~80명이 관문(官門)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이포(吏逋)를 〈민(民)에게〉 더 내게 한 일에 대해 모여서 등소(等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와 11일에 보낸 서울 편지를 보았는데, 서울과 지방이 모두 무사하였다. 그리고 재동 진사댁(齋洞進士宅)의 우환은 여전하였다. 지난해의 응제(應製)・일차(日次)・월과(月課)에서 대과(大科) 7~8인, 소과(小科) 20여 인을 뽑았고, 초시에 베푼 상격(賞格)도 많았다. 연초에 전교를 내려 금년은 동궁이 서른을 바라 보는[望三, 21살이 되었음 말함]해이므로 2월 초 8일에 진찬(進饌)을 베푼다고 하였다.

20일 戊戌. 맑고 바람이 불고 추웠다.

순좌(舜佐)가 갔다. 참봉 조종호(趙鍾灝)가 왔다. 김여수(金汝壽)가 목수 2인과 함께 와서 집안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22일 庚子. 맑았다.

교리 한흥교(韓興敎), 박진사[읍내 박승지의 아들], 조운포(趙雲圃)가 왔다. 천구(千駒)가 덕산(德山) 지동(枝洞)으로 간 것은 그의 외할아버지 사우(祠宇)에 참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경률(李景律)이 와서 묵었다. 이매(李妹)의 편지를 받아보았다.

25일 癸卯. 흐리고 조금 비가 뿌렸다.

서쪽 울타리 근처에 작은 집을 짓기 위하여 박팔천(朴八千)의 집을 사서 허물고 오늘 터 닦기 공사를 시작하였다. 조운포(趙雲圃), 홍생 관후(洪生寬厚), 채여성(蔡汝成), 김성실(金聖實)이 왔다. 여성(汝成)이 모레 서울로 가서 회시(會試)에 참가한다고 하여 재동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도성(道成)이 귀가하였다.

26일 甲辰. 어제 밤 늦게부터 오늘 아침까지 가랑비가 내렸다.

오늘 동네 장정을 동원하여 기초공사를 하였는데 아직 끝내지 못하였다.

27일 乙巳. 때로 흐리고 때로 맑다가 바람이 불었다.

선달 인택여(印澤如)가 서울로 가 여러 곳을 방문한다고 하여 서울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황생 동연(黃生東淵), 김중평(金仲平)이 왔다.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오늘 만지동민(晩芝洞民)을 징발하여 기초공사를 끝냈다. 인세경(印世卿)이 왔다.

주석
소암리(小闇梨) 암(闇)은 사(闍)의 오식. 사리는 중의 별칭. 소사리는 사미승을 말한다.
자운[子雲, 揚雄의 字] 한(漢)나라 양자운[揚子雲, 揚雄]이 학문이 깊고 기이한 글자[奇字]를 잘 알았는 데도 벼슬은 궁정(宮庭)에서 창을 잡는[執戟] 낭관(郞官)에 지나지 못하였다.
형제를 의미한다.
맹견(孟堅) 후한의 역사가로 한서를 지은 반고(班固)의 자가 맹현(孟賢)인데 여기에서는 맹현을 가르킨 것이므로 견은 현의 오식으로 보인다.
돈사(惇史) 덕행이 있는 사람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말한다.
월과(月課) 예조(禮曹)에서 한 달에 한 번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에게 강서(講書)를 시험하던 일을 말한다.
이포(吏逋) 구실아치가 조세 포탈과 관물을 사용으로 축내는 것. 아전의 가장 큰 부정행위였다.
일차(日次) 경서의 강독을 권장하기 위하여 실시하던 시험. 성균관의 유생 가운데서 실력 있는 사람을 뽑아 임금이 친히 대궐에 모아 놓고, 삼경이나 오경에서 찌를 뽑아서 외게 하던 것으로, 뒤에 생원, 진사, 명문의 자제 등도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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