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戊寅. 맑고 바람이 조금 불었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영천(永川) 권종영(權鍾英)이 와서 묵었다. 탑실(塔室)의 숙부이다. 안해중(安海重)이 왔다. 미장이와 목수 등이 새집의 벽과 기둥을 세웠다.
2일 己卯. 맑고 바람이 차가왔다.
권종영(權鍾英)이 갔다. 장영(張令) 집의 하인 조금성(趙金成)이 와서 묵었다. 만지 동민(晩芝洞民) 3인을 동원하여 새집 윗 채 벽의 뼈대를 얽게 하였다. 목수 등이 갔다. 미장이 박윤진(朴允鎭)이 와서 묵었다.
3일 庚辰. 맑다가 바람이 조금 불어 추웠다.
조금성(趙金成)이 서울로 가려 하여 집 아이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부쳤다. 조운포(趙雲圃), 성취묵(成醉黙)이 와서 생질 이선재(李瑄宰)가 원임[原任, 전임]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의 별칭]의 생질로서 진사에 붙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기쁘다. 이군선(李君先), 이계하(李啓夏)가 왔다. 만지 동민(晩芝洞民) 3인을 동원하여 벽의 뼈대를 얽게 하였다.
4일 辛巳. 맑고 따스하였다. 성취묵(成醉黙)이 갔다. 본 동민(本洞民) 2인을 동원하여 벽의 뼈대를 얽게 하였다. 진사 윤이열(尹彝悅)이 와서 묵었다.
5일 壬子. 맑고 따스하였다.
윤이열(尹彝悅)이 갔다. 최성여(崔誠汝), 박종헌(朴琮憲)이 왔다. 미장이 2인이 초벽(初壁) 흙일을 시작했다. 동민 2인을 동원하였다.
6일 癸未. 맑다가 밤에 흐렸다.
세경(世卿), 군선(君先)이 왔다. 위채의 초벽(初壁) 일이 끝났다. 동민 2인을 동원하였다.
7일 甲申. 흐렸고 비가 종일토록 왔다.
하사(下舍) 벽의 뼈대를 엮었다.
이생 방헌에게 답하는 편지[答李生邦憲書]
지난번에 여막에 갔다가 슬퍼하는 모습을 뵙고 돌아와서까지도 여전히 울적하였습니다. 덕을 사모함이 더욱 절실해질 때쯤 곧바로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복제[服制, 상주의 의식]를 잘 견디신다니 매우 안심이 됩니다. 대개 보내신 편지의 정연한 수백 마디 말은 여러 번 읽어도 싫증나지 않습니다. 조금 나이가 많음을 미루어 문과(問寡)하는 지극한 뜻을 드리우셨는데, 저 같이 재주가 소략한 사람이 어떻게 당신의 바람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지만 의리는 강(講)을 하지 않으면 익힐 수 없으며, 붕우가 탁마(琢磨)하는 것은 옛날의 방법입니다. 만약 성대한 깨우침을 통해 좁은 저의 식견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끝내 바름으로 나아갈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구하지만 스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무릇 의리란 때를 따르고 사람을 따르는 것으로서, 곧 『중용(中庸)』의 시중(時中)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내주신 깨우침이 모든 걸 다 말씀하셨지만, 한 마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자는 궁(窮)하면 자기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獨善], 현달하면 천하(天下)를 아울러 선하게[兼善] 합니다. 궁(窮)에는 궁의 중[窮之中]이 있고, 달(達)에는 달의 중[達之中]이 있습니다. 그러니 홀로 선함[獨善]은 군자가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득이한 것입니다. 그 가슴 속에 아울러 선하는 실질[兼善之實]을 구비하지 않음이 없으나 이것을 구비하고서도 명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힘써 다할 뿐입니다. 선비는 비록 초라한 집에 살지만 천하의 일이 자신의 분수 안의 일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농사일을 하거나 판축(版築) 일을 하는 가운데서 나와 하루아침에 재상・보상의 자리에 올라 성대하게 막힘이 없는 것은 왜입니까? 평소에 축적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명(高明)께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근심에 처하고도 오히려 자신을 신칙하고 성실히 행하기를 근면하게 하며 게을리 하지 않아 족적이 안마당을 나오지 않지만 고금을 현양하고 시의(時宜)에 통달한 것은 얻은 바가 있는 것이 아니면 이와 같을 리 있겠습니까? 무릇 부자[夫子, 공자]께서는 칼날을 밟거나 작록을 사양하는 것이 중용(中庸)보다 쉽다고 여겼으니, 중용의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말하길, “중용을 택한다”고 하였으니, 중용이 일정한 물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송나라가 남하한 초기에 사람의 마음은 한(漢)나라를 생각하였고[思漢] 장수는 능력 있고 병사는 용감하여 이때에 이르러 한번 크게 일어나 옛것을 회복할 수 있을 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일생의 대의를 회복(恢復)에 두었습니다.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안락에 빠져 강타(江沱)의 인재들이 쇠락하여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가사도(賈似道)는 도리어 척화(斥和)의 의리를 도둑질하여 망국을 재촉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에 군신(君臣)이 모두 도망하여 두 능(陵)에 욕이 미쳤습니다. 이는 백세토록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라 할 것이나, 일이 안정된 후 사계선생[沙溪先生, 金長生]은 화친과 우호를 닦자고 권하였습니다. 의리가 한가지만을 고집할 수 없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 동방 선유(先儒)의 나아가고 머뭄[出處]에는 각기 당연한 바가 있었습니다. 수옹(遂翁)에 이르러 비로소 나아가지 않는 것을 의리로 여겼으며, 이것도 한 때의 일인데 이로부터 유자(儒者)의 철칙이 되어 200년 동안 따르고 고치지 않았습니다. 천하에 어찌 인판(印板) 같은 의리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다름 아니라 묘당(廟堂)에서는 성심으로 현자를 찾으려는 뜻이 없고, 유자에게는 포부를 갖고 널리 구제하려는 실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허문(虛文)으로 서로 얽어매고 그대로 답습하며 감히 스스로 다르게 하지 못합니다.
저는 선현의 나아감이 중용인지 후현의 나아가지 않음이 중용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지금은 습속이 이미 오래되어 대역량(大力量)・대견식(大見識)이 있지 않다면 가벼이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비록 나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나아가 쓰일 수 있는 실질[出用之實]을 갖춘 이후에 부끄러움이 없을 듯합니다. 모르건대, 고명께서는 어떻습니까? 저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배움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세상에 처하면 실수가 많고 집안에 있으면 단속이 없습니다. 때로 한번 생각해 보면 회한이 무궁합니다. 만약 궁행군자가 있다면 두려워하고 아끼며 그의 아랫사람이 되는 것을 사양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유자의 출처를 망령되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보내주신 편지에 그 단초를 열어주셨기에 참람하게도 이를 언급하였습니다. 진실로 중용을 선택하는 도[擇中之道]에 대해서는, 다만 본령을 가진 자만이 말할 수 있습니다. 본령이 없다면 어찌 중용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고명께서는 살펴보시고 헤아리시리라고 생각합니다.
10일 丁亥. 맑고 따스하였다.
농사철이라 고정[雇丁, 머슴]을 구하기 어려워 척찬동(尺讚洞)에 사람을 보내, 내일 쓸 역부(役夫)를 동원하여 오게 하였다. 성취묵(成醉黙), 김일관(金日觀)이 와서 묵었다. 밤에 시 한 수를 함께 지으며, 뜰 가 돌 위에 앉아 달을 감상하고 꽃을 보았으며 생황을 불고 금(琴)을 탔다.
11일 戊子. 맑고 따스하였다.
척찬동 작인(作人) 11명, 본촌민 2인이 와서 일을 도왔다. 이군선(李君先), 조안교(趙顔敎)가 왔다. 취묵(醉黙), 일관(日觀)이 갔다.
12일 己丑. 맑고 따스하였다.
척찬동 작인(作人) 8명, 본촌민(本村民) 1인이 와서 일을 도왔다. 석운(石雲),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13일 庚寅. 흐리고 때때로 보슬비가 왔다.
본촌민(本村民) 1인이 와서 일을 도왔다. 석운(石雲), 도은(陶隱), 윤경(倫卿)과 함께 영탑(靈塔) 뒤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시를 지었다. 월해(月海)가 두견주[杜鵑酒, 진달래술]와 목두채[木頭菜, 두릅나물]를 대접하였다. 빗발이 흩날려 함께 거처로 돌아왔다. 인세경(印世卿), 김은경(金殷卿)이 와서 묵었다. 조안교(趙顔敎), 현경전(玄景田)이 왔다. 밤에 덕실(德室)이 갑자기 코피를 적잖이 쏟았다.
16일 癸巳. 흐렸다.
새댁[新宅]과 덕실(德室)이 모두 궁귀탕(芎歸湯)을 복용하였다. 승지 박제경(朴齊璟), 황백거(黃伯渠)가 왔다. 진천(鎭川) 주생 성수(朱生成壽)가 왔다. 덕산(德山) 정생 석붕(鄭生錫鵬)이 와서 묵었다. 웅산(雄山) 촌민 6인과 본동민 2인을 동원하여 아래채의 지붕을 이었고 서쪽 담장을 쌓았다. 원평(元坪) 김석운(金石雲)이 겸동(傔童), 어린하인 복준(福俊)을 보내 서울에서 온 조보(朝報)를 보여 주었다. 감시(監試)의 합격자 발표를 4월 초 9일로 미루었고, 문무과 합격자 발표[文武科榜]도 모두 4월 초 3일로 미루었다.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한다는 명령을 하셨다. 홍종우[洪鍾禹, 洪鍾宇]란 자가 수년 전 일본에 가서 옥균[玉均, 김옥균] 등 여러 적과 더불어 두터이 교류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옥균을 상하이(上海)로 유인하여 미국 조계(租界)에서 자살(刺殺)하였다. 시신을 끄집어내어 ‘때를 기다리지 않고 능지처참하는[不待時凌遲處死] 형’에 처하려고 하는데, 괄운(适雲)의 사례를 따랐다고 한다.
17일 甲午. 맑았다.
정생(鄭生)이 갔다. 이군선(李君先), 김필주(金必周), 웅산(雄山)의 송(宋)・양(梁) 두 소년이 왔다. 신공백(申公伯), 안우경(安雨卿)이 왔다.
18일 乙未. 맑았다.
벽어(碧魚)를 천신하였다. 만지(晩芝) 동민 6인을 동원하여 담장을 쌓았다. 세경(世卿), 운거(雲擧)가 왔다. 송평(松坪) 최원여(崔元汝)가 왔다. 은경(殷卿)이 새댁이 태중에 복용할 약을 흑석(黑石) 오내홍(吳來鴻)에게 의논하고 약방문을 내어 주었다. 보명탕(保命湯)은 매달 초에 반드시 2~첩을 복용하는데, 이번 달에는 10첩까지 복용한다. 만약 코피가 다시 나면 연이어 십전탕(十全湯)을 쓰는데, 매달 열흘 사이로 5~6첩까지 시험한다. 이번 달은 실혈(失血)한 뒤라서 조리하지 않을 수 없어 여러 첩을 써볼 것인데, 새댁과 덕실(德室)은 오늘 먼저 삼귀음(蔘歸飮) 2~3첩을 시험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말에 따라 삼귀음(蔘歸飮) 2첩을 조제하여 각각 복용하게 하였다.
19일 丙申. 맑았다.
만지(晩芝) 동민 5인이 와서 담장을 쌓았다. 김삼봉(金三峯)이 나귀를 끌고 돌아왔는데, 16일에 쓴 집 아이의 첫 번째 편지를 받았다. 또 간동(諫洞)에서 내린 편지와 평택(平澤), 가평(加平) 두 딸의 편지를 받았다. 재동(齋洞)의 우환은 여전히 차도가 없고 가평(加平) 이실(李室)은 병을 앓은 후에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용모가 상했다고 하니 애처롭다. 옥균[玉均, 김옥균]이 피살된 일을 자세히 물었더니 과연 홍종우(洪鍾宇)가 힘을 내어 공을 세운 것이었다. 상하이(上海)로 유인하여 총을 쏘아 죽였다. 또 이일직(李逸稙)・권동수(權東壽)란 자가 밀지를 받고 일본에 가서 영효[泳孝, 박영효]를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경찰에게 체포되었는데, 그런 가운데 권동수가 우리나라 공관으로 달아났다. 일본 정부에서 경찰을 공관으로 들여보내 잡아가자 서리공사(署理公事) 유기환(兪箕煥)이 우리나라를 욕보이는 것으로 여겨 즉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영효는 일본 부자의 사위가 되어 선린의숙(善鄰義塾)을 세워 널리 학생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 하였다. 호서 좌도(湖西左道)에 동학과 서학이 크게 번성하여 무리를 모아 세력을 믿고 폐단을 많이 저질렀다. 저명한 사대부가 중에 욕을 보지 않은 집이 없었다. 이 지방은 평소에 동학(東學) 명색이 없었는데, 요즈음 들어 점점 전파되고 있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통탄스럽다. 새댁과 덕실(德室)은 각각 삼귀음(蔘歸飮)을 복용하였다.
20일 丁酉. 흐리다가 밤에는 비가 오고 바람이 차가왔다.
만지(晩芝) 동민 3인이 와서 담을 쌓았다. 세경(世卿)이 덕산(德山)으로 가는 도중에 왔다. 박윤진(朴允鎭)이 와서 담 쌓는 일을 도왔다. 밤에 덕실(德室)이 오한이 심하여 몸을 떨며 크게 아팠는데, 마치 감기몸살과 같았다. 치통도 동시에 발생하였다.
21일 戊戌. 맑고 바람이 차가왔다.
전순길(田順吉)이 와서 박윤진(朴允鎭)과 함께 흙일을 계속 도왔다. 만지(晩芝) 동민 1인이 와서 일을 도왔다. 밭을 갈고 오이를 심었다. 박인주(朴仁周), 강윤중(姜允中)이 왔다. 세경(世卿)이 덕산(德山) 양촌(陽村)에서 돌아오는 길에 찾아 왔다.
22일 己亥. 맑고 바람이 차가왔다.
윗채 사벽(沙壁)하는 일을 만지(晩芝) 동민 2인이 일을 도왔다. 오이, 마, 무, 배추, 푸성귀, 갓, 감자를 심었다. 조교안(趙敎顔)이 왔다.
23일 庚子. 맑고 바람이 차가왔다.
윗채에 사벽(沙壁)하였다. 화산(花山) 이척좌[李戚佐, 字 公弼]가 왔다. 콩을 심고 박을 심었다. 흙 담에 지붕을 이었다.
24일 辛丑. 맑고 바람이 차가왔다.
윗채에 사벽(沙壁)하였다. 유규항(兪圭恒)이 왔다. 도미, 조기를 천신(薦新)하였다.
26일 癸卯. 맑고 따스하였다.
새집의 뒷담을 쌓았는데, 만지(晩芝) 동민 1인이 일을 도왔다. 황동연(黃東淵)이 왔다. 그는 새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이번 달 20일에 쓴 집 아이의 두 번째 편지를 전해 주었다. 경중(京中)에서 장차 토역과(討逆科)를 개설하고 또 응제(應製)를 연달아 개설하려 하여 원회(元會)가 이 때문에 잠시 서울에 머무른다고 하였다. 서울 집의 그릇과 세간살이 한 짐을 매전(梅田) 뱃짐 편으로 부쳤는데 오늘 실어 왔다. 듣건대, 덕산(德山)군수가 합덕(合德) 민사(民事)를 감영에 보고할 때 난민(亂民)이라 지칭한 일로 합덕 사람 수백 명이 관정으로 쳐들어가 따지며 쫓아내려고 하자, 덕산군수가 몸을 낮추어 변명하여 겨우 면했다고 한다. 마침 김일관(金日觀)이 관아 안에 있다가 붙잡혀 구타를 당하였다고 하니 매우 놀랍다.
27일 甲辰. 맑고 따스하였다.
흙일과 담쌓기가 오늘 모두 끝났다. 오내홍(吳乃洪)이 와서 새댁과 덕실(德室)을 진맥하였다. 약은 예전의 처방을 썼다.
29일 丙午. 맑고 바람이 불었다.
동민 3인을 동원하여 새집의 섬돌을 쌓았다. 성노포(成老圃), 이군선(李君先), 인운거(印雲擧)가 왔다. 해미(海美) 이생 진화(李生振和)가 와서 보았다. 백치(柏峙) 이초계[李草溪, 敏升]의 집 하인이 서울에서 와서 23일에 쓴 집 아이의 세 번째 편지를 전해 주었다. 좌도[左道, 충청도 내륙지방]는 동학(東學)의 폐해가 날로 심해진다니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