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丁未. 흐리고 보슬비가 오고 큰바람이 불었다. 입하절(立夏節).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안우경(安雨卿)이 와서 내일 아침에 서울로 간다고 말하여 집 아이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부쳤다. 홍생 봉유(洪生鳳裕)가 왔다. 인운거(印雲擧), 현경전(玄景田)이 왔다. 새집 벽 바르기를 시작하였다. 장운(壯雲)의 형 돌생(乭生)이 어제 왔다가 오늘 갔다. 덕산(德山) 황조여(黃朝如)가 일간 서울로 간다고 하여 사람을 보내 집 아이에게 보낼 옷을 전해 주었다. 새댁, 덕실(德室)이 모두 보명탕(保命湯)을 복용하였는데, 매월 초에 2첩을 복용하는 것은 오내홍(吳乃洪)이 처방해준 약방문이다. 저녁에 경전(景田)이 갔다. 운거(雲擧)가 유숙하였다.
4일 庚戌. 흐리고 새벽에 보슬비가 지나갔다.
오늘도 벽 바르기를 하였다. 목수 김여수(金汝壽) 등 5인이 와서 문짝 일을 하였다.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원평(元坪) 석운(石雲)이 심부름꾼 아이 복준(福俊)을 보내 난초(爛鈔)를 빌려 갔다. 또 모레 서울로 가는 인편이 있다고 하여 집 아이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를 써서 부쳤다. 듣기를, 호남(湖南)의 무장(茂長)・고창(高敞) 등지에 동학(東學) 수천 명이 깃발을 세우고 대포를 울리며 인가를 때려 부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지역은 모두 저 무리가 평일에 불만을 가졌던 곳이다. 양호(兩湖)에서 발생하는 동학의 기세는 우려할 만하다.
5일 辛亥. 흐렸다.
오늘도 벽 바르기와 나무일[木役]을 하였다. 세경(世卿)이 왔다. 평기(坪基) 큰 생질의 편지가 읍에서 왔다. 듣건대 그간 동학의 소요로 한바탕 난리를 겪었고, 또 그 대접주(大接主) 최법헌[崔法軒, 최시형]이란 자가 자기 무리에게 작폐를 금하라고 통유(通喩)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6일 壬子. 맑았다.
목수 등이 일을 끝내고 갔다. 마루청은 아직 깔지 않았지만, 도배는 끝났다. 현순소(玄舜韶), 경전(景田), 인운거(印雲擧)가 갔다. 성취묵(成醉黙), 황백거(黃伯渠)가 와서 묵었다. 최성여(崔誠汝)가 왔다. 듣기에 본읍이 감영의 관문[關文, 공문]에 따라 포수를 선발하여 성을 지키게 하였다고 하는데, 대개 호남의 소요 때문이다.
7일 癸丑. 흐리고 밤에 비가 왔다.
백거(伯渠)가 갔다. 세경(世卿), 은경(殷卿)이 왔다. 내일 김석운(金石雲)과 강당(講堂)에서 함께 놀자고 약속하였는데, 해마다 의례하는 욕불(浴佛) 놀이 모임이다. 오후에 취묵(醉黙), 세경(世卿), 은경(殷卿)과 함께 원평(元坪)으로 출발하였다. 강기(康基)에 먼저 들러 조운포(趙雲圃) 노인을 모시고 함께 가다가 중산(中山) 김치명(金致明) 부자를 방문하고 저녁 무렵에 원평(元坪)에 도착하였다. 도은(陶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신기(身氣)가 불편하여 밤새도록 앓았다.
8일 甲寅. 비가 오다가 오후에 그쳤다. 요즈음 비가 빈번하게 내리는 데 보리농사에 크게 방해된다.
석운(石雲)의 집에 서울 인편이 와서 초 4일에 쓴 편지를 전해 받았다. 호남(湖南)의 동요(東擾)가 날로 심해진다고 한다. 초 10일에 석운 집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하여, 집 아이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를 마무리하여 부쳤다. 밤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운을 따서 시를 지었다. 오늘은 비 때문에 강당의 놀이 모임을 갖지 못했다.
9일 乙卯. 새벽에 안개가 끼었다가 맑았다.
집의 종 등이 가마를 가지고 왔다. 황곡(篁谷) 박진일(朴鎭一)이 서울에서 돌아와 초 2일에 쓴 집 아이의 네 번째 편지를 받았다. 경향(京鄕)이 두루 별고가 없고 집 매매와 돈의 변통이 모두 동요(東擾)로 인해 가로막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걱정이 되었다. 호남(湖南) 동도(東徒)가 혹은 수천 명 혹은 만 명씩 무리를 지었고 소재하는 곳에서 소요를 일으켜서 사소한 원한을 보복하다가 점차 관부에 난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군대의 무기를 가져다가 기를 세우고 포를 울리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니 누가 어쩌지를 못하고 있으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기호(旗號)를 삼았다.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병력을 모아 물러나는 무리를 섬멸하는 과정에서 양민이 많이 죽었다. 이것이 오히려 민심을 격동시켜 무리가 더욱 불어났다. 의정부에서는 임금께 아뢰어 홍재희[洪在羲, 改名 啓勳]를 서호 초토사(西湖招討使)로 임명하였다. 그는 경영(京營) 창포대(槍砲隊)와 잡색군(雜色軍) 1,500명을 이끌고 초 5일에 인천(仁川)을 출발하여 교선[轎船, 轎는 輪]을 타고 곧장 호남(湖南)의 군산(群山)으로 향하여 토벌을 기약하였다. 호서(湖西)의 경우 동도(東徒)가 사대부를 능욕하고 가옥을 때려 부수어 어떤 사람은 배상(賠償)를 지급하고 모면하기까지 하였다. 좌도(左道)의 여러 대가(大家) 중에 평소 무단을 행한 사람들이 다투어 그 속에 몸을 맡겨 화를 면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무리가 날로 번성하여 깃발에 도사송(道師宋) 세 글자를 써서 횡행하기를 꺼리지 아니하였다. 심지어 부녀자를 빼앗아 가기까지 하였다. 순사[巡使, 감사]가 각 읍에 병력을 동원하여 성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또 부보상(負褓商)을 징발하여 전선(電線)을 지키고 적정(賊情)을 정찰하게 하였다. 또 각 읍에 향약(鄕約)을 시행하고 무리를 모아 방어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산산히 흩어져 통일성이 없고 빈말뿐으로 실효가 없다. 면천읍(沔川邑)도 14일에 일제히 모여 향약장(鄕約長)과 각동의 상존위(上尊位)를 세운다고 하는데, 모두 피할 생각만 하여 마치 일이 어린아이의 장난 같다. 어제는 동도(東徒) 100여 명이 원평(元坪)의 민가에 와서 묵고 오늘은 개심사(開心寺)로 향한다고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동도(東徒)가 개심사로 가는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어보았더니, 보현동(普賢洞) 이진사(李進士)가 평소 동학을 매우 엄하게 배척하여 동도(東徒)가 이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개심사(開心寺)에서 회의를 하고 그 집을 때려 부수려 한다고 하였다. 내포(內浦)는 동학(東學)이 가장 적었는데, 지금은 넘쳐나서 날로 맹렬하고 달로 왕성해지고 있다. 이것도 시운이니 매우 한심스럽다.
나는 오후부터 한기가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오자 한기가 점점 더 심해져 종일 고통에 시달렸다. 학질 기운[瘧氣]이 다시 발생한 것으로, 이번이 두 번째[二直]이다.
12일 戊午. 맑았다.
오늘은 격일로 몸의 기운이 조금 나아져 밤에 금계랍(金鷄蠟)을 복용하였다. 감찰 윤영필(尹永弼), 인원유(印元有), 박인진(朴仁鎭), 호형찬(扈亨燦), 이정립(李正立)이 왔다. 호생(扈生)이 서울에서 오면서 초 5일에 쓴 집 아이의 다섯 번째 편지를 전해 주었다. 금산민(錦山民)이 보상(褓商) 5~600명과 함께 동당(東黨)을 공격하여 100여 명을 살상하고 〈동당의〉 나머지는 모두 패하여 흩어졌으며, 금구(金溝)의 동당(東黨) 수만 명이 전주(全州)로 향하다가 갑자기 도망쳐 흩어졌는데 이 때문에 서울 안의 인심도 평온해졌다고 한다. 동당(東黨)이 이른바 포고문(布告文)을 발표하였는데, 모두 시사(時事)를 가리켜 배척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14일 庚申. 맑았다.
원평(元坪) 김석운(金石雲)의 집에 내일 서울로 가는 인편이 있다고 하여 삼동(三童)을 보내, 집 아이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를 부쳤다. 탑실(塔室)이 새집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김은백(金殷百)이 와서 묵었다. 세경(世卿)이 왔다.
18일 甲子. 아침에 맑았다.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크게 천둥이 치고 큰 우박이 내렸다.[매전(梅田)에서도 이때 그러하였는데, 그 와중에 보슬비가 내렸지만 우박은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일찍 매전(梅田)으로 출발하였는데, 생질 이선재(李瑄宰)의 진사도문(進士到門)을 보기 위해서였다. 광록(光祿), 삼봉(三鳳) 두 품팔이꾼으로 하여금 가마를 메게 하였다. 복석(福石)이 수행하였다. 장운(壯雲)은 오늘이 관례여서 따라 나서 그의 집으로 갔다. 김언백(金彦伯)에게 집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였다. 오시[午時, 오전11시~오후1시] 초에 매전에 도착하였는데, 아직 도문의 행렬이 도착하지 않았다. 어제 비로 인해 통행에 지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매(從妹) 모녀를 만났고 경서(景西) 형제와 대화하였다. 하객이 집안 가득하였다. 신시[申時, 오후3~5시]에 크게 천둥이 치고 폭우가 내렸다. 눈과 같이 우박이 내려 해를 막고 대나무가 꺾이고 쓰러졌다. 보리가 손상을 입을까 걱정되어 물었더니 보리에는 탈이 없다고 하여 다행이다.
19일 乙丑. 맑고 바람이 불었다.
사시(巳時) 초에 신은(新恩)이 왔다. 경흥(景興)도 왔다. 신진퇴(新進退)를 4~5차례 부르고 술을 마시며 즐겼다. 매전(梅田) 가마꾼이 돌아가는 편에 집 아이에게 보내는 다섯 번째 편지를 부쳤다. 집 아이가 16일에 쓴 여덟번째 편지를 보니, 안동(安洞) 집을 팔고 간동(諫洞)에 작은 집을 새로 샀는데 이미 값을 치뤘다고 하였다. 오후에 광대의 장대 놀이[緣橦戲]를 보았다. 오후 5시쯤에 출발하여 죽동(竹洞)을 지나다가 인도숙(印道叔)의 병 문안을 하였다. 병세가 악화되어 가슴이 아팠다. 어두컴컴할 무렵 집에 도착하였다. 김윤경(金倫卿)을 문병하였다. 감기가 악화되어 시령(時令)의 우려가 있어 가슴이 아팠다. 원평(元坪) 석운(石雲)이 사람을 보내 14일에 쓴 집 아이의 여섯 번째 편지를 전해 주었다. 호남(湖南) 동당의 소요[東騷]가 날마다 심해져 완영병대(完營兵隊) 영관(領官) 이경호(李璟鎬)가 전사하였다. 순천 영장(順天營將) 김시풍(金始豐)은 평소에 적도를 잘 붙잡는다는 말을 듣던 자인데, 지금 동당(東黨)에 투항하였다. 시비를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동당(東黨)이 그를 우두머리로 추대하였다.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勳)이 그를 체포하여 죽이려 계획하였다. 태인(泰仁),부안(扶安),고부(古阜),정읍(井邑),금구(金溝),흥덕(興德),장성(長城),나주(羅州) 등의 곳에서는 〈동당이〉 관사(官舍)를 모두 때려 부수고 군기를 탈취하였다. 정읍이 가장 참혹한 피해를 당하였다. 비당(匪黨)은 어떤 때는 1,000명, 어떤 때는 10,000명으로 나뉘었다 모였다 함에 일정함이 없었다. 길가에서 모병하였는데, 나그네의 나귀와 소를 빼앗아 군용에 충당하였다. 행상(行商)을 만나면 부보상(負褓商)으로 간주하고 잡아 군오(軍伍)에 편입시켰다. 이 때문에 행로가 단절되었다. 호서(湖西)의 경우는 회덕(懷德)에서 군기(軍器)를 빼앗겼다가 관에서 탈환하자 저들 무리 가운데서 귀화하거나 흩어져 달아난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윤음(綸音)을 내려 포상하였다. 그러나 진잠(鎭岑),공주(公州),청산(靑山) 등지에서는 한결같이 숫자가 불어나 날로 저들의 기세가 드세어졌다. 영남 김해(金海)에서는 민요(民擾)가 일어나 관부(官府)를 범하고 부사(府使) 조준구(趙駿九)를 포박하여 그가 민을 해치고 괴롭힌 죄상을 열거하며 난타하고 문초한 후 그의 인부(印符)를 빼앗고 고을 경계 밖으로 축출하였다. 창원부사(昌原府使) 홍남주(洪南周)가 내달려가 조사하려 하였다. 또 영남 민들이 통문을 돌려 순사[巡使,감사] 이용직(李容直)의 죄를 열거하고 장차 감영에 모이려 한다고 한다. 심영[沁營, 강화유수영]의 진무영 병대(兵隊) 500명과 통제영(統制營) 포대(砲隊)가 또 모집되어 호남으로 갔다.
22일 戊辰. 맑았다.
백거(伯渠)가 갔다. 세경(世卿), 군선(君先), 경교(景郊), 조운포(趙雲圃), 진사 황동연(黃東淵) 은 조부, 아들, 손자와 그 아우 태연(泰淵)이 왔는데, 새로 합격한 진사이다. 세경(世卿)이 왔다. 매전(梅田)에 상경하는 인편이 있다고 하여 집 아이에게 보내는 일곱 번째 편지를 부쳤다. 덕산(德山) 윤성빈(尹聖賓)의 백씨(伯氏)가 와서 묵었다.
23일 己巳. 맑았다.
김은경(金殷卿), 김필주(金必周)가 와서 함께 원평(元坪)으로 갔다. 내일 중평(仲平)이 영예롭게 도착하기 때문이다. 빈객이 집을 가득 채웠다. 운포(雲圃), 도은(陶隱)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금 지나자 취묵(醉黙)도 왔다. 율객(律客) 문형숙(文亨叔), 장계현(張季賢), 이군방(李君芳), 김생(金生)[소(簫)를 잘 불었다.], 늙은 기생 초옥(楚玉) 등이 거문고, 가야금, 소(簫), 관(管) 등을 연주하며 모두들 밤새도록 질탕하게 놀았다. 초저녁에 신은(新恩)이 덕산(德山)에서 와 시골집에 유숙하였다. 내일 일찍 도문(到門)하기 위해서이다. 〈머물고 있는 곳이〉 멀리 바라보이는데, 횃불이 서로 이어지고 음악 소리가 밤새 울려 퍼져 시내를 사이에 두었는데도 들을 수 있었다.
24일 庚午. 맑았다.
승지 박제경(朴齊璟)이 와서 만났다. 사시에 신은(新恩)이 영예롭게 도착하였다. 나와 박영감이 신묵희(新墨戲)를 부르자 보고 있던 사람들이 담처럼 에워쌌다. 또 온 산과 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광대의 장대 곡예를 구경하였다. 저녁에 창을 들었는데 창부(唱夫)는 5~6인이었다. 신은(新恩)이 오는 편에 19일에 쓴 집 아이의 아홉 번째 편지를 받았다. 호남의 소요가 여전하여 완백[完伯,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견책 파면되고 신 감사에 판서 김학진(金鶴鎭)이 임명되었고, 장흥부사(長興府使)에는 박제순(朴齊純)이 임명되었고, 영광군수(靈光郡守)에는 윤병수(尹秉綬)가 임명되었다. 〈임금께서〉 정부(政府) 초기[草記, 간단한 보고]를 받고 하교하시기를, ‘탐오(貪汚)를 징계하고 소민(小民)을 구휼하며, 제자리를 잃은 생령(生靈)을 안정시키고 완고히 교화에 복종하지 않는 비도(匪徒)를 토벌하라’고 하였다. 말씀의 뜻이 간절하고 처치가 온당하여,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이를 좇아 해산할 듯하고 호서의 동도(東徒)들도 이미 많이 해산하여 우선 그만둘 뜻이 있는 듯하다고 하였다. 다행이고 다행이다. 황석정(黃石汀) 지흠(智欽)도 와서 만났다.
28일 甲戌. 맑았다.
매전(梅田)에서 데리고 온 광대의 재주를 보고 또 창도 들었다. 이경률(李景栗) 숙질이 갔다. 운포(雲圃)와 홍생 관후(洪生寬厚)가 왔다. 박종헌(朴琮憲), 양찬환(梁贊煥)이 왔다. 들으니, 금백[錦伯, 충청감사]이 갈리고 영남백[嶺南伯, 경상감사] 이헌영[李????永]이 금백이 되었다고 한다. 모두 지금의 소요로 인해 골라 임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