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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일 丁丑. 맑았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또 붕어를 천신하였다. 박종렬(朴琮烈), 김언백(金彦伯)이 왔다. 오늘 두 번째 〈학질을〉 치르고[再直] 아침 일찍 노강즙(露薑汁)을 복용하였다. 낮부터 한기가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며 피곤이 심하였는데 야심해서도 여전히 그러하였다. 김은경(金殷卿)이 과부탕(果附湯)을 복용하라고 권하였다. 서생 상리(徐生相理)가 왔다.

2일 戊寅. 맑았다.

양찬환(梁贊煥), 현순소(玄舜韶), 인원유(印元有)가 왔다. 김언백(金彦伯)이 갔다. 아침 일찍 과부탕(果附湯) 1첩을 복용하였다. 원평(元坪) 종 노미(老味)가 내일 서울로 간다고 하여 집 아이에게 보내는 여덟째 편지를 부쳤다. 죽동(竹洞)에서 집 아이가 지난달 18일에 쓴 열번째 편지를 부쳐 왔는데, 당진(唐津) 호생(扈生)이 서울 갔다가 돌아오는 편에 가져온 것이었다. 지난 25일에 간동(諫洞) 새집으로 이사하였는데 집은 모두 15칸 기와집으로 무릎을 펼 만 하다고 하였다. 재동(齋洞) 형님이 내행(內行)을 데리고 귀천(歸川)으로 행차하셨으며, 경향(京鄕)의 자질(子姪)들도 초 1일의 생신을 모시고 지내기 위해 모두 모였다고 한다. 집 아이도 갔는데, 오는 초 4, 5일에 경성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안쪽 혀끝이 문드러지고 이명(耳鳴)도 심해지는데, 이것도 돌림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상초(上焦)에 풍화(風火) 병을 당해 바야흐로 청상전(淸上煎)을 복용한다고 하였다. 호남의 동요(東擾)가 갈수록 더욱 심해져 경군(京軍)도 패하였다. 27일 새벽, 교체된 완백이 전보를 했는데, 저들 무리의 선두가 감영에서 30일 거리인 두정(豆亭)에 막 이르렀는데 경군(京軍)의 소식은 일절 들리지 않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한다. 같은 날 다시 전보를 하였는데, 초토사는 지금 이곳에 없고 저들 무리의 선두가 이미 원평(院坪)에 도착하였으며 수하에 병사 하나가 없어 성을 지킬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같은 날 전주 판관의 전보가 있었는데, 경군이 대패하여 저들 무리 중 일부는 정읍(井邑)에 주둔하고, 일부는 태인(泰仁)에 주둔하고, 일부는 영저[營底, 감영아래]를 향하여 오는데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으니 집안 권솔들은 지금 떠나보내고 자신은 죽음으로써 처신하겠다고 하였다. 같은 날 오후에 적이 완영을 함락하였지만 감영 본관(本官)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전보가 불통되었기 때문이다. 적의 기세가 이와 같아 매우 걱정이다. 어찌 할 것인가. 여론을 들어보니 중국에 군대를 요청하려는 뜻이 있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소요를 더 심화시킬 것이니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적도 가운데 정도령(鄭道令), 서총각(徐總角), 최사문(崔斯文)이란 자가 수괴가 되어 모두들 그 지휘를 받았다. 〈그들이〉 각 부에 명령을 내렸는데, 다음과 같다. “적을 대적할 때 언제나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로 삼는다. 비록 부득이하게 싸우더라도 절대로 생명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행진하여 지나는 곳에서 사람과 물건에 해를 입히지 말라. 효제충신(孝弟忠信)하는 사람이 사는 촌의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12조의 경계령을 두었는데 “항복한 자는 대우를 받는다.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탐오하는 자는 내쫓는다. 따르는 자는 경복한다. 달아나는 자는 추격하지 아니한다. 굶주린 자는 음식을 준다. 간교한 자는 그치게 한다. 가난한 자는 진휼한다.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거스르는 자는 효유(曉喩)한다. 병자에게는 약을 제공한다. 앞의 12조는 우리들 학행(學行)의 근본으로 만약 영을 어기는 자는 지옥(地獄)에 가둔다”라는 것이다. 〈그들이〉 도리어 초토사(招討使)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네가 여기에 온 것은 왜인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오로지 군대의 위세에 의지하여 군사를 풀어 평민을 살해 약탈하니, 이것이 어찌 병사를 거느리는 방법인가? 우리의 이간질에 떨어져 무고한 김시풍(金始豐)을 살해하였으니, 네가 어찌 장수의 지략이 있는 자인가? 너는 지금 두 가지 길이 있다. 달아나면 살고 달아나지 않으면 죽는다. 두 가지 길을 살펴 처신하라”고 하였다. 대개 완영(完營), 전주감영의 교졸(校卒)들이 동당 체포를 빙자하여 촌락을 약탈하여 닭과 개까지도 남아나지 않고 심지어 부녀자를 욕보이기까지 하여 흐느껴 우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저들의 말이 이와 같았다. 반대로 비도(匪徒)가 지나는 지역은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아 부민(富民)들이 기쁘게 군자금을 실어 나르고 있다. 관군이 고부(古阜) 도교산(道橋山)에서 패배한 후 적도들은 관군이 쉽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초토사(招討使)는 중과부적이었고 또 조지(朝旨)에 ‘거취를 신중히 하라’는 내용이 있어, 매우 늦게 출사(出師)하여 영광(靈光) 등지로 향하였다. 적도가 그 빈틈을 틈타 완영(完營)을 함락하였다. 〈군사〉 한 명도 잃은 자가 없이 적이 완영을 점거하였고 도리어 초토사는 그 뒤에 있었다. 조정으로의 소식이 단절되어 전선(電線)이 다시 연결되기 전에는 도무지 승패 존망을 알 수 없으니 걱정이고 걱정이다. 오늘 아침 금백(錦伯), 충청감사 에서 교체된 조병호(趙秉鎬)가 편지를 보내 대략 “교체되어 영남으로 옮겨간다. 시국이 이와 같은데도 재주가 직위에 걸맞지 못하니 우려와 탄식을 이기지 못하겠다”라고 말했다. 27일에 역적을 토멸한 것을 포고하고 진하(陳賀)하였는데, 옥균(玉均)을 죽여 없앤 일에 대한 것이었다. 홍종우(洪鍾宇)는 삼일제(三日製)에서 대과(大科)에 올랐는데, 대개 역적을 토포하는 공업을 이루었으니 장차 크게 쓰일 듯하다. 18일에 태묘에 전알하고 윤음(綸音) 1,000여 자를 내렸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탐학한 관리는 내가 백성이 상하여 이를 돌보듯 하는 뜻을 몸소 실천하지 않아 반란의 경보를 울리게 하였다. 도백(道伯) 김문현(金文鉉)에게는 간삭(刊削), 벼슬명단에서 삭제을 시행하고,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격식을 갖추어 붙잡아 오고,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는 찬배(竄配)하여 민심을 위로하되, 즉시 영을 내려 백성에게 선포하라”는 것이다.

4일 庚辰. 맑았다.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현순소(玄舜韶)가 와서 묵었다. 장운(壯雲)이 그의 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기선 5척이 홍주(洪州) 내도(內島)에 정박하고 있는데, 청병(淸兵)과 우리나라 경영병(京營兵)을 싣고 있다. 말로는 동당(東黨)을 토벌하기 위해 왔다고 하고서는 병대(兵隊)들이 상륙하여 촌민을 잡아들여 무수하게 구타하고 닭과 개를 때려죽이고, 또 어선을 나포하여 아산(牙山) 둔포(屯浦)로 물건을 실어갔다”고 한다. 대개 둔포(屯浦)는 병사가 주둔하는 장소가 된 듯하며, 전선을 가설한 것은 경성과 양호(兩湖)를 연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연해 수십 리의 촌락들은 도망하고 흩어져 텅 비게 되었다. 매전(梅田) 이경전(李景典)의 편지를 보았는데, 그 사이의 서울 소식을 전하기를, “지난 30일에 초토사(招討使)가 군대를 이끌고 완영[完營, 전주감영]으로 들어가 적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소식을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자못 통쾌해 한다”라고 하였다. 비자(婢子) 갑년(甲年)의 세 살 된 딸 충업(忠業)은 사람됨이 총명하였는데, 갑자기 우물에 빠져 죽었다. 건져내어 현순소(玄舜韶)를 급히 청하여 살리게 하였으나, 야심할 무렵 끝내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참혹하고 애석하였다.

6일 壬午. 흐렸다. 저녁때쯤 비가 내렸는데 밤에 빗소리가 들리다가 새벽녘에 개었다. 비는 단비였으나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도은(陶隱)과 함께 영탑사(靈塔寺)에 올라갔다. 월해(月海)는 없었고 새로 온 스님 전법(典法)이 있었다. 전법은 개심사(開心寺) 스님인데, 며칠 전에 이곳으로 와서 괘탑(掛塔)하고 있었다. 또 늙은 비구니 1명과 여자 보살 두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세경(世卿)이 죽동(竹洞) 인씨(印氏) 집에서 심은 인삼 1그루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복용하라고 권하였다. 비록 집에서 심은 것이나 햇수가 오래되어 파는 것보다 나은 듯하였다. 나는 보익탕(補益湯)을 10첩 복용하였다.

7일 癸未. 맑았다.

세경(世卿)이 갔다. 백거(伯渠)가 와서 묵었다. 오늘 〈학질을〉 다섯 번째 치렀다. 금계랍을 복용하였는데, 어제보다 조금 많았다. 종일토록 몸의 기력이 심난하고 어지러웠다. 경영(京營) 병대(兵隊) 7~80명을 보았는데, 읍에서부터 남산로(南山路)로 나왔다. 아마도 홍주(洪州) 내도(內島)에서 상륙하여 둔포(屯浦)로 향하는 듯하였다.

9일 乙酉. 맑았다.

원회(元會)가 매전(梅田)에서 왔다. 경전(景典)의 편지를 보았다. 중국통령 섭사성(聶士成)과 제독 섭지초(葉志超)가 군대를 이끌고 우리나라로 원군을 왔다. 기선 5척이 홍주(洪州) 내도(內島)에 정박하였다. 이중하(李重夏) 영감이 협판(協辦)으로 승진하여 영접관(迎接官)이 되어 내도(內島)의 민가에 와서 묵으며 장차 아산(牙山)으로 향하려 한다. 금월 초 3일에 홍초토[洪招討, 洪啓薰]가 완영(完營)의 적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500여 명을 참수하였는데, 그들의 두목 김순명(金順明)과 14세 아이 장사(壯士) 이복룡(李福龍)이 모두 참수되고 조만간에 성을 함락할 것이라고 하니 기쁨을 감출 수 없다. 면천(沔川) 우편 이서[郵吏] 최창규(崔昌奎), 율리(栗里) 이생 방헌(李生邦憲)이 왔다. 원유(元有)가 왔다.

11일 丁亥.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밤부터 큰 비바람이 불었다.

김수용(金壽容)이 왔다. 이때 당나귀를 보내 집 아이를 데려 오려고 했는데, 집의 장정들이 모두 병들어 보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김수용을 불러 당나귀를 끌고 상경하게 하였다. 일찍 죽동(竹洞)에 갔으나 비로 지체되어 저녁 무렵에 당나귀를 끌고 왔다. 곧바로 문봉거(文峯渠)의 집으로 가서 묵고 내일 새벽에 일찍 출발할 예정이다. 집 아이에게 보내는 아홉번 째 편지를 부쳤다. 새댁이 십전탕(十全湯)을 5첩 한도로 복용하였다.

13일 己丑. 반나절은 흐리고 반나절은 맑았다.

보리를 베고 앵두를 천신하였다. 이경전(李景典)이 와서 묵었다. 들으니, “참판 엄세영(嚴世永)이 삼남염찰사(三南廉察使)에 차임되고, 판윤 이원회(李元會)가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에 차임되어, 경영병(京營兵)을 이끌고 은진(恩津)에 와서 주둔하였다. 참판 김종한(金宗漢)이 경기전(慶基殿) 어진(御眞)을 봉심(奉審)하기 위해 호남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14일 庚寅. 반나절은 흐리고 반나절은 맑았다. 보슬비가 뿌렸는데 안개 같았다.

경전(景典)이 갔다. 순좌(舜佐)가 왔다. 박원택(朴元澤)이 아산(牙山) 백석포(白石浦) 영접관(迎接官) 이중하(李重夏)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자, 이태[李台, 이중하]가 편지를 보냈는데, “호남비도[完匪]가 흥덕(興德), 무장(茂長) 등지로 달아나고 있는데 관군이 뒤쫓으면 도로상에서 민간의 폐해가 될 것 같아 행군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 텐진(天津)에 전보를 보내고 답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대개 중국 군대와 함께 진군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인(日本人)이 을유년 천진동호지약(天津同護之約)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한성(漢城)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서울 안에 자못 소요가 일었다”고 하였다. 탑동실(塔洞室)이 지난밤부터 갑자기 곽란을 일으켜 오전이 되자 발광하듯이 부르짖다가 오후가 되자 조금 회복되었다.

21일 丁酉. 맑았다.

조운포(趙雲圃),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안우경(安雨卿)이 서울에서 와서, 집 아이의 열한 번째 편지를 받았다. 김수용(金壽容)이 당나귀를 끌고 입성하였지만 집 아이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듣기에, “일본이 동호조약[同護之約]을 이유로 병사 10,000여 명을 이끌고 입성하여 남산(南山) 봉대(烽臺)에 포를 설치하고, 성을 허물어 길을 내고 그 아래에 포진하였다. 또 북악(北岳)의 산허리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포를 설치하는 등 거조가 이상하였다. 외서(外署)가 따졌으나 듣지 않으므로 온 성안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며 앞 다투어 피란하였다. 청나라 군대도 연이어 도착하였는데, 앞뒤로 6,000명이었다. 기선도 내포(內浦)에 정박하였다. 호남 동도(東徒)들이 모두 갑옷을 벗고 귀화하여 초토(招討)・순변(巡邊) 양사(兩使)가 군대를 거두어 돌아왔으나, 청나라 군대・일본 군대가 경향(京鄕)을 가득 메우게 되어 더욱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였다.

23일 己亥. 맑고 뜨거웠다.

세경(世卿)이 왔다. 석운(石雲), 도은(陶隱)과 함께 영탑사(靈塔寺)에 올랐다. 개심사(開心寺) 스님 전법(典法)이 와서 큰 방에 거주하였다. 뜰을 쓸고 물을 뿌려 자못 정결하였다. 운포(雲圃)가 와서 묵었다.

25일 辛丑. 맑고 뜨거웠다.

당진(唐津) 수령 동민(東敏)은 나의 일가이자 친구인데 이곳에 와서 여러 해가 되었다. 〈그가〉 병으로 인해 문밖을 나설 수가 없고 요즈음 병세가 위독해졌다고 하여 석운(石雲)과 함께 문병을 하기로 하였다. 도은(陶隱)・김일관(金日觀)이 갔다. 정오에 죽동(竹洞)을 지나며 세경(世卿)을 방문하자 술과 국수를 내어와 대접하였다. 도숙(道叔)을 문병하며 세 번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이미 어쩔 수 없어 가슴이 아팠다.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을 무렵 당진읍(唐津邑)에 이르러 최덕호(崔德浩)의 집에서 조금 쉬었다. 도정(都正) 성형근(成亨根)도 와서 만났다. 당진 이방(吏房) 박동중(朴東重), 호장(戶長) 김지민(金志敏), 장계훈(張啓勳)이 와서 만났다. 최덕호가 콩 죽을 내어 왔다. 본관(本官)의 맏아들 관성(觀性)이 와서 만났다. 동헌(東軒)으로 들어가 효선[斅善, 東敏字]을 보았다. 10년 동안 서로 격조했는데 악수하자 기뻤다. 그렇지만 토혈하고 하혈하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병상에 있은 듯하였다. 얼굴빛은 밝았지만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미 1년이나 앓았으며, 약물도 효험이 없었다. 노인의 혈증(血證)이 나을 전망이 없어 가슴이 아팠다. 아침과 저녁으로 밥을 대접받았고 밤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밤에 관아를 나와 호장(戶長) 집에서 묵었다. 당진읍은 모두 70호(戶)였는데 성이 모두 무너져 그 주위가 불과 수백 보에 지나지 않았다. 내아(內衙), 책실(策室)이 오래전부터 허물어져 금방이라도 수리하고 새로 지붕을 이어야 할 듯하였다. 인운거(印雲擧)도 와서 함께 묵었다.

26일 壬寅. 때때로 볕이 들다가 때때로 흐렸다. 저녁 무렵에 보슬비가 뿌렸다. 오늘도 매우 뜨거웠다.

아침에 일어나 동헌(東軒) □사헌□(思軒)으로 들어가 사선당(四善堂)에서 밥을 먹었다. 사시(巳時)에 석운(石雲)과 함께 주인에게 인사하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정오에 죽동(竹洞)에 이르자 세경(世卿)이 술과 국수를 내어와 점심을 먹었다. 도숙(道叔)이 오늘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하였다. 도숙은 사람됨이 신실(信實)하여 순경(順境)이나 역경(逆境)을 피하지 않았다. 세경(世卿)은 족당(族黨) 가운데에서 오직 이 사람과 서로 뜻이 맞아 잘 통하는 사이였다. 나도 위급할 때 그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비통하고 애석하였다. 출발하여 송학(松鶴) 동네 어귀에 이르러 석운(石雲)과 헤어져 오후 4시쯤에 집으로 돌아왔다. 고산리(高山里) 이고성(李固城) 집에서 가마꾼이 와서 탑실(塔室)의 딸아이를 데리고 갔다.

28일 甲辰. 어떤 때는 볕이 들다가 어떤 때는 흐렸다. 밤에 보슬비[微雨]가 내렸다.

이생 승서(李生升緖), 오생 복선(吳生復善)이 왔다. 경강(京江) 사람들이 많이들 배로 집안 식구를 태우고 오는 것으로 보아 서울 지방[都下]의 소요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박종헌(朴琮憲)이 왔다.

주석
노강즙(露薑汁) 밤이슬을 맞힌 생강즙. 말라리아와 한열(寒熱)에 약으로 쓴다.
상초(上焦) 삼초(三焦)의 하나. 횡격막 위의 부분으로 심(心)과 폐(肺)를 포괄하는 부위를 말한다.
경군(京軍)도 패하였다. 장위영의 대관인 선발대 이학승이 이끌고 온 군사와 농민군이 장성 월평에서 만나 4월 22일 전투를 벌인 결과 이학승이 전사한 사실을 말한다.
정도령(鄭道令), 농민군은 영광 함평에서 장성으로 진출할 때 대오를 성대하게 벌이고 정가 성을 가진 소년을 내세워 진인(眞人) 또는 도령이라 불러 민심을 선동했다 한다.
교졸(校卒) 군아(郡衙)에 속한 군교(軍校)와 나졸(羅卒)을 말한다.
고부(古阜) 도교산(道橋山) 고부(古阜) 도교산(道橋山):정읍 두승산의 줄기로 황토현의 뒷산. 무남영군의 패배를 말한다.
조지(朝旨) 어명. 조정의 지시를 말한다.
전알 전배(展拜)로 궁궐, 종묘, 문묘, 능침 따위에 참배하는 것을 말한다.
청병(淸兵)과 우리나라 경영병(京營兵) 청군의 총사령관은 제독 섭지초(葉志超)였으며 그 아래 총병 총령의 지휘관이 있었는데 통령으로 섭사성(聶士成), 마옥곤(馬玉昆), 위여귀(衛汝貴)가 있었다. 세 지휘관은 평양전투에 참여했다. 이들의 군함은 인천 앞바다인 풍도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이중하가 접반사로 갔으나 군사를 데리고 가지는 않았으니 경영병을 싣고 갔다는 기록은 오류이다.
괘탑(掛塔) 괘석(掛錫)과 같은 말로, 석장(錫杖)을 걸어 둔다는 뜻으로, 수행하는 중이 절에서 대중과 함께 지냄을 이르는 말이다.
이중하(李重夏) 공조참판인 이중하(1846~1917)가 청군의 영접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중하는 1885년 안변부사로 재직 중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가 되어 국경문제를 다루는 등 청나라와 교섭임무를 주로 맡았다.
홍초토[洪招討, 洪啓薰]가 완영(完營)의 적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500여 명을 참수하였는데, 그들의 두목 김순명(金順明)과 14세 아이 장사(壯士) 이복룡(李福龍)이 모두 참수되고 홍계훈의 보고에 따르면, 5월 초3일 동학농민군을 공격해 대장기를 빼앗고 거물급인 김순명과 나이어린 동장사(童壯士) 이복용을 사로잡아 참수했다고 하였다.(兩湖招討謄錄) 이복용은 농민군 사이에 소년장사로 이름을 떨쳤다 한다. 500여 명의 참수는 과장된 기록이다.
우편 이서[郵吏] 역참(驛站)의 하급 관리를 말한다.
천진동호지약(天津同護之約) 천진동호지약(天津同護之約):1885년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천진조약. 한쪽 군사가 조선에 출병하면 다른 쪽에 통고하기로 약조되어 있었다.
내아(內衙) 관아의 안채를 말한다.
경강(京江) 뚝섬으로부터 양화진(楊花津)에 이르는 한강의 일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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