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1일 乙亥. 무더위가 찌는 듯하였다.
승산(昇山)을 출발하여 장내촌(墻內村)에 도착하자, 도정(都正) 한붕리(韓鵬履)가 길가 가겟집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어 잠시 얘기를 하였다. 손정기(孫正基)가 기지(機池)에서 따라왔는데 이곳에서 작별하고 돌아갔다. 낮때에 한기(閒基) 안도사(安都事)의 집에 도착하였다. 방산(方山)・석운(石雲)과 사응(士應) 등 여러 종형제들이 모두 와 있었다. 윤이열(尹彛悅)과 정생 석붕(鄭生錫鵬)이 나루를 통해 서울로 가려고 이곳에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점심밥을 먹고 밀물 때를 기다려 나루로 나갔는데, 내도(內島)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달아나고 노약자는 넘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에 물어보았더니, “왜인들이 광제선(廣濟船)을 타고 와서 정박하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원근이 두려워하고 혼란해졌다”고 말하였다. 나루에 도착하여 배를 타려 하자, 사공들이 모두 죽어도 배를 움직이려 하지 않으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뱃놈이라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석운(石雲)과 여러 사람들이 갖가지로 타이르고 강압을 한 이후에야 마지못해 따랐다. 드디어 여러 사람들과 작별하고 원래의 동행과 이열(彛悅), 정생(鄭生)과 함께 배를 탔다. 바람의 기세가 불순하여 종일토록 노를 저었지만 항구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해가 떨어진 후 겨우 항구를 빠져 나왔다. 돛을 올리고 항해하다가, 삼경(三更)에 골운포(骨雲浦)에 도착하였다. 만조가 이미 지나 해안과 거리가 3리쯤이어서 개펄에 무릎이 빠져 들어갈 수가 없어, 배에서 묵었다. 날이 새고 만조가 되자 배를 옮겨 해안에 올랐다. 골운점(骨雲店)에 들어 아침밥을 먹고 출발하여 40리(里) 지나 발안리(發安里)에서 점심을 먹었다. 피란하는 사족 부녀들이 도로에 연이었는데, 모두들 당진・면천 땅을 향한다고 하였다. 대개 일병(日兵)이 아산(牙山)의 청병(淸兵)을 격파하고 군대를 돌려 서울로 향하여 수원대로(水原大路)로 줄을 이어 가면서 작폐가 파다하였으므로, 행인들이 모두 대로를 피하여 시흥(始興)으로 길을 정한 것이었다. 어떤 이는 갑신의 변란 때 우리나라의 전후영(前後營)이 일본국으로 도망해 들어갔는데, 지금의 작폐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나라 군사라고 말하였다. 자못 그럴 듯하였다. 도로에서 교리 이순명(李舜命)을 만났는데, 도보로 서울에서 오는 길이었다. 얼굴을 대하자마자 지나쳐 갔다. 추후에 들으니, 은경(殷卿)과 만나 말을 하였는데, 그 사이에 승지(承旨) 낙점을 입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종질(從侄) 유정(裕定)이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초배(超拜), 특별임명되었다고 하여 도저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었다. 밤에는 광주(廣州)의 비석거리[碑立街] 점사에서 묵었다. 발안(發安)과의 거리가 40리쯤 되었다.
초 2일 丙子.연일 새벽 안개[早霧]가 끼었다. 더위의 기세가 더욱 심하였다.
발안(發安)에서 출발하여 30리(里)쯤인 과천(果川) 안영리(安迎里)에서 점심을 먹었다. 50리를 와서 서울 남문 밖에 도착하여 형님께 인사를 하였다. 가인(家人), 문인(門人) 등이 모두 모였는데, 형님은 이미 임금께 하직 인사드리고 우선 성 밖에 머물며 떠날 채비를 하고 계셨다.
초 3일 丁丑. 혹렬한 기세가 어제와 같았다.
성 밖에 머물렀는데, 많은 손님이 와서 만났다.
초 4일 戊寅. 혹렬한 더위가 어제와 같았다. 소나기가 이따금 내렸지만 더욱 뜨거웠다.
나는 또 외독판[外督辦, 외무독판]에 제수되었다. 이러한 때 이 임무는 더욱 감당하기 어려워서 더욱 난감하여 당황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밤에 성 안으로 들어가 매동(梅洞) 승지(承旨) 집에 가서 승지댁(承旨宅)을 보았다. 간동(諫洞)에 새로 산 집에서 묵었다. 세경(世卿), 은경(殷卿), 성복(聖復)이 모두 이곳에서 묵었다.
초 5일 己卯. 혹서가 어제와 같았다. 올해의 더위는 모두들 연래에 없던 것이라 하였다.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는데, 불윤(不允)이라 비답하셨다. 계속해서 호망패(呼望牌)를 내리지 말라는 명을 내셨다. 간동(諫洞)으로 들어가 공복(公服)을 입고 예궐(詣闕)하여 숙사(肅謝)하였다. 기무처 회의소(機務處會議所)에 이르자 여러 의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오늘은 회의를 정지하고 각자 작은 절목을 내라고 하였다. 일본군이 아산(牙山)에서 개선하였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사관(士官) 등과 함께 폐하를 알현하자 삼군부(三軍府)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밤에 재동(齋洞)으로 돌아와 묵었다. 형님이 떠나신 후 나는 우선 재동(齋洞)에 머물면서 직무를 수행하는데, 평실(平室)도 머지않아 기영[箕營, 평양감영]으로 가므로 아침저녁으로 일을 할 사람이 없어 곤란하다.
초 6일 庚辰. 혹심한 더위가 어제와 같았다.
남문 밖으로 나와 평양감영으로 떠나는 종형[從兄, 金晩植]을 배웅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경기관찰사 홍순형(洪淳馨)을 방문하였다. 왕대비전(王大妃殿)께서 잠시 이곳을 방문하시었기 때문이다. 다시 외서(外署)으로 들어와서 접임조회(接任照會)를 보냈다. 유각[酉刻, 오후 6시]에 일본 공사관 서쪽 산기슭으로 갔다. 일본사람이 잔치를 크게 베풀었는데, 개선의 기쁨을 표시하는 연회였다. 우리나라 정부 회의원(會議員)도 모두 참석하자 음악대를 두고 술을 마셨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육군 소장(陸軍少將)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渭倉義昌]와 그 외 사관 수백 명이 사방으로 둘러앉아 말을 주고받으며 어울렸다. 야심할 무렵 재동(齋洞)으로 돌아왔다.
초 7일 辛巳. 혹심한 더위가 어제와 같았다. 입추절(立秋節)이다.
외서(外署)로 출근하였다. 일본의 중대(中隊), 대대(大隊) 군사 수천 명이 부산(釜山)에서 육로를 통해 올라왔다고 한다. 강화유수 하직 전에 병부를 받으라는 명[受符之命]이 있었다.
초 8일 壬午. 혹심한 더위가 어제와 같았다.
일찍 예궐하여 승정원에 패초(牌招)를 들이고 부신품(符信稟)을 받았다. 부신(符信) 〈사양〉을 계속 청하였는데,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총재대신(總裁大臣) 김굉집(金宏集)을 만났다. 사시(巳時)에 기무처 회의(機務處會議)에 참여하여 문정(聞政)하였다. 부신품(符信稟)이 내려지자 즉시 승정원으로 가서 밀부(密符) 및 판관(判官)・각진장(各鎭將)의 병부(兵符)와 마패(馬牌), 교유서(敎諭書)를 공경스럽게 받고 충훈부(忠勳府) 대청(大廳)으로 나아갔다. 조금 후 기백(圻伯), 경기감사 홍순형(洪淳馨)도 와서 교귀(交龜)하고 돌아갔다. 오늘 유증(裕曾)이 시직(侍直)으로서 사은숙배를 드렸다.
초 9일 癸未. 혹심한 더위가 어제와 같았다.
외서(外署)에 출근하자 영국 영사(領事) 가탁마[嘉托瑪, Christopher Thomas Gardner]・독일 사신(使臣) 구린[口麟, 크린]・총세무사(總稅務司) 백타간(柏妥干)이 와서 만났다. 일본 공사의 공문이 왔는데, 중국과 개전(開戰)을 선포하는 공문이었다.
초 10일 甲申. 혹심한 더위가 어제와 같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저녁 후에 독일 공사관・영국 공사관으로 갔다. 사례의 뜻을 표하고 돌아왔다. 나는 서체(暑滯)로 인해 여러 번 설사를 하여 청서양화탕(淸暑養和湯)을 복용하였다.
11일 乙酉. 혹심한 더위가 어제와 같았고 보슬비가 지나갔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가 신시(申時)에 나왔다. 종형님의 행차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하인을 보내왔다. 일행(一行)에는 성가신 일이 없으나 중국 병사 1,500명이 먼저 나와 평양(平壤)에 웅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광주유수 하인 최백룡(崔白龍)이 면천(沔川)에서 와서 원회(元會)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집안은 무고하고, 일본 군대가 매일 밤 서문 밖으로 나갔는데, 혹자는 서쪽으로 내려간 숫자가 5,000명은 된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12일 丙戌. 소나기가 크게 일었다가 해질녘에 그쳤다.
농사 형편으로 봐서는 가뭄을 걱정하는 시기인지라 기뻤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나는 서체(暑滯)로 물찌똥[水泄]을 세 차례 누어 청서양화탕(淸暑養和湯)을 복용하였고 밤에는 좌관전(佐關煎)을 복용하였다.
13일 丁亥. 비온 뒤에 더욱 뜨거웠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가 오각(午刻)에 나왔다.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오오토리(大鳥) 공사에게 사례의 뜻을 표하였다. 안석애(安石厓)가 고향으로 가는 편에 화정(花井)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14일 戊子. 며칠 사이에 뜨거운 기운이 점점 덜해졌다.
아침밥을 먹고 난 후 기무처 회의소(機務處會議所)에 나아갔다. 포각[晡刻, 오후 3시~5시]에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밤에 기영[箕營, 평양감영] 편비(褊裨) 오현기(吳顯耆)가 왔다. 종형님 김만식(金晩植)이 봉산(鳳山)에서 12일에 쓴 편지를 받았다. 중국 병사 몇 만 명이 평양에 와서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톈진(天津) 이중당[李中堂, 鴻章]의 전보 지시가 있었는데, 양서(兩西)의 도신(道臣)은 교체(交遞)를 허락하지 않으며, 만약 신백(新伯)이 온다면 거부하고 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개 우리 조정의 일이 모두 위협에서 나왔고 심복을 배치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새로 임명된 도신(道臣)의 입경(入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구백(舊伯) 민병석(閔丙奭)이 형님께 편지를 써서 잠시 머무르며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으니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부득이 정방산성[定方山城, 定은 正의 오식]으로 들어가 있으니 진퇴양난이라 한다. 걱정되어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일본군이 연이어 내려가니 도로가 막히었다. 나랏일과 민생이 모두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어찌하면 좋은가? 어찌하면 좋은가? 열 아문(衙門)의 대신(大臣), 협판(協辦), 칙임(勅任)들이여! 나는 숭정대부(崇政大夫), 대감벼슬에 관계에 올라 외무대신이 되었으니 두려움과 걱정이 더욱 심하다.
15일 己丑.
기무처 회의소(機務處會議所)에 나아갔다가 물러나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일본 서기(書記)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와서 담화를 나누었다. 이날 열 아문(衙門)의 대신과 협판이 함께 숙사(肅謝)하였다.
16일 庚寅. 맑았다. 말복(末伏)이다.
기무처 회의소(機務處會議)에 나아갔다. 물러나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미국 공사 실[施逸, Sill, John M.B.]이 왔다.
17일 辛卯. 맑았다.
기무처 회의(機務處會議)에 나아갔다. 스기무라(杉村)와 신약(新約)을 의논하였다. 물러나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기영[箕營, 평양감영] 편비(褊裨) 감찰 최영하(崔榮夏)의 가마꾼이 돌아가는 편에 13일에 나온 형님의 편지를 받았다. 아직도 정방산성(正方山城)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였다. 저녁에 또 13일에 나온 편지를 받았는데 중화(中和) 이생 정욱(李生廷郁)이 가지고 왔다. 지금은 황주(黃州) 북쪽 80리에 있는 심은사(心隱寺)로 이주(移住)하셨다. 구백(舊伯) 민병석(閔丙奭)이 청나라 진중에 구류를 당하고 청병(淸兵)이 신백(新伯)을 엿보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궁벽한 곳으로 이주하여 잠시 피한 것이다. 병기들이 가득한 땅에 떠돌아다니니 고생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오늘 아침에 홍원(洪原) 고생(高生)을 보내 형님께 올리는 편지를 부쳐 곧바로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 사이에 이주(移駐)하였다면 혹 고생(高生)이 헛걸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18일 壬辰. 맑았다.
기무처 회의(機務處會議)에 나아갔다. 물러나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스기무라(杉村)가 외서로 왔다.
19일 癸巳. 맑기도 하고 혹 흐리기도 하였다.
회의(會議)에 나아갔다. 물러나 외서(外署)로 나아갔다. 오늘・내일은 정의(停議)한다. 오늘 도목[都目, 전면적 인사임명]을 하였는데 이후 다시 이런 방식은 없을 것이다.
20일 甲午. 흐리고 찌는 듯이 덥고 때때로 비가 왔다. 가뭄 끝이라 다행이었다.
일찍이 기무처(機務處)로 나아갔다. 각부 아문(各部衙門)의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은 입시하라는 명이 내려 오전에 입시하였다. 승지(承旨)가 선칙문(宣勅文)을 읽었는데 대개 신식을 반행(頒行)하는 윤음(綸音)이다. 물러나 의정부 회소(議政府會所)로 나갔다. 나는 일본인과 담판(談辦)을 하는 약속 때문에 먼저 물러나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여러 관료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서기(書記)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외서에 와서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에 도장을 찍었다. 미국 선교사 이선득(李先得)이 외서에 와서 회견하였다. 어제 정사(政事)에서 좌랑(佐郞)이 탁지주사(度支主事)로 이름이 바뀌고 시직(侍直)은 내무 주사(內務主事)로 옮겼다. 세경(世卿), 은경(殷卿)이 초사(初仕)로서 차함(借銜)하여 빈자리가 충족되니 대정(大政), 선정이라 할 만하였다.
21일 乙未. 맑았다.
이생 정욱(李生廷郁)이 돌아가는 편에 형님이 행차한 곳으로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미국 공사 실(施逸), 러시아 공사 베베르[韋貝, Weber, K], 프랑스 공사 르페브르[盧飛鳧, Lefevres], 미국인 언더우드[元杜于, Underwood, Horace Grant]를 가서 만났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22일 丙申. 때때로 비가 내렸다.
회의소(會議所)로 나아갔다. 요즈음은 하루 1번 만남을 가졌다. 물러나 외서(外署)로 나았다. 지금부터 각 대신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 한다. 당랑(堂郞)들도 똑같이 아문에 앉아 일을 처리해야 하였다. 각사(各司)의 이예(吏隷)들 중 감원된 자의 경우는 몰골이 매우 애처러웠으며 인심도 따라서 동요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원된 자도 전대로 봉급을 받았기 때문에 원망할 정도는 아니다.
23일 丁酉. 때때로 비가 내렸다. 처서절(處暑節)이다. 찌는 듯이 뜨거웠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밤에 이현[泥峴, 진고개]으로 갔다. 면천(沔川)의 경편(京便)에 화정(花井) 평서(平書)를 보았다. 호중[湖中, 충청도] 동학(東學)이 불과 같이 날로 번창한다고 하여 걱정이 되었다.
24일 戊戌. 맑다가 때로는 흐리며 보슬비가 내렸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오늘 일본 군대가 철수하여 삼군부(三軍府)에 주둔하였다. 다만 순사(巡査) 몇 명만이 입궐해 상고하여 조사하는 일을 행하였다고 한다. 왕대비전(王大妃殿)께서 기백[圻伯, 경기감사]의 집에서 환어(還御)하셨다. 해질 무렵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소고(嘯皐) 복마(卜馬)가 돌아오는 편에 형님께서 산산(蒜山)에서 부친 편지를 받았다. 13일에 나온 것이었다. 제절(諸節)께서는 안녕하시지만 청나라 군사 10,000여 명이 평양(平壤)에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25일 己亥. 맑고 뜨거웠다. 일찍 예궐하여 탄신을 축하하였다. 물러나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일본・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 등 여러 공사와 총세무사(總稅務司) 백탁안[柏卓安, Mcleavy J. Brown]이 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다. 마부와 말, 세경(世卿)을 보내고, 장운(壯雲)과 도성(道成)에게 면천(沔川)으로 돌아가서 탑실(塔室)을 데려 오도록 하였다.
26일 庚子. 맑고 뜨거웠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물러나 외서(外署)로 나아갔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와 서기관(書記官)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외서로 와서 통공약조(通共約條)에 도장을 찍었다. 좌랑(佐郞)이 탁지(度支)의 공사(公事) 때문에 인천(仁川) 제물포(濟物浦)로 나가 전환국(典圜局)을 살펴보았다.
27일 辛丑. 맑고 뜨거웠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청나라 군대는 평양에 주둔하고 일본 군대는 송도[松都, 개성]에 주둔하며 서로 대치하여 싸우지는 않고 있지만, 양서[兩西, 황해도 평안도]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가슴이 아팠다. 관서 수령들은 모두 부임할 수가 없어 중로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하였다. 아문 협판(衙門協辦) 김가진(金嘉鎭)이 일본 대사(大使)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를 영접하러 인천(仁川)으로 나갔고 탁지부대신도 공무 때문에 인천 제물포(濟物浦)로 갔다.
28일 壬寅. 흐리고 크게 천둥이 쳤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물러나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매전(梅田)에서 오는 인편에 22일에 나온 화정의 편지를 받았다. 면천(沔川) 동학(東學)도 크게 떨치고 일어나 세경(世卿)과 박원택(朴元澤) 집의 곡식・나귀도 모두 빼앗겼다. 동도(東徒)가 우리 집에 와서 엽전 40냥을 토색하였는데, 외정(外庭)에는 사람이 없고 내간(內間)에서 돈을 모아보니 겨우 3냥뿐이어서 동도들이 받지 않고 갔다고 한다. 놀랍고 탄식할 만하다. 천구(千駒)가 통위문안(統衛文案)으로 이임[移差]되었다.
29일 癸卯.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일본 대사가 공사관에 도착하였다고 하여 비를 무릅쓰고 가서 대사(大使)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후작(候爵), 법제국(法制局) 장관(長官) 스에마츠 켄쇼(末松謙證), 식부관(式部官) 다나카 겐타로(田中建三郞), 수행원 하다카 지치부(日高秩夫), 다카하시 시게히사(高橋重久)를 만났다. 대사 사이온지 긴모치는 상훈국(賞勳局) 총재(總裁)이고, 나이가 47살인데 외견상으로는 대략 스물 몇 살쯤으로 보였다. 사역원(司譯院)으로 관(館)을 정하고, 돌아 나와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서기관(書記官)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를 방문한 다음 외서(外署)로 돌아왔다. 오늘부터 5일간 회의를 정지한다.
30일 甲辰. 때때로 큰비가 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밤에 입시하라는 명이 있어 예궐하였다. 내일 일본 대사를 접견하는 일로 하문하셨다. 탁지부대신이 인천에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