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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초 1일 乙丑. 큰비가 왔다.

일찍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예궐하여 기무처(機務處)로 들어갔다. 대후소(待候所)에 이르러 궁내 대신(宮內大臣) 보국(輔國) 이재면(李載冕), 협판(協辦) 판서 김종한(金宗漢)과 자리를 같이하였다. 하오(下午) 삼점(三點) 종이 치자 일본 대사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와 스에마츠 켄쇼(末松謙證), 다나카 겐타로(田中健三郞)가 비를 무릅쓰고 와서 대후소(待候所)로 들어오므로 다과를 권하였다. 일본 대사가 일황(日皇)이 보낸 태도(太刀) 1구(口), 화병(花甁) 1대(對)를 탁상에 늘어놓고 먼저 대내로 들이고 뒤따라 곧바로 폐하를 알현했다. 이어서 집경당(緝敬堂)으로 가서 황후(皇后)의 교지를 가지고 중궁전(中宮殿)에 알현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본국의 구규(舊規)가 아니라고 반대하였는데, 저쪽에서 완강하게 고집하며 듣지 않아서 서로 오랫동안 고집하였다. 발을 절반쯤 말아 감고 두 시녀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상태로 폐현례(陛見禮)를 행하였다. 물러나 기뻐하며 말하길, “귀국의 개벽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것은 개화 초두의 제일 요무(第一要務)이다”라고 하였다. 흥복전(興福殿)에 들러 대원군(大院君)께 인사하고 나오는데, 공사(公使)도 함께 들어갔다. 잠시 후 일본 사단장(師團長) 노즈 미치츠다(野津道貫)와 장관(將官) 3인이 대후소(待候所)에 들어왔다. 끌어당겨서 보고는 말하고 물러났는데, 내일 평양으로 출발하여 머지않아 참전을 할 것이라 하였다. 총리대신이 일본인들이 파병을 요청한 일로 인해 지나간 일을 나에게 요청하였다. 임금님께서 불러서 가부(可否)를 물었는데, 의논이 오랫동안 정해지지 않았다. 나는 밤이 깊어지자 물러 나왔다.

초 2일 丙午. 맑았다. 비온 뒤라 선선하였다.

외서로 나아갔다. 일본 대사가 재동(齋洞)으로 내방하였으나, 내가 관서에 있어 접견하지 못하였다. 저녁 무렵에 사례를 표하고 돌아왔다.

초 3일 丁未. 맑고 선선하였다.

외서로 나아갔다. 총세무사(總稅務司) 백탁안[柏卓安, Mcleavy J. Brown], 내무협판(內務協辦) 그레이트하우스[具禮, Greathouse]를 방문하였다. 일본 사이온지(西園寺) 대사가 순자(純子) 한 권을 보냈다.

초 4일 戊申.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곧이어 기무처(機務處)로 나아가 회의(會議)에 참석하였다. 신시 초에 영국 영사(領事) 가졸마(嘉拙瑪), 부영사(副領事) 구하례(具夏禮)가 폐하를 알현할 때 함께 들어갔다. 부영사(副領事)가 장차 상하이(上海)로 가기 때문에 폐하께 인사를 한 것이다. 술시 초에 일본 공사가 초대한 연회 자리에 참석하였다. 어제 고생(高生)이 황주(黃州)에서 돌아오는 편에 형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받았는데 지난달 27일에 나온 것이었다. 그 사이에 심원사(心源寺)로 옮기시고 제절(諸節)께서는 무고하시어 다행이나 정세 형편은 여전하다고 하였다.

초 5일 己酉. 맑았다.

하오(下午) 1점(點) 종이 칠 무렵에 일본 대사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와 스에마츠 겐쇼(末松謙證), 다나카 겐타로(田中建三郞), 공사(公使)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서기관(書記官)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우리나라 궁내대신(宮內大臣) 이재면(李載冕), 공무대신(工務大臣) 서정순(徐正淳), 학무대신(學務大臣) 박정양(朴定陽), 주일공사(駐日公使) 김사철(金思轍), 외무협판(外務協辦) 김가진(金嘉鎭), 참의(參議) 김하영(金夏英), 장위사(壯衛使) 조희연(趙羲淵), 경리사(經理使) 안경수(安駉壽), 경무사(警務使) 이윤용(李允用)을 맞이하여 외무서(外務)(署)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양요리(洋料理)와 본국의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초 6일 庚戌. 맑았다.

회의소(會議所)로 나아갔다. 물러나와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하오 6점(點) 종이 칠 무렵에 사역원(司譯院)으로 갔다. 일본 대사관이 오늘 우리나라 대신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푼 자리였다. 자정(子正)에 집으로 돌아왔다. 원회(元會)와 탑실(塔室)이 혼란없이 도착해 있었는데, 화정(花井)도 한결같다고 하였다.

초 7일 辛亥. 맑았다.

정부(政府) 회의에 참석하였다. 칙임(勅任) 협판(協辦) 두 자리에 결원이 생겼다. 외서(外署)로 돌아왔다. 인원회(印元會)가 올라와 면천(沔川) 소식을 들었다. 박종열(朴琮烈)도 왔다.

초 8일 壬子.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운현궁(雲峴宮)으로 나아갔다. 우석(又石) 이보국[李輔國, 載冕]이 일본 대사가 베푼 연회에 대한 답례로 우리나라 기악(妓樂)을 베풀어 즐겁게 하였다. 오늘은 의원(議員)들이 대부분 나오지 않아서 모두에게 종중추고(從重推考)가 내려졌다. 나도 그 속에 들었다.

11일 乙卯.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사이온지(西園寺) 대사가 와서 고별하였다. 즉시 사례하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스에마츠(末松)가 와서 담화하였다.

12일 丙辰. 맑았다.

러시아 공사관에 나아갔다. 러시아 황제의 탄신을 축하하였다. 회의(會議)에 참석하였다. 시직(侍直)이 심영[沁營, 강화유수영]으로 갔는데, 면천(沔川) 사우(祠宇) 행차와 내행(內行)이 본도(本道)에 머물다가 심영으로 온다고 하여 먼저 가서 기다렸다.

13일 丁巳.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곧이어 정부(政府) 회의소(會議所)로 나아갔다. 말송겸증(末松謙證)이 외서를 방문하여 얼굴을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14일 戊午. 맑았다.

회의소(會議所)로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15일 己未. 맑았다.

집 아이가 심영(沁營)에서 보낸 편지를 보고 어제 화정(花井) 일행이 심영에 도착하여 머물며 군영의 아문에 사우(祠宇)를 봉안(奉安)하는 과정에 탈이 없음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세경(世卿), 이성도(李聖道), 박진일(朴鎭一), 최덕호(崔德浩), 월해(月海) 스님이 함께 배를 타고 왔다. 평택(平澤) 홍실(洪室)이 자녀 5남매를 데리고 함께 배를 타고 왔다. 호향[湖鄕, 호남고을]에 동학(東學)이 크게 번성하여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어 모두 집을 버리고 피란하여 민심이 흉흉하다고 하니 걱정되고 걱정된다. 심영(沁營) 해군(海軍) 교사(敎師) 가례(賈禮)가 와서 만났다.

16일 庚申. 맑았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심영(沁營) 어학 교사 허치슨[轄治臣, Hutchion]이 와서 만났다. 해서[海西, 황해도]로 가는 인편이 있어 심원사(心源寺)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고 심아[沁衙, 강화도 관아]에 답하는 편지를 부쳤다.

17일 辛酉.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밤에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전언을 보내왔다.

16일에 일본 군대가 사면으로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청나라 군대 20,000명을 그 자리에서 무찔러 사상자가 무수하였다고 한다.

18일 壬戌. 맑았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일본 공사의 전보가 왔고 평양(平壤)의 군보(軍電)도 왔다. 17일에 일본 군대가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청나라 병사들 대부분이 포로가 되거나 사살되어 한 사람도 면한 자가 없었다. 조선 군대 3,000명도 그 가운데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매우 참담하였다. 일본 사람이 네거리에 방을 내걸자 우리 백성들이 청나라의 패배를 통분해하고 심지어는 방을 찢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심영(沁營)에서 오는 인편에 집 아이의 편지를 받아보고 답서를 보냈다.

19일 癸亥. 맑았다.

정부(政府) 회의(會議)에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외서로 와서 담화하였다. 밤에 부르시는 명을 받고 입궐하였다. 심원사(心源寺)로 고생(高生)을 보내어 형님께 올리는 편지를 보냈다.

20일 甲子. 맑았다. 추분절(秋分節)이다.

회의에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具禮, Greathouse]가 외서로 와서 담화하였는데, 우리나라 고용 법률 교사이다. 밤에 일본 공사단(公使團)이 와서 우리 역(曆) 17일에 일본 함대가 청나라 병선(兵船)과 대동강(大同江)에서 만나 수구(水口)에서 겹쳤는데, 청나라 병선 11척・어뢰선[水雷船] 6척 가운데 일본 군대가 청나라 선박 4척을 격침시켰고 7척은 저절로 불탔으며, 일본 선박은 모두 완전하였다고 말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침몰한 청나라 병선이 4~5척이고 일본 병선도 3척이 파손을 당하였다고 한다.

21일 乙丑.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오늘 양서 선무사(兩西宣撫使) 조희일(趙熙一), 회의소 의원(議員) 권형진(權衡鎭), 외무 참의(外務參議) 이학규(李鶴奎) 등이 난리를 겪은 백성들을 선무(宣撫)하기 위하여 관서(關西)로 출발하였다. 심원사(心源寺)로 편지를 써서 부쳤다.

22일 丙寅. 맑았다.

정부 회의(政府會議), 기무처 회의(機務處會議)에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일본 공사관으로 갔다. 심영(沁營) 편에 집 아이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23일 丁卯.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부르시는 명이 있어 예궐하였다. 물러나와 일본 공사관으로 갔다.

24일 戊辰. 맑았다. 추분절(秋分節)이다.

외서・정부(政府)에 나아갔다. 기무처 회의(機務處會議)에 들어갔다. 물러나 외서에 나아갔다. 총세무사(總稅司) 백탁안[柏卓安, Mcleavy J. Brown]이 와서 담화하였다.

25일 己巳. 맑았다.

외서・정부에 나아갔다. 예궐하였다. 밤이 깊어 집으로 돌아왔다. 시직(侍直)이 심영(沁營)에서 돌아와 집안 식구들은 탈이 없다고 하였다.

26일 庚午. 맑았다.

외서(外署)・정부(政府)에 나아갔다. 예궐하여 회의(會議)에 참여하고 물러나 외서로 돌아왔다. 영국 총영사(總領事) 힐러[Hillier, Walter C., 禧在明]・부영사(副領事) 유덕서(維德瑞)가 와서 만났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와서 담화하였다. 저녁에 서흥(瑞興)에 사는 먼 일가 준식(濬植)이 심원사(心源寺)에서 와 형님이 보내신 편지를 받았는데, 이번달 23일에 쓴 것이었다. 평양(平壤)의 일은 과연 소문대로 청병(淸兵)이 패주하고 일본인들이 성을 점령하였다. 우리나라 관민(官民)들은 텅 비었다. 일본인이 신백(新伯)이 감영에 부임해 올 것을 재촉하였으나 인부(印符)가 없어 부임할 수 없으므로 묘당(廟堂)에 따로 분부를 요구하여 얻은 이후에 부임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나는 냉체(冷滯)와 잦은 설사로 이질 증상[痢症]이 있어 고통스러웠다.

27일 辛未. 맑았다. 바람 불고 쌀쌀하였다.

정부 회의(政府會議)에 나아갔다. 외서로 나아갔다. 일본 서기(日本 書記)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외서로 와서 담화를 하였다.

28일 壬申.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평양 전보가 왔다. 어제 유시 중간에 형님이 부임하였는데, 인부(印符)가 안주(安州)에 있어 장차 찾아 올 것이라고 하였다.

29일 癸酉. 맑았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예궐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먼 일가인 준식(濬植)이 돌아가는 편에 기영[箕營, 평양감영]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주석
구규(舊規) 전에 시행하였던 규칙. 또는 전부터 있어 온 규칙을 말한다.
종중추고(從重推考) 처벌 조항에 무거운 쪽을 적용하는 것. 곧 한 사건에 여러 처벌 조항이 나열되어 있으면 가장 중한 형벌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선무(宣撫) 지방이나 점령지의 주민에게 정부 또는 본국의 본의(本意)를 권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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