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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초 1일 甲戌. 맑았다.

새벽에 외서(外署)에 갔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와서 담화하였다. 프랑스 공사관[法館]으로 가서 백이새대덕(伯爾璽大德)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영국 공사관으로 가서 총영사(總領事) 힐러[禧在明. Walter Caine Hiller]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일본 공사관[日館]으로 가서 오오토리(大鳥)와 담화하였는데, 새로 임명된 보빙대사(報聘大使) 이준용(李埈鎔)도 자리에 참석하였다. 그대로 예궐하였다가 밤에 물러났다.

초 2일 乙亥. 맑았다.

회의소(會議所)에 갔다. 외서(外署)에 갔다.

초 3일 丙子. 맑았다.

예궐하였다. 오늘 일본 공사가 개인적으로 예를 표시하기 위해 폐하를 알현하고 궁내부(宮內府)로 물러 나왔는데, 궁내대신과 내가 접대하고 회담하였다.

초 4일 丁丑. 맑았다.

일찍 외서에 갔는데,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외서로 와서 담화하였다. 일본 사람 시바 시로(柴四郞)가 와서 담화하였다. 오후에 총세무사(總稅司) 브라운[柏卓安, J. McLeavy Brown]이 와서 담화하였다. 새로 임명된 외서 고문(顧問) 미국 사람 그레이트[具禮, Greathouse]가 관서에 왔다. 술시 초에 일본 공사관 모임에 갔다. 일전에 수문장(守門將) 김기홍(金基泓)이 상소하여, 회의원(會議員) 중 8인이 일병(日兵)을 불러들여 대궐을 범하였다고 말하였는데, 내 이름도 그 가운데 들어있었다. 총리대신 이하 모두 개인처소로 옮겨 명(命)을 기다렸다. 나도 하재동(下齋洞) 윤계완(尹啓完) 집으로 옮겼다.

초 5일 戊寅. 맑았다.

윤계완(尹啓完)의 집에서 묵었다.

초 6일 己卯. 이른 아침에 우레가 크게 치고 비가 뿌리다가 곧 맑고 따스해 졌다.

소를 올렸는데 허락하지 않는다는 온화한 비답을 받았다. 저녁에 상재동(上齋洞)에 돌아와 묵었다.

초 7일 庚辰.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일본 공사가 편지를 보내 영남(嶺南) 동학의 격문을 보여주었다. 이번 달 25일에 안동(安東)에서 모여 일본 사람을 토벌하자는 것이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양호(兩湖) 동학도가 무리를 모아 서울로 향하여 보름께 서울을 범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상소인(上疏人) 김기홍(金基泓)을 법무아문에서 불러들여 조사하며 물었더니 잡아떼며 실토하지 않았는데, 오늘 형추(刑推) 시에도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나는 감기와 체증 느낌이 있어 불환금정기산(不換金正氣散)을 복용하였다.

초 8일 辛巳.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금백[錦伯, 충청감사]의 편지가 왔는데, 운현(雲峴) 어른의 효유문(曉諭文)이 내려간 후 각포(各包) 동학들이 상서(上書)하여 그들의 뜻을 얘기하는 등 귀화할 생각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정기산병양위탕(正氣散竝養胃湯)을 복용하였다.

초 9일 壬午. 맑았다. 이른 아침에 첫서리가 내렸다.

외서(外署)에 갔다. 나는 양위탕(養胃湯)을 복용하였고, 밤에 패독산(敗毒散)을 복용하였다.

초 10일 癸未. 맑았다. 춥고 이슬이 냈다.

외서(外署)에 갔다. 완영[完營의 효유인(曉諭人)]이 운현(雲峴) 어른께 상서(上書)하여, 호남(湖南) 동도(東徒)들이 효유문을 보고 모두 다 감화되어 군기(軍器)를 실어다 바치고 해산할 뜻이 있다고 하였다.

11일 甲申.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회의소(會議所)에 갔다. 저녁에 독일 공사관이 초빙하여 갔다. 기성[箕城, 평양] 비장(裨將) 서상열(徐相說)이 내려가는 편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독일 공사관에 들렀다.

12일 乙酉. 맑았다.

관서에 갔다. 저녁에 각국 공・영사를 초청하여 연회를 하였다.

13일 丙戌.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회의소(會議所)에 갔다. 동요(東擾)가 날로 번성하여 기호[圻湖, 경기도・충청도] 지방의 피란자들이 짐을 이고 지고 서울로 들어오며, 장차 〈동도〉가 경성(京城)을 침범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정부에서는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 이두황(李斗璜), 경리청(經理廳) 영관(領官) 성하영(成夏永)을 파견하되 죽산(竹山), 안성(安城)의 수령으로 제수하여 병사를 이끌고 부임하여 형편에 따라 토벌하거나 무마하게 하였고, 또 경병(京兵)을 연이어 파견하여 신림(申林), 윤웅렬(尹雄烈)로 하여금 인솔하여 내려가게 하였다고 한다.

14일 丁亥.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기영(箕營) 중군(中軍) 유기완(柳冀完), 호막[戶幕, 호장막료] 한학관(韓學官)이 내려가는 편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15일 戊子. 맑았다.

인시(寅時) 초에 일어나 마포(麻浦)로 나가 일본으로 가는 보빙대사(報聘大使) 의화군(義和君)을 전별하였다. 각부 아문의 대신(大臣), 협판(協辦), 참의(參議)가 모두 강 머리 나가 전별하였다. 오후에 다시 성으로 들어와 화동(花洞) 참의 이경전(李景典)의 집으로 갔다. 매전(梅田) 이매(李妹)가 동요(東擾)를 피하였고, 혼실(渾室)이 올라왔다. 외서(外署)에 갔다. 일본인 스키무라 후카시[杉村濬], 미국 공사(公使) 실[施逸, Sill, John M.B.], 심영(沁營) 어학교사(語學敎師) 허치슨[轄治臣, Hutchiso, W. du. F.], 외아고문관(外衙顧問官) 그레이트하우스[具禮, Greathouse]가 와서 만났다. 청양(靑陽) 동도(東徒)들이 대원군(大院君)의 효유문(曉論文)에 감동하여 온 고을 모두 귀화하였다고 한다.

16일 己丑. 맑았다.

의정부 회의에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일어 교사(日語敎師) 나가시마 이와지로(長島)(嵒)(次郞)과 소천실(小川實)이 왔다. 기영에서 10일에 보낸 네 번째 편지를 서비장[徐裨將, 감사의 보좌관]의 가마꾼이 돌아오는 편에 받았다. 좌랑(佐郞)은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는데 자친(慈親)의 회갑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17일 庚寅. 맑았다.

회의(會議)에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숙천(肅川) 신덕균(申德均) 집안사람 편에 기영으로 보내는 5번째 편지를 부쳤다.

18일 辛卯.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기영(箕營) 파발꾼이 도계 장계(到界狀啓)를 가지고 올라올 때에 11일자 기영의 편지를 받았다. 먼저 출발한 발군 편에 초 6일자 편지도 도착하였다. 들으니, 호남(湖南) 비도(匪徒)가 호서(湖西)에 급보하여 일시에 깃발을 세우고 기계를 만들며, 열읍(列邑)에 전령을 보내 식량과 꼴을 준비토록 하여 장차 경성(京城)으로 향한다고 한다. 호서관찰사(湖西觀察使)가 그 이유를 치계(馳啓)하였는데, 비도(匪徒)를 비도(匪徒)라고 감히 가리켜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기세를 알만하다. 한심하고 한심하다.

19일 壬辰.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오오토리(大鳥) 공사에게 가서 작별을 고하였는데,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20일 癸巳.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평양으로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동도(東徒)들이 호남에서 열읍(列邑)으로 통문을 보내 곧바로 경성(京城)으로 향할 것이라는 경보(警報)가 사방에서 들어왔다. 조정에서 순무영(巡撫營) 설치에 관해 논의하였는데 논의가 확정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21일 甲午. 맑았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지금부터 회의소(會議所)는 5일에 1번 회의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22일 乙未.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정부 회동에 나아갔다. 동요(東擾)가 심해져 순무사(巡撫使)로 신정희(申正熙)를 차출하고, 관부(官府)를 개설하고 병졸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23일 丙申.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영국 공사관에 갔다. 기영(箕營) 파발 편에 14일에 보낸 5번째 편지를 받았다.

24일 丁酉. 맑았다.

서리가 내려 쌀쌀하였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정부(政府) 회동(會同)에 나아갔다. 매동(梅洞) 승지(承旨)가 귀천(歸川)으로 출발하였다.

25일 戊戌. 맑았다. 상강절(霜降節)이다.

새벽에 곤전[坤殿, 왕비] 탄신에 문안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 물러나 외서(外署)로 나아갔다.

26일 己亥. 맑았다.

회의소(會議所)에 나아갔다. 의원(議員)이 반수가 차지 않아 정회를 임금께 알렸다. 물러나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27일 庚子.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어제 심영(沁營) 겸임을 체직하여 달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우선은 겸대(兼帶)하라는 비답이 내려졌다.

28일 辛丑.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정부 회동에 나아갔다. 양호(兩湖) 비도(匪徒)가 번성하여 순무영(巡撫營)에서 심영병(沁營兵) 200명을 징발하여 은진(恩津)・노성(魯城) 등지로 보내어 도적을 격멸하겠다고 상주하였다.

29일 壬寅.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심영의 중군(中軍)에게 전령을 보내 조병(調兵)하여 기한 내에 출발하게 하였다. 일본 전권공사(全權公使)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외서로 와서 담화를 하였는데 곧바로 사례의 뜻을 표하였다.

30일 癸卯.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일본 전권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오늘 신시(申時) 초에 폐하를 알현하였는데, 나와 궁내대신(宮內大臣)이 맞이하여 접대하였다. 삼남(三南)・기내(圻內)・관동(關東)의 동비(東匪)들이 한층 더 거세져 전보가 사방에서 날아들어 경병(京兵)의 파견과 일본 구원병의 요청이 연달았다. 그러나 군대가 도착하는 곳에선 비도(匪徒)들이 해산하고, 또 아침이면 동쪽에서 해산하였다가 저녁이면 서쪽에서 모이니 붙잡지 못한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호서선무사(湖西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이 청풍(淸風)의 비도(匪徒)에게 붙잡혔다고 하니 놀랍고 분하다.

주석
형추(刑推)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묻던 일을 말한다.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 이두황(李斗璜), 경리청(經理廳) 영관(領官) 성하영(成夏永) 장위영과 경리청은 서울 수비군. 남북접 농민군이 공주로 북상할 움직임을 보이자, 의정부에서는 장위영 경리청 등 모든 수도 수비병력을 투입했다. 각 부대의 장교인 영관들에게 지방 수령의 직함을 주기도 하고 현역 지방 수령을 영관으로 임명하기도 해서 전투를 지휘하게 했다. 장위영 우선봉진인 이두황은 죽산부사를 겸임하고 있었고 성하영은 처음 안성군수(뒤에 서산군수)의 직함이었다.
의화군(義和君) 이름은 강(堈). 고종의 다섯 째 아들. 1891년 의화군에 봉해졌다가 1894년 일본에 보빙대사로 가서 청일전쟁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1899년 의친왕으로 봉해졌다.
도계 장계(到界狀啓) 조선 시대에 감사가 임지에 부임하여 올리는 도착을 알리는 장계를 말한다.
호남(湖南) 비도(匪徒)가 호서(湖西)에 급보 남접의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가 연합전선을 펴고 공주로 진격한 2차 봉기 시기의 사실을 말한다. 김개남은 남원에 49일을 머물다가 청주로 진격했다.
치계(馳啓) 급하게 상주(上奏)하는 것을 말한다.
순무영(巡撫營) 농민군 토벌군을 총지휘하는 순무영 설치를 9월부터 논의했으나 결말을 보지 못하다가 10월 중순에 들어 도순무영을 설치하고 도순무사로 신정희를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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