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1일 甲辰.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회의소에 나아갔다. 밤에 영국 공사관 연회에 참석하였다.
초 2일 乙巳. 맑고 차가웠다.
외서에 나아갔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외서를 방문하여 담화를 하였다.
초 3일 丙午. 맑고 차가웠다.
외서 및 정부 회동에 나아갔다. 초혼(初昏) 무렵에 도적 7~8인이 협판(協辦) 김학우(金鶴羽)를 사저에서 찔러 죽였다. 매우 놀랍고 애석하였다. 김학우(金鶴羽)는 경성(鏡城)사람으로, 청・일(淸日) 양국과 블라디보스톡[海蔘威]에 유학하였다.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마음은 공정하고 입이 곧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면서도 인정하였다. 누가 해쳤는지도 모르니 매우 슬프고 애석하였다.
초 4일 丁未.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와서 담화를 하였다.
초 5일 戊申.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파발군이 돌아가는 편에 기영으로 올리는 8번째 편지를 부쳤다.
초 6일 己酉. 맑았다. 밤에 보슬비가 왔다. 세 달 동안 비가 오지 않다가 먼지를 축일 정도의 비가 왔다.
외서에 나아갔다. 일본 공사관에서 천장절(天長節) 연회에 참석하였다. 오늘 회의로 인해 예궐하였는데 의원(議員)이 차지 않아 정회(停會)하였다.
초 7일 庚戌. 새벽 일찍 보슬비가 뿌렸다가 저녁에는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내포(內浦) 등 여러 읍이 동도(東徒)에 의해 불태워지고 흩어지게 되었고, 태안(泰安)・서산(瑞山)의 관장(官長)들이 피해를 보았으며, 면천(沔川)의 관장은 구타를 당하고 도망쳤다.
초 8일 辛亥.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일본 공사관에 나아갔다. 밤 7시 종이 칠 무렵에 미국 공사관 연회에 참석하였다.
11일 甲寅.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도원[道園, 金弘集], 일재[一齋, 魚允中]와 함께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에게 가서 담화를 하였다. 밤이 깊어 돌아왔다. 기영(箕營) 내행(內行)의 마부 편에 10번째 편지를 받았다. 마부가 오는 길에 돌아갈 비용인 은(銀) 400원(元)을 잃어버려 길 떠날 여장을 마련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12일 乙卯. 맑고 쌀쌀하였다.
외서에 나아갔다. 누동(樓洞) 참판(參判) 집이 제주(題主)를 고쳤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심영의 병사를 조발(調發)하여 오늘 인천항에서 증기선에 태워 홍주(洪州)로 향할 예정이다. 병대(兵隊)는 300명이며 중군(中軍) 황헌주(黃憲周)가 인솔하여 간다.
13일 丙辰. 맑고 쌀쌀하였다.
외서에 나아갔다. 러시아 공관에 갔는데, 러시아 황제가 붕서(崩逝)하여 조문하러 간 것이다. 스기무라(杉村)가 와서 담화하였다.
14일 丁巳. 맑고 쌀쌀하였다.
외서에 나아갔다. 총리[總理, 金弘集] 어른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담화를 하고 저녁에 돌아왔다. 오늘은 계동(桂洞) 새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15일 戊午. 맑고 쌀쌀하였다.
외서에 나아갔다. 미시 중간에 예궐하였다. 오늘 러시아 공사를 인견(引見)하였는데, 국상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16일 己未. 맑고 쌀쌀하였다.
외서에 나아갔다. 평양(平壤) 내행(內行)이 내려가는 편에 올리는 10번째 편지를 부쳤다.
17일 庚申.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평양(平壤) 파발 편에 11번째 편지를 받았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외서로 와서 담화하였다.
18일 辛酉.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심영 병사가 인천항에서 며칠간 머물렀는데, 중군(中軍)이 몸져누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심영병(沁營兵)이 출병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군영으로 돌아오도록 명할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인천항에 전보를 보내 회군하게 하였다. 예궐하였다. 평양 서윤(庶尹) 서병수(徐丙壽)가 부임하는 편에 올리는 편지를 부쳤는데, 11번째 편지였다.
19일 壬戌. 맑고 쌀쌀하였다.
외서에 나아갔다. 예궐하였다. 심영(沁營) 편에 집 편지를 받아 보았다.
20일 癸亥.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예궐하였다. 프랑스 국서에 대한 답서를 베끼고 날인하는 일이 있었다. 호군(護軍) 백만석(白萬石)이 정본(正本)을 베껴 썼다.
21일 甲子.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상오(上午) 10점(點) 종이 칠 무렵에 정동(貞洞) 프랑스 영사관으로 갔다. 프랑스 영사 르페브르[盧飛鳧, Lefevres]에게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전하는 일 때문이었다. 외서로 돌아왔다. 하오(下午) 1시 종이 칠 무렵에 운현궁(雲峴宮)을 예방하였다. 오늘은 10부(十府) 아문 대신(大臣)들이 운현궁에 모였다. 일본인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도 참석하였다. 태공(太公)께서 여러 대신들과 이노우에(井上) 공사를 격려하였다. 흉금을 열고 상대하였으며 일처리에 대해서도 상의하여 정하였다.
22일 乙丑. 맑았다. 밤에 비가 왔다.
외서에 나아갔다. 스기무라(杉村)가 외서를 방문하여 담판(談辦)을 지었다. 저녁 무렵 남문(南門) 밖으로 나가 새로 부임하는 완백[完伯,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의 임시 거처를 방문하였다. 생질 이병계(李秉桂)가 데리고 간 하인 권응근(權應根)이 돌아와서 무사히 다다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23일 丙寅. 비가 온 뒤에 맑고 따뜻하였다.
예궐하였다. 오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경성 주재 일본군 병관 대대장[日本留住京城之兵官大隊長] 마오하라(馬屋原) 등 9인과 함께 폐하를 알현하였다. 병관(兵官) 등은 먼저 물러나고 이노우에(井上)만 머물렀다. 임금께서 불러들인 각부 아문의 대신들이 시립(侍立)하자 이노우에가 정치 9조(政治九條)를 진주(陳奏)하였다. 날이 저물어도 끝나지 않아 내일 다시 이어서 진달할 것을 아뢰고 물러났다. 심영(沁營) 편에 어제 해시(亥時) 삼각[三刻, 45분]에 며느리가 순산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쁘고 기쁘다.
24일 丁卯.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오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다시 예궐하였고 여러 대신들도 어제처럼 왔다. 이노우에가 어제 상주하지 못한 19조(條)를 계속 진달하였다. 또 자주 독립과 정치 개혁에 관한 일들을 포고하여 실시할 것을 요청하자 임금께서 모두 윤허하셨다. 조동필(趙東弼) 대감 집에서 평양으로 가는 인편이 있어 12번째로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25일 戊辰. 흐렸다. 소설절(小雪節).
외서로 나아갔다. 이노우에 공사가 와서 담화하였다. 정부에서 어일재[魚一齋, 允中]를 만나 보고 저물녘에 돌아왔다. 유원첨사(柔院僉使) 추교신(秋敎信)이 부임하는 편에 기영으로 올리는 13번째 편지를 부쳤다.
26일 己巳.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와서 담화하였다.
27일 庚午.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총리[總理, 金弘集], 궁내[宮內, 李載冕], 탁지[度支, 魚允中] 세 대신과 함께 일본 공사에게 가서 담화하였다. 날이 저물자 밥을 대접하였다. 기영에서 이번 달 초 9일에 보낸 편지를 받아 보았다.
28일 辛未.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시직(侍直)이 월곡(月谷)으로 성묘를 떠났다.
29일 그뭄 壬申. 흐렸다.
시직(侍直)이 월곡(月谷)에서 돌아와 심영(沁營)으로 떠났다. 오늘 외서에 나아갔다가 곧바로 미국 공사관・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다시 정부(政府)에 들어갔다.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입궁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예궐하였다. 이노우에(井上)가 일전에 진헌(進獻)한 20조(條)를 책자로 베껴서 바쳤다. 동궁(東宮)이 미령(靡寧)하여 주대(奏對)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