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1일 癸酉. 비가 왔다. 60일 동안 가물더니 비로소 가랑비가 왔다.
심영[沁營, 강화진무영] 지자(持者)편에 집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관서에 와서 이야기를 하였고 또 의정부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여 의정부로 갔다. 일재(一齋)도 와서 만나 함께 이야기하였다. 총리 어른과 내가 함께 부르시는 명을 받아 즉시 예궐하여 우석 어른[又石丈, 李載冕]의 처소에서 기다리다가 야심할 때 나아가 알현하고 물러났다.
초 2일 甲戌. 흐리고 추웠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미국공사 실[施逸, Sill, John M.B.], 일본 공사관 서기(書記) 사이토 슈이치로(齋藤修一郞)가 외서로 와 담화를 나누었는데, 해영[海營, 황해도감영]에도 동당(東黨)이 크게 일어났고 또 민요(民擾)가 발생하여 해백[海伯, 황해감사] 정현석(鄭顯奭)이 묶여 구타를 당하고 본관(本官)도 상처를 입었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한심하였다. 이곳은 이미 일본 군대가 가서 토벌하였으니, 아마도 세력이 마구 커지지는 않을 듯하다.
초 3일 乙亥. 맑고 추었다.
외서[外署, 외무아문]에 나아갔다. 나와 총리 어른, 탁지공(度支公)이 함께 일본 공사관에 가서 담화를 하고 돌아왔다.
초 5일 丁丑. 맑고 추웠다.
평양 파발꾼이 돌아가는 인편에 14번째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오늘 이노우에(井上) 공사(公使)를 내전에서 인견(引見)할 때 총리(總理), 궁내(宮內), 탁지(度支) 세 대신과 함께 입시하여 밤 초경[初更, 저녁 7-9시]에 물러났다. 심영(沁營)에서 온 인편에 집 아이의 편지를 보았다. 무사히 도착하였는데, 덕실(德室)이 유종(乳腫)으로 매우 고생한다고 하였다.
초 6일 戊寅. 맑았다.
심영(沁營) 지자(持者)가 돌아가는 편에 집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중군(中軍) 황헌주(黃憲周)가 병사 270명을 이끌고 수원(水原)으로 출발하였다. 신 완백[新完伯, 신임 전라감사] 대감 이도재(李道宰)를 호송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대로 완영(完營)에 주둔하며 그곳을 지킬 것이라 하였다.
초 7일 己卯.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韋貝, Waeber, K.]가 와서 담화하였다. 하오 7시에 독일 공사관이 초빙하여 갔다. 기영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평기(坪基) 이생(李甥)이 그 사이에 동도(東徒)의 난을 만나 온 집안이 욕을 당하고 깡그리 노략질을 당하였다고 하니 매우 놀랍다.
초 8일 庚辰. 맑았다.
새벽에 도둑이 내방(內房) 북청문(北廳門)을 트고 내방(內房)으로 들어와 의식(衣食), 모피류[毛物], 기명(器皿) 등을 훔쳐가서 남은 것이 거의 없으니 한심스럽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소명을 받고 예궐하였다가 밤에 물러났다. 오늘 기영에서 보낸 9번째 편지를 받았는데, 학관(學官) 한백영(韓百永)이 올라오는 편에 전해 주었다.
초 9일 辛巳.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해서[海西, 황해도]에 동도(東徒)가 크게 일어나 13개 읍이 일시에 화를 당하였고, 적의 기세는 금천(金川)까지 이르렀다.
초 10일 壬午.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총리(總理), 궁내(宮內), 탁지(度支), 장위사(壯衛使), 유 도헌(兪 都憲)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담화하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돌아와 심영 시직의 편지를 보았는데, 일가가 모두 편안하지만 덕실(德室)의 유종(乳腫)이 저절로 문드러져 고름이 몇 되나 나왔다고 하였다. 홍주(洪州) 보고서를 보았는데, 연이어 대첩을 거두어 내포(內浦)의 적세가 조금 쇠퇴하였다고 하였다.
12일 甲申. 맑았다.
기영 파발꾼이 돌아가는 편에 15번째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이노우에(井上) 공사(公使)가 일본 육군 소좌(少佐)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와 함께 폐하를 알현할 때 나와 궁내(宮內), 총리(總理), 탁지(度支), 군무 서리(軍務署理) 등 5 대신(大臣)이 함께 입시하였다.
13일 乙酉.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의정부로 가서 총리(總理), 궁내(宮內), 탁지(度支), 군무(軍務) 대신(大臣)과 함께 서언(誓言)에 서명하였다. 기영에서 보낸 두 번째 편지를 받았다.
14일 丙戌. 맑았다.
오늘 러시아 황제 즉위를, 직접 대면하여 치하하시는 일로 러시아 공사(公使)를 인견(引見)할 때 궁내대신(宮內大臣)과 함께 입시하였다. 이를 파한 후인 하오 5시에 여러 대신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갔다.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와 만났는데, 금릉위는 오늘 관직을 회복한다는 명을 받았다. 갑신(甲申)년의 여러 죄인의 죄명을 모두 지워버렸는데, 그 부형(父兄)들도 아울러 복관되었다. 면천 하인 송광록(宋光祿), 고국연(高國淵)이 왔기에 그간 겪은 동요(東擾)에 대해 물어 보았다.
15일 丁亥. 맑았다.
기영(箕營) 파발꾼이 돌아가는 편에 16번째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예궐하였다가 밤에는 훈동(勛洞)으로 갔다.
16일 戊子. 맑았다.
심영(沁營) 인편으로 편지를 부쳤다. 외서(外署)로 나아갔다. 의정부로 가 여러 대신과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와서 만났다. 남촌(南村)으로 가 금릉위(錦陵尉)를 방문하였다. 최성학(崔成學)이 와서 시직(侍直)의 편지를 보았는데, 덕실(德室)의 유종(乳腫)이 여전하다고 하였다.
17일 己丑. 맑았다.
의정부에 갔다. 기영(箕營) 인편에 17번째 올리는 편지를 부쳤다.
18일 庚寅. 맑았다. 추위가 시작되었다.
최성학(崔成學)이 돌아가는 편에 시직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외서(外署), 정부로 나아가 탁지(度支)를 만났고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와 담화하였다. 궁내부(宮內府)에 가서 우석[又石, 李載冕]과 함께 집경당(緝敬堂)으로 향하여 석파 어른[石坡丈, 大院君]을 알현하였으며, 함화당(咸和堂)으로 나아가 알현하고 물러났다.
19일 辛卯. 맑고 추웠다.
오늘 일을 어제 일로 잘못 기록하였다.
20일 壬辰. 흐리고 추웠고 밤에는 눈이 왔다.
외서(外署), 정부로 갔다. 심영의 집 아이 편지를 받았다.
21일 癸巳. 눈이 온 후에 맑고 매우 추웠다.
심영의 관예(官隷)가 돌아가는 편에 집 아이에게 보내는 답서를 부쳤다. 심영 전문서리(箋文書吏)가 와서 집 아이의 편지를 받았다. 외서(外署)로 나아가서 이노우에 공사(公使)와 회담하였다.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예궐하였다. 임금께서 함화당(咸和堂) 대청 남면 자리에 나아가셨다. 총리(總理)・궁내(宮內)・외무(外務)・탁지(度支)・학무(學務) 대신(大臣), 궁내협판(宮內協辦) 유 도헌(兪都憲)이 함께 입대(入對)하였다. 신규(新規)에 대한 재가가 있었는데, 전교(傳敎)를 칙령(勅令) 제 몇호[第幾號]로 바꾸었다. 총리대신이 기초하여 적어 올리자 임금께서 서압(署押)을 하셨고, 여러 대신들도 서명하고, 국보(國寶)를 찍었다. 이날 박영효(朴泳孝)를 내무대신으로, 이중하(李重夏)를 협판(協辦)으로, 조희연(趙羲淵)을 군무대신으로, 권재형(權在衡)을 협판(協辦)으로 삼았다. 서광범(徐光範)을 법무대신으로, 정경원(鄭敬源)을 협판으로 삼았다. 신기선(申箕善)을 공무대신으로, 김가진(金嘉鎭)을 협판으로 삼았다. 엄세영(嚴世永)을 농상대신(農商大臣)으로, 이채연(李采淵)을 협판으로 삼았다. 이완용(李完用) 외무협판(外務協辦)으로, 안경수(安駉壽) 탁지협판(度支協辦)으로, 고영희(高永喜)를 학무협판(學務協辦)으로, 윤웅열(尹雄烈)을 경무사(警務使)로 삼았다. 승선원(承宣院), 공사청(公事廳)을 모두 혁파하였다. 궐내외의 각 군영(軍營)은 모두 군무아문에 예속시켰다. 영사(營使), 병방(兵房)을 모두 감하(減下)하였다. 중추원 회의소(中樞院會議所)를 설치하고 의장(議長)을 두었는데 김병시(金炳始)이하 30명이었다.
22일 甲午. 맑고 매우 추웠다.
심영의 이서가 돌아가는 편에 집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술시 초에 러시아 공관의 초청을 받고 갔는데, 오늘이 곧 러시아 황제의 천추절(千秋節)이기 때문이다.
23일 乙未. 맑고 추웠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내알현(內謁見) 공고(公故)로 인해 궁내 대신(宮內大臣)과 함께 입참(入參)하였다가 저녁 무렵에 물러났다.
24일 丙申. 맑고 추웠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의정부와 탁지부를 방문하여 탁지대신(魚允中)과 함께 일본공사관으로 가서 영・호남의 진자 차관에 관한 일[嶺湖賑資借款事]을 의논하였다. 심영(沁營) 좌마(坐馬)가 올라오는 편에 집 아이의 편지를 받았다. 교리 홍은보[洪殷輔, 思弼]가 심영(沁營)에서 왔다.
25일 丁酉.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예궐하여 궁내대신(宮內大臣)과 함께 일본 공사의 내알현(內謁見 )공고(公故)가 있을 때에 참여하였다. 중관(中官)인 공사청(公事廳)을 새로 혁파하였는데, 내일 종묘(宗廟)에 거둥(擧動)하는 절차에 공사(公事)를 출납하는 인원이 없어 일이 매우 곤란하였다. 따라서 특별히 칙지(勅旨)를 내려 궁내(宮內) 제도를 정리하여 바로잡을 때까지 봉공중관(奉公中官)이 우선 옛날 그대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26일 戊戌. 맑았다. 동지절(冬至節).
오늘은 곧 대가(大駕)가 종묘(宗廟)로 가서 맹서를 고하는 날이다. 정오에 조복(朝服)을 입고 태묘[太廟, 종묘]에 가 탁지군막(度支軍幕)에 앉았는데, 갑자기 임금께서 풍단(風丹)에 걸려 얼굴이 뜨고 붉어져 찬바람을 쐴 수 없어 다른 날로 물려서 행하라는 영을 내려 즉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누동(樓洞)으로 가 제3종형님[第三從兄主]의 사우(祠宇)에 참배하고 외서(外署)로 나아갔다가 저녁 무렵에 돌아왔다.
27일 己亥.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왔다.
심영(沁營) 좌마(坐馬)가 돌아가는 편에 집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어제 가평(加平) 이랑(李郞) 내외의 편지를 보았다. 기영(箕營) 파발이 돌아가는 편에 18번째 편지를 부쳤다. 미국 공사(公使)와 총세무사(總稅務司)가 외서(外署)로 와서 담화하였다.
28일 庚子.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와서 담화하였다. 인택여(印澤如), 강만복(姜萬福)이 심영에서 와서 집 아이의 편지를 받아보았다.
30일 壬寅. 흐렸다. 밤비 소리가 들리더니 새벽에 갑자기 눈이 되었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