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영내찰(錦營來札) 도원(道園)
≪주신 편지를≫받고 맑은 가을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대감의 형편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부(交符, 병부(兵符)를 주고 받는 것)는 어느 날입니까? 매우 위로가 되고 잘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피곤하고 바쁘니 괴로움을 어찌 하겠습니까? 간략히 하고 이만 줄입니다.
1894년 8월 21일 아우 김홍집(金弘集) 올림.
천안(天安)의 일본인이 만든 명안(命案)도 뜻밖의 일입니다. 보내주신 기록은 외무대신(外務大臣)에게 보내어 의논하였는데, 그 답장이 이와 같으니 보고 헤아려 주시고, 보첩(報牒)으로 외서(外署, 외부아문)에 제부(題付)할 계획입니다. 천안의 명안(命案)을 초록(鈔錄)한 것은 스기무라후카시(杉村濬)가 마침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소매에 넣어가지고 가서 사람을 보내 정형(情形, 사정)을 탐문하여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소인(小人)이 아룁니다.
어제 주신 편지를 받고 그 사이에 이미 감영에 가느라 피로한 뒤에도 대감이 지내시는 형편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어지러운 때에 새로운 일로 매우 괴로우시리라 여겨져서 도리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저는 매우 피로하고 병이 빈발하니 괴롭고 가련함을 어찌 하겠습니까? 매우 바빠서 이만 줄입니다.
9월 3일 아우 김홍집 올림.
협지(夾紙, 따로 적은 쪽지)에서 말씀하신 것은 잘 알았습니다. 동요(東擾)는 끝내 방법을 마련해서 그치게 하겠습니까? 선무(宣撫)대감은 지금 어느 곳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청곤(淸梱, 청주 병사(兵使))이 장수의 방략(方略)을 자부하기에, 떠날 때에 순영(巡營, 감영)과 상의하여 기미를 보아 가장 불량한 자를 체포하고, 법을 세워 처벌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정말 왕복(往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을≫구제하고, 처벌할 방도를 도모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노성(魯城)의 일은 참으로 억울할만합니다. 호남의 10여개 읍의 수령은 나문(拿問)만 하였으며, 이 읍들의 수령이 파직된 것은 공론(公論)이 아닙니다. 다만 방법을 생각할 계획입니다.
오늘 오후에 한쪽의 작은 편지를 받아보니 급보여서 곧바로 외서(外署)에 주어 일본 공사관에 보내어 알려주었습니다. 선봉장(先鋒將, 李圭泰)이 내일 떠나는데, 인솔하여 가는 군대는 교도병(敎導兵) 200명과 통위병(統衛兵) 200명을 합한 400명입니다. 일본공사관이 파견한 사관(士官) 2명이 약간의 병사를 인솔하여 교도병과 함께 가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편지로 외서가 나에게 교도병 200명을 요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번에 해당 사관(士官)이 절제(節制, 지휘)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내게 병법(兵法)을 아는 장수가 없어 군대에 기율(紀律)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이 교도병 200명이 의심할 것 없이 힘이 될 것입니다.
일본군을 많이 파견해줄 것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일본 공사는 여전히 신중하여 많이 파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일본과 청국간의 전쟁이 지금 한창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군이 이미 봉황성(鳳皇城, 皇은 凰의 오기)을 점거하였고, 해군도 여순(旅順, 중국 요동반도에 있는 항구)의 입구를 빼앗아서 승리는 머지않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각국의 병함(兵艦)이 모두 위해(威海)에 모여 이 전쟁이 결정된 뒤에 바로 모두 일어나서 화약(和約)을 권유할 것입니다. 이 화약이 이루어져서 육군 100,000명이 개선하는 날에 기세가 미치면 비도(匪徒)도 두려워서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며칠을 기다려야 되므로 매우 관심 있는 일입니다. 청영(淸營, 청주 감영)의 영관(領官)이 싸움에서 죽어 매우 원통합니다. 80명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서 죽었습니까? 참담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아우 홍(弘, 홍집) 올림. 9일 밤.
덕산(德山)과 부여(扶餘)의 ≪수령을≫논파(論罷)한 계본(啓本)이 한양에 도착했고, 태안(泰安)과 서산(瑞山)의 일에 관한 계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홍주(洪州)의 일은 어떻게 견디고 있습니까? 강화 진무영의 군대는 어제 이미 배를 출발하였으니 내일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28일과 29일에 연이어 편지를 받으니 고맙습니다. 태공(太公, 흥선대원군)에게 올리는 편지와 부본(副本)을 모두 읽었습니다. 비도(匪徒)의 실정(實情)을 갈수록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크게 징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제 의정부(議政府)에서 순무사(巡撫使)를 만나 상의했습니다. 이규태(李圭泰)를 선봉으로 삼아 통위영(統衛營)의 병사 2중대 560명을 인솔하여 공주(公州)와 청주(淸州)를 향해 먼저 출발하도록 한 초기(草記)는 며칠사이에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을 다시 빌려서 보내도록 두서너번 말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걱정할 것이 못된다. 당신들의 군대가 먼저 출발하고, 우리는 기미를 살펴서 대처할 것이다. 비도를 토벌하는 일은 그들이 담당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산(釜山)의 일본군도 진주(晋州)와 하동(河東)을 향해 가서 호남으로 들어가 석권(席卷)한 뒤에 북상(北上)할 계획입니다. 경병(京兵)이 떠난 뒤에 그 동정을 바로 알려주십시오. 지금 수원(水原)의 비괴(匪魁) 김내현(金鼐鉉)등 2놈을 압송하여 바로 벨 것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기내(畿內)가 깨끗해지고, 호남의 비도가 그것을 듣고 기세를 잃을 것입니다. 일본군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 압록강 북쪽에 있는 성)을 점거하였고, 안동현(安東縣)에서 청군과 일전(一戰)을 치루려고 합니다. 각 나라의 병함(兵艦)이 모두 여순의 입구에 모여 이 싸움 뒤에 일제히 일어나서 싸움을 조정하여 화약(和約)을 맺을 것입니다. 이노우에(井上馨)가 온 것은 우리나라를 위해 조약을 개정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두 헤아려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손님을 대하느라 바빠서 대충 씁니다. 이만 줄이며 답장을 올립니다.
홍집 올림. 10월 3일
5일과 6일에 보낸 편지는 어제 이미 다 보았습니다. 각 처의 비요(匪擾)가 근래에 더욱 심합니다. 이런 때에 심신(心身)이 모두 피로하여 어찌 근심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임중군(任中軍)은 이미 내려갔는데, 힘을 얻어 스스로 지킬 수 있다면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청대(淸隊, 청주진남영의 군사) 80명이 죽음을 당한 것은 매우 참담합니다. 서산(瑞山)의 수령이 해를 입어 읍의 아전이 전패(殿牌)를 지고 한양에 와서 이미 상세히 듣고 출대(出代, 후임을 보내는 것)하였습니다. 전 안성군수(前 安城郡守) 성하영(成夏泳)은 경병(京兵)을 나누어 인솔하여 가서 비도를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태안(泰安)도 상서롭지 못한 소문이 있고, 전해들은 얘기가 상세하지 않아 매우 울적합니다. 옥천(沃川)과 목천(木川)의 ≪일로≫ 병사(兵使)는 이미 파직을 아뢰었는데,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자입니까? 선봉은 어제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교도병(敎導兵) 200명을 일본 사관(士官)이 지휘하고, 다시 통위병(統衛兵) 200명이 함께 갔습니다. 일본군 3중대(中隊)는 내일 이어서 출발하는데, 그 정록(程錄)을 보내드립니다. 3도(三道)에 모두 위무사(慰撫使)를 보냈습니다. 호남은 이선무사(李宣撫使, 李道宰)에게 다시 신임 감사의 직을 주어 겸임하게 하였고, 호서(湖西)는 한양에서 파견하여 일본군의 뒤를 따라 가게 하려는데, 박제관(朴齊寬)대감이 지금 물망에 올랐다고 합니다. 지금 대규모 부대(部隊)가 이어서 진군하면 각 처의 비도는 멀지 않아 흩어질 것이나 미리 출발하지 못하여 관(官)과 백성으로 하여금 비도의 해독을 당하게 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심병(沁兵, 강화 진무영)이 정말 경병(京兵)보다 먼저 내포(內浦)에 도착했는지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별지는 일본 소위(少尉)와 1대(一隊)의 병사가 계속 주둔하여 도와주기를 청하는 것으로 이미 외서(外署)에 보냈고, 일본 공사에게 전하여 알릴 계획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아우 홍(弘) 올림. 10월 12일 밤.
보내주신 편지는 이미 태공(太公)께 드려서 작은 쪽지의 답장을 함께 보냅니다.
금백(錦伯, 충청 감사)의 편지를 상세히 모두 들었다. 단지≪해놓은 것 없이≫헛되이 늙는 것을 탄식할 뿐이다. 순무영(巡撫營)에 근래 재물을 모아 보낸 것이 많으나 아직도 출정(出征)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일각(日刻, 짧은 시간)이 걱정스러우니 이 편지를 해당 영에 보내기를 바란다.
김주사(金主事)가 보낸 편지를 받고 모두 알게 되어 기쁩니다. 호남에 갔다가 이미 돌아왔는데, 호랑이 굴을 출입하는 것처럼 매우 위험합니다. 어느 날에 돌아오게 되어 한양으로 향한다고 합니까? 정신이 산란하여 따로 답장을 하지 못했으니 이 편지를 전해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유도헌(兪都憲, 도헌은 대사헌의 별칭. 유길준을 말함)은 13일에 동경(東京)을 거쳐서 출발하여 며칠 뒤에 귀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홍(弘)이 다시 씁니다.
9일과 12일 2차례의 편지를 어제 받아 보았으나 매우 기뻐서 답장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조카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의 편지를 얻어 보고 남쪽의 변고가 더욱 위급하여 그것 때문에 근심스럽습니다. 조카님이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호)이 있는 곳으로 가기에 한편으로는 일본 대사관에 알리고, 다른 한편으로 순무영(巡撫營)에 알려 이미 출발한 군대를 재촉하여 빨리 가게 했습니다. 귀영(貴營)이 지킬만한 성(城)이 없으면 산성(山城)의 입보(入保)는 스스로 마련하고, 청주에 머무르고 있는 경병(京兵)은 더욱이 이동을 계청(啓請)하였으며 선봉군과 일본군도 며칠내에 차례대로 도달할 것입니다. 군대의 행군이 느린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조카님이 보고 들은 것을 대신 말할 것입니다.
심병(沁兵, 강화 진무영)은 영관(領官)이 병이 났기 때문에 다시 지체되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일본군이 이미 3갈래로 길을 떠났고, 이노우에(井上馨)가 장담하기를, “동학은 그들이 담당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일본군이 만약 영내에 도착하면 비도(匪徒)가 몇 만이더라도 두려워서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병(土兵)의 조련은 다행스러울 만합니다. 식량은 우선 공전(公錢)과 공곡(公穀)을 급한대로 사용한 뒤에 보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새로 임명한 수령은 계속 빨리 갈 것을 재촉하나 늘 떠나는 것이 늦어져서 개탄스럽습니다. 군대 뒤를 따라 떠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기계(機械)를 잃어버린 읍은 단지 병사(兵使)를 논파(論罷)하고 아직 후임을 보내지 못했는데, 대감의 분부를 기다렸다가 결정할 계획입니다. 헤아려서 다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병사의 편지를 보고 돌려드립니다. 밤이 깊어 대충 씁니다. 이만 줄입니다.
10월 15일 아우 홍(弘)이 답장을 올립니다.
금백(錦伯, 충청감사)도 편지를 보낸 뜻이 있어 정말 편한대로 실행하도록 답장을 하였습니다. 호서(湖西)로 말한다면, 군대를 마련하여 주둔해서 지켜야 합니다. 군량은 세미(稅米)에 의지하여 수량을 1,000포(包)에 한하여 쌀을 거두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헤아려서 답장을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소인도 군대를 마련하도록 제시하겠습니다.
17일의 편지를 받아보고 모두 알았습니다. 남첩(南諜)을 이미 체포하였으니 북당(北党)도 해산하면 초미(焦眉)의 위급함을 덜 수 있습니까? 선봉과 함께 간 일본군이 지금 금강(錦江)에 도착했을 것인데, 이것은 서쪽길입니다. 가운데 길은 교도병(敎導兵)과 일본군이 함께 갔고, 동쪽 길은 일본군 2중대가 연달아 갔습니다. 그 위세가 크게 떨치어 호서의 비도는 걱정할 만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렇게 합세하여 호남으로 향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대소(大䟽)가 이미 철회되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태공(太公)이 곧 이 상소를 보고 바로 받아들이려고 했기 때문에 제가 힘껏 만류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어찌 갑자기 바꾸어 인심을 동요시키겠습니까? 며칠을 기다려서 3 갈래의 군대가 합세하여 남하한 뒤에 의논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뜻을 헤아려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10월 20일 아우 홍(弘)이 답장을 올립니다.
근래에 기계(機械)를 잃어버린 읍의 수령은 단지 병사(兵使)의 계본(啓本)을 보고 모두 후임을 내지 않았습니다. 대감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8일 2차례의 편지는 어제 이미 받아보았습니다. 기계를 잃어버린 읍은 병사(兵使)의 계본(啓本)에 따라 갑자기 개결(開缺, 관리의 면직과 충원)을 할 수가 없고, 순영(巡營, 감영)의 논파(論罷) 여부를 기다려서 결정해야 합니다. 연기읍(燕岐邑)은 이경희(李景熙)를 후임자로 할 계획입니다. 아직 부임하지 않은 신임 관리는 모두 엄중히 재촉해야만 합니다. 절기에 따라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22일 아우 홍(弘)이 답장을 올립니다.
성하영(成夏永)의 군대는 감영에 도착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고, 선봉과 일본군도 이미 도달한 것 같습니다. 이제 근심이 없게 되고, 남쪽의 비도가 두려워서 숨기를 바랍니다.
대소(大䟽)는 그저께 이미 비답(批答)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비도를≫절제할 방안이 생겨서 급급하게 다시 사직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서(湖西)의 한쪽이 조금 안정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영읍(營邑)의 경계가 풀린 뒤에 서서히 생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른 아침에 20일 밤의 편지를 받았고, 조카님이 다시 운현(雲峴, 운현궁의 흥선대원군)의 편지를 가져와서 모두 읽어보고 다 알았습니다. 순무영(巡撫營)과 외서(外署)의 편지도 보냈는데, 편지를 보신 뒤에 다시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천안(天安)에 머물던 군대는 이미 도착했습니까? 선봉도 자유롭지 않아 스즈키(鈴木彰) 병관(兵官)에게 부탁하여 각 처의 병관에게 급히 알려 나가도록 재촉하여 바로 질러가서 잘못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헤아려서 재가해 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오후에 이노우에(井上馨)가 대궐에 왔을 때에 대면하여 일본군을 금영(錦營, 충청 감영)에 빨리 오도록 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이미 사람을 파견하여 급히 명령을 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등보(謄報, 원본을 베껴서 보고한 것)를 뽑아서 보여 주었습니다. 전괴(全魁. 전봉준)에게 격문을 전달하고, 비괴(匪魁) 2명을 효수(梟首)하여 경계하는 부분을 언급하며 내가 “이 도백(道伯, 감사)이 적을 토벌하는 것에 엄중하기가 이와 같은데, 어찌 급히 구제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더니, 이노우에(井上馨)가 말하기를, “이런 죄를 지은 범인은 일본군에게 주어 한양(京師)으로 압송하여 조사해서 처결하고 급히 참수(斬首)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혹시 나중에 긴밀한 범인을 잡으려는 것이니 절대로 급히 참수하지 말고 압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23일 밤에 아우 홍(弘) 올림.
23일 밤의 편지를 받고 알았습니다. 보은 수령이 왔을 때에 천안(天安)의 군대가 영내(營內)로 출발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미 도착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비도(匪徒)의 기세가 위축되어 정말 물러갈 만합니까? 순무사(巡撫使, 신정희) 영감이 일본군에게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온 편지를 운양(雲養, 김윤식)에게 보냈는데, 그 답장이 이와 같습니다. 대감께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10월 25일 밤. 아우 홍(弘) 올림
동영(東營, 어영청 총융청 등의 분영)에서 바꿔 사용한 청나라 군대의 은표(銀票) 700냥은 어제 의정부에서 행문(行文, 관아에서 문서가 오고 가는 것)하였으니 가까운 시일에 교부(交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머지않아 24일 밤의 편지를 받고, 저녁에 다시 25일 오후에 도착한 조카님의 편지를 받아 보았습니다. 24일의 일은 참으로 위태롭습니다. 경병(京兵)과 일본군이 다행히 저물녘에 도착하여 이튿날 아침까지 격렬하게 싸워 오히려 적을 몇보 퇴각시켰다고 합니다. 각 처에서 오는 군사가 차례대로 바로 와서 우리의 기세는 점점 더해지고 적은 두려워서 도주하기를 두손 모아 빕니다. 신중하여 자애(自愛)하시기를 바랍니다.
10월 28일 밤. 아우 홍(弘) 올림.
소회(少晦, 그믐 전날)의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잘 알았습니다. 연산(連山)의 나중 소요는 매우 놀랄 만합니다. 이 읍은 지금 정대위(丁大緯)로 결원을 보충했는데, 그 사람됨이 쓸만한 것 같습니다. 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경병(京兵)은 이미 군산(群山)의 적을 격파했습니까? 홍주(洪州)의 유병(儒兵)이 정말로 세력이 강대해져서 이미 박도헌(朴都憲)에게 맡겨 편지를 주어 단속하게 하였으나 순영(巡營)에서도 편지로 독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귀영(貴營) 장졸(將卒)의 논공(論功)은 틈을 내어 분부하신대로 ≪임금께≫ 아뢸 계획입니다. 구완희(具完喜)를 순무사(巡撫使)에게 부탁하여 참모(參謀)로 삼아 이인(利仁)에 보내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미 2곳의 관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감께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우 홍(弘) 올림. 3일 밤.
19일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선봉군과 일본군이 호남을 향해 떠났고, 현재 귀영(貴營, 충청감영)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군이 100명에 불과하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여 어제 스기무라(杉村濬)을 보고 그것을 말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병관(兵官)이 보내온 편지를 받았는데, 100명의 병사로도 지킬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정말입니까? 멀지 않아 홍주(洪州) 목사(이승우)가 순무사에게 보고한 것을 보니, “임천(林川)과 홍산(鴻山) 등지에 지금 비당(匪党)이 있어 경병(京兵)이 내려와서 도와주기를 바라지만 ≪병사를≫징발하여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아 매우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보내온 편지들, 장위영(壯衛營)과 경리청(經理廳)의 행군기율(行軍紀律), 순속신사(洵屬信史), 전종 천안수령 (前從 天安守)의 독유심인필기(讀有心人筆記) 등은 사료(史料)로 구비할만하여 관보(官報)에 넣어 발간하려고 했으나 의논들이 일정하지 않아 그만두었습니다. 음성(陰城)은 백성의 소송(訴訟)이 계속되고 있고, 결성(結城)은 장민(狀民)이 1달 동안 괴롭게 소송을 하여 법을 어겨 계속 요청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임기준(任基準)이 만약 온다면, 비록 일본인이 풀어주기를 요청하더라도 그대로 가두어두고 기다리십시오. 제가 근래에 겪은 것이 더욱 난처합니다. 죽는 것을 구할 수는 없다고 하는 옛사람의 말이 허튼 것이 아닙니다. 절기에 따라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동지(冬至) 전날밤 아우 홍(弘) 올림.
멀지 않아 23일 밤의 편지를 받으니 매우 고맙습니다. 서천읍(舒川邑)이 소실된 것은 경악할 만합니다. 유병(儒兵)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다행히 성하영(成夏永)이 마침 와서 비도를 추격하여 격퇴하였습니다. 다시 화성(華城)의 전보를 받고, 바로 귀영(貴營, 충청감영)이 보내온 편지에 각 영의 군대가 이미 전주의 경계로 향하였고, 완영(完營, 전주 감영)의 길이 비로소 열려 신임 감사(이도재)도 경계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다만 금산(錦山)과 용담(龍潭) 등지가 도륙을 당했다니 매우 참담합니다. 전의(全義)의 조방장(助防將)은 실로 아낄 것이 아니지만 이런 직함 때문에 시끄러워 혐오할 만합니다. 귀영(貴營)이 기미를 보아≪이 직함을≫주어 절제하여 성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대감께서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동지(冬至) 다음 날 밤. 아우 홍(弘) 올림.
9일 오후의 편지를 읽고 ≪모든 것을≫잘 알았습니다. 이 날에 정말 크게 이겼다니 매우 축하를 드립니다. 멀지 않아 다시 이두황(李斗璜)이 해미(海美)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 홍주(洪州)목사도 논산(論山)에 진격하여 이겼는지 다시 걱정스럽습니다. 일본 병관(兵官)은 이미 이전의 의심을 모두 풀었습니다. 송아무개(송정섭)가 지금 법무아문(法務衙門)에 있어 이들을 조사하면 설령 무고(誣告)를 하더라도 어찌 걱정을 하겠습니까? 절기에 따라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11월 13일 밤. 아우 홍(弘)이 답장을 올립니다.
어제 14일에 보낸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잘 알았습니다. 12일의 대승(大勝)이후에 각 군대가 다시 진격하여 남은 비도(匪徒)를 섬멸했습니까? 어제 화성(華城, 수원)의 전보를 받아보았는데, 김개남(金開南)의 무리가 청주 가까이에 왔다가 병사(兵使)에게 격퇴를 당하여 죽은 자가 매우 많다고 하니 또한 유쾌할 만합니다. 혹시 김적(金賊, 김개남)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특별히 3일 관보(官報)를 보내드립니다. 어찌하여 사실을 잃어 버려서 군심(軍心)의 이런 변화를 초래합니까? 군율이 엄중하지 않은 것도 개탄할 만합니다. 순무사(巡撫使)에게 보내어 그 답장을 보내니 보시기 바랍니다. 홍주의 군대는 그 사이에 정말 논산(論山)을 협공하여 승리를 얻었는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저는 근래에 겪은 것이 갈수록 난처하니 어찌 하겠습니까? 대감께서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11월 17일 밤. 아우 홍(弘) 올림.
그저께 천안(天安) 수령이 편지로 보고하였는데, 논산(論山)의 적이 물러갔으나 한산(韓山)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며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형편은 정말 어떠합니까? 지금 순무사(巡撫使)의 지시를 보니 선봉장(이규태)을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하고, 이두황(李斗璜)은 전공(戰功)에 따라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계차(啓差, 임금께 아뢰어 임명하는 것)할 것이라고 하는데, 따라서 전공을 다투는 탄식은 없게 됩니까? 법무(法務)의 이참의(李參議)와 의정부 주사(議政府 主事) 최석민(崔錫敏)이 지금 공무(公務)로 내려가니 대접하여 전후의 싸움에 관한 사실을 상세히 조사해서 실상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아우 홍(弘) 올림. 11월 21일.
서양근(徐楊根, 양근 수령인 서씨)이 아뢴 것은 이미 아셨으리라 여겨지나 어제 가서 틈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습니다. 금백(錦伯, 충청 감사)의 편지 2건을 함께 보신 뒤에 돌려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오늘 연이어 3번의 전보를 받아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안괴(安魁)는 이미 풀어주어 돌려보냈고, 심병(沁兵)도 김적(金賊, 김개남)을 산채로 잡았다니 매우 유쾌합니다. 술을 걸러 축하할 만합니다. 박기익(朴己弋)은 명령하여 풀어주었습니까? 어제 제 편지도 순무사(巡撫使) 관문(關文)에 함께 보냈습니다. 박기익에 대해 청주(淸州) 병사(兵使)에게 들어보니, 그가 공(功)은 있고 죄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박(朴)은 바로 당신 집안의 도사(都事)인 제범(齊範)씨의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라고 합니다. 어제 편지에서 잘못 썼기 때문에 다시 고칩니다. 신(申)대감과 성(成)대감의 편지를 함께 보내니 보시고, 이미 순무사에게 부탁하여 기록을 삭제한 뒤에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의 관찰사와 수신(帥臣), 초토관(招討官)과 소모관(召募官)에게 관문(關文)을 보냈습니다. 깊이 헤아려서 명령하여 조처해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대감께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12월 6일 밤. 아우 홍(弘) 올림.
분부를 받아보니 새해에 상소를 올려 사직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대감에게 있어 스스로 도모하여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공론이 그것을 허락하겠습니까? 이참의(李參議)가 돌아와서 공산(公山, 공주)의 승리를 일컬어 비도(匪徒)를 토벌한 관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의 일이 매우 위험했는데, 대감의 영단(英斷)이 아니면 이런 전공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나머지 요사한 기운을 숙청하고 가라지를 교화하여 양민으로 만드는 것을 어찌 서툰 사람에게 맡기겠습니까? 제 생각이 이와 같으니 다시 여러 번 생각하여 사직을 그만두시기를 바랍니다. 영장(營將)의 이직(移職)은 고생에 대한 보수가 지난 날의 중군(中軍)과 서로 비슷하여 모두 일개 읍을 주어야 하나 근래에 주군(州郡) 관리의 추천은 전적으로 내무(內務)의 직권이어서 저는 머리를 끄덕여 허락할 뿐입니다. 일부러 식언(食言)을 하려던 것은 아니니 혹시 양해해 주시겠습니까? 하하.
대감께서 절기에 따라 편안하신지요. 이번에 기록 하나와 편지 2장을 올리니 대감께서 보시고 헤아려 주십시오. 내일 아침에 선장(先將, 선봉장인 듯) 박(朴)과 육(陸)을 잠시 늦추는 일로 전보를 칠 계획입니다. 이 편지가 오래된 것이 되어 도리어 나중에 도착할 것입니다. 들어보니 박(朴)은 당신의 집안사람으로 그 자(字)가 정빈(正彬)이라고 합니다. 모두 상세히 조사하여 처리해서 후회하는데 이르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아우 홍(弘) 올림. 4일 밤.
병사(兵使)가 파직된 몇 개 읍에 아직도 후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도계(道啓, 감사가 임금에게 아뢰는 글)를 기다렸으나 아직까지 전혀 소식이 없어 걱정스럽습니다. 신속히 분별하여 논계(論啓)해서 그것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백(錦伯, 충청 감사)의 편지는 어제 오후에 운양(雲養, 김윤식의 호)이 보내온 것 안에 있었습니다. 제가 편지 1장을 베껴 썼는데, 마침 스기무라(杉村濬)가 자리에 있어 직접 그 지시를 주며 부탁을 하였으나 공사(公使)가 아직까지 답장이 없습니다. 대개 공산(公山, 공주)의 승리는 적이 북상하는 길을 막아 그 공이 대단합니다. 다만 병사가 적어서 추격하여 섬멸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또한 근래에 적이 물러간 뒤에 사정을 알지 못하여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연기(燕岐)의 이경희(李景熙)는 내무(內務)에 명령하여 사조(辭朝, 임금에게 드리는 하직인사)를 면제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바로 속히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는 제 집안의 편지에 넣었으니 완장(阮丈)을 맞이하면 대감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