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영내찰(錦營來札) 운양(雲養)
평재(平齋) 인형(仁兄) 대인(大人) 절하(節下, 절도사에게)
풍문(風聞)으로 절도사의 깃발이 그 사이에 이미 감영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서늘한 가을 기운이 생겨나는 때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신지요. 이런 때에 감영의 사무가 갑절이나 괴로우시리라 여겨지는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동요(東擾)는 복심(腹心, 아주 가까운 곳을 의미)의 질병으로 서요(西擾, 양이(洋夷)의 소란)보다 심합니다. 귀영(貴營)은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의 사이에 있어 이들이 출몰하고 모두 모이는 곳입니다. 그 괴로움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의 정형(情形)도 짧은 글로 다하기가 어렵습니다.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황주(黃州)와 평산(平山)사이에서 서로 대치하여 길이 막히고, 조령(朝令, 조정의 명령)이 10리 밖에는 시행되지 않으며, 조반(朝班, 조정의 반열 곧 양반)도 편안하지 않고, 창으로 쌀을 씻고 칼로 불을 때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언제 지난날의 기상을 다시 보게 될지 알지 못하여 단지 지붕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영감의 조카를 그 사이에 몇 번 만났을 때에 남쪽 소식을 들었는데, 이것도 오랫동안 끊겼습니다. 지금 프랑스 사람의 일로 외서(外署)에서 사람을 보내 빨리 갔다가 오게 하여 조카를 찾아 편지를 부쳤는데, 받아 보셨습니까? 프랑스 사람의 일을 아래에 적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성환(成歡)에서 패배하여 돌아갈 때에 금강근처에 이르러 프랑스 선교사 1명과 말을 끌던 조선인을 잡아가서 목을 베었습니다. 프랑스 공사(公使)가 나중에 그것을 듣고 외서(外署)에 조회(照會)하여 바로 사실을 조사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외서(外署)가 전임 감사에게 관문(關文)으로 명령하였으나 1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보고하기를, “감영 안에도 소문을 전해 들어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 날에 목격한 사람은 금강 나룻배의 사공뿐으로 청(淸)의 장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느 날의 일인지는 하나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외서에서 주사(主事) 이강하(李康夏)를 파견하여 이 사실을 조사하였는데, 그가 돌아와서 말한 것도 보사(報辭, 감영의 보고)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프랑스 공사가 크게 소란을 일으켜서 말하기를, “이 일은 우리가 이미 상세히 탐문하였다. 금강 건너편에 신임 감사와 전임 감사의 휴게소가 있는데, 그 날 공주의 영장(營將)과 중군(中軍)이 화진(華陣, 청나라 군대)을 영접하러 나왔다가 청의 장수와 함께 앉아 프랑스 선교사를 잡아가서 취초(取招)하여 강을 건너 나룻터 근처 모래사장에서 살해한 것은 의심할 것 없이 확실하다. 중군과 영장이 이미 그 자리에 합석했는데, 어찌 청나라 장수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청나라 장수의 성명과 날짜 및 장소를 분명히 알고, 그 취초한 말을 기록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만약 이런 증거가 없다면, 성명과 날짜 및 지명과 증인을 적어 이것을 가지고 청나라에 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이런 증거가 없다면 당신 나라에 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방백(方伯)과 지방관은 보호할 책임이 있는데, 다른 나라 사람이 경내에서 해를 입었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이 일은 관계가 적지 않으니 신속히 처리하여 답변을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도 청나라 사람의 행위를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 나라가 만약 그들을 보호하려고 한다면 대신 괴로움을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하여 공갈이 대단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사방이 곤란한 가운데 있는데다가 프랑스 사람의 죽음을 당하여 형세를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다시 사람을 보내 탐문합니다. 철저히 탐문하여 중국 장수의 성명과 날짜 및 장소와 증인 등을 명백히 적어서 보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프랑스 공사는 교도(敎徒, 신도)에게 들어 반드시 모두 거짓은 아닐 것입니다. 영장과 중군에게 증인을 세우더라도 조금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만약 피혐(避嫌)하려고 한다면 금강의 사공을 증인으로 세워 그 성명을 적어 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사가 우리 관리의 동참을 알고 있다면 끝내 피해서는 안됩니다. 청나라 장수의 이런 행동은 매우 난폭하여 남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라고 할 만 합니다. 어찌 통쾌함이 있겠습니까? 결국 섭(聶, 섭사성(聶士成))과 섭(葉, 섭지초(葉志超)) 2사람 중에 1명일 것입니다. 상세히 탐문하여 알려주어 하인을 보내어 헛된 걸음을 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1894년 8월 11일 아우 김윤식(金允植) 올림.
당신 집에 편지는 이미 일전의 인편으로 했기 때문에 다시 부치지 않습니다. 선무사가 지금 귀영(貴營, 감영)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이 편지를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달(9월) 7일의 편지를 받고, 지난날 먼저 보내신 편지를 아직도 받아보지 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뒤에 최근의 소식을 아니 더욱 위로가 됩니다. 늦가을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대감의 형편이 피로에도 별탈이 없다는 것을 아니, 실로 평소 저의 바램에 부합합니다. 영감의 조카가 먼 길을 떠나려다가 갑자기 용인(龍仁)의 변고를 듣고 황급히 길을 바꿨다고 하여 놀라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멀리서 이런 소문을 듣고 어떻게 정신을 진정시키겠습니까? 어찌 우리들이 이런 세상을 만날 줄을 알았겠습니까? 저번에 양호(兩湖)의 동비(東匪)가 제법 귀화하려는 뜻이 있다고 들었는데, 각 읍에서 나오는 소문은 그들이 불처럼 더욱 심해지니 아무리해도 저 속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때에 안팎에서 애써 주선할 사람이≪재능을≫발휘할 방도가 없으니 한탄을 어찌 하겠습니까? 운수소관에 돌리고 실로 어찌할 수 없는 말뿐입니다. 고견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프랑스 선교사의 일은 전에 보고한 것이 너무 모호하여 프랑스 공사와 여러 번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보고를 공문으로 보내면 어떻게 답변할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청나라 장수가 섭지초(葉志超)라고 했다가 지금은 섭지초의 조카라고 하나 처음 듣는 얘기이고, 섭지초는 평양전투에서 죽었습니다. 청나라 군사 중에 패하여 돌아가지 못한 자가 동도에 붙어 그 세력이 대단하여 일본군이 들어올 것이고, 불쌍한 우리 백성의 간과 뇌가 길에 뒤엉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의 형편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니 내버려두는 것이 좋습니다. 저의 사촌이 관서(關西)에 절도사로 있어 괴로운 상황에다가 위험합니다. 대감이 계신 곳과 비교하여도 더욱 심합니다. 평상시에 행락(行樂)하는 관찰사는 모두 남에게 주고 위험하고 어지러운 때에 명을 받드니 한마디 찬탄을 내게 합니다. 등불아래서 대충 쓰며 이만 줄입니다.
1894년 9월 12일 밤. 아우 윤식(允植) 올림.
저번에 주신 편지를 받고, 아직 감영에 도착하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이에 이미 부임하였으리라 여겨집니다. 서늘한 가을 날씨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대감의 형편이 편안하신지요. 새로 부임하여 감영의 일이 매우 괴로우시리라 여겨지는데, 더욱이 평상시가 아닌 이런 때에야? 그립고 걱정스러워서 실로 내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저는 임금의 은혜로 다시 벼슬길에 나와 의리상 감격하여 은혜를 갚으려고 도모해야 하나 쇠약함이 너무 심하고 어려움이 너무 괴로워서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양서(兩西)의 전란으로 가득한 먼지와, 삼남(三南)의 소요는 언제 그치겠습니까? 귀영(貴營)은 양호(兩湖)에 교차하는 데에 있어 동비의 환난이 더욱 심하여 관(官)이 관답지 못하고 백성이 백성답지 않아서 손을 댈 방도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조처할지 모르겠습니다.
삼도(三道, 전라·경상·충청)를 선무(宣撫)하여 끝내 귀화하지 않았으나 군대를 파견하면 도리어 소요를 더하게 할 것이 염려되어 지금 운현(雲峴, 흥선대원군)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삼도(三道)를 효유(曉諭)하려고 합니다. 온 백성이 평소 태공(太公, 흥선대원군)의 말을 믿기 때문에 혹시 감격하여 해산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귀영에서도 말을 잘하는 사람을 골라 보내어 효유하리라 생각합니다. 운하(雲下, 흥선대원군)로부터 편지로 부탁하신 것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지금 안동(安東)에서 난민(亂民) 3,000명이 일본군 병관(兵官) 2명을 포위하여 심지어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군사의 빌미를 일으킬 것입니다. 곳곳마다 이와 같은 일이 생겨 팔역(八域, 팔도)에 편안한 땅이 한조각도 없게 될 것입니다. 어찌 하겠습니까? 저의 사촌이 아직 산사(山寺)에 있는데, 어제 편지를 받아보니, “평양의 청나라 군대가 이미 패배하여 도망을 갔고, 일본군이 성을 점거했습니다. 계속 신임 감사가 감영에 도착하도록 재촉했으나 인부(印符)가 없고, 묘당(廟堂, 의정부)의 특별한 명령도 없어 감영에 올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신이 매우 산란하여 이만 줄입니다.
1894년 8월 27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저번에 프랑스 선교사가 피살된 일은 여러 번 프랑스 공사가 조사를 재촉함에 따라 연이어 귀영(貴營, 감영)에 관문(關文)을 보냈고, 다시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했으나 끝내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전후의 귀영에서 전임 감사 때의 조사는 살펴볼만한 사안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프랑스 공사가 사람을 보내 상세히 탐문해 와서 그것에 근거하여 말하기를, “6월 27일에 청나라 진영이 아산(牙山)에서 패하고 금강의 시동(柿洞)에 이르렀는데, 금영(錦營, 충청 감영)의 영장(營將)과 중군(中軍)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서양 선교사를 잡아다가 섭(葉, 섭지초(葉志超)이다) 장수와 우리나라의 영장과 중군이 함께 취초(取招)하여 나룻터로 압송해서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귀영의 보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어 프랑스 공사가 크게 애가 탔다고 합니다.
또한, “이 일은 너희 나라와 상관이 없고, 우리는 명백한 증거를 얻은 뒤에 청나라에 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너희 나라가 어찌하여 사실을 감추고 비호하여 그 책임을 대신하려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금영의 경내에서 프랑스인이 피살되었으니 지주(地主, 감사를 지칭하는 듯)는 보호를 하지 못한 책임을 모면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그들을 엄호하니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너희 나라는 지금 어려운 가운데 있는데, 다시 우리나라와 피를 흘리려는 것이 어찌 좋은 계책인가? 내가 들은 것이 이와 같고, 이것은 소문이 아니며 바로 사람을 보내 확실하게 탐문한 것이다. 해당 감영에 이것을 왕복하여 소상히 보고하게 해야 한다. 프랑스 선교사가 피살된 곳과 날짜 및 청나라 진영의 장수와 참관한 영장과 중군의 성명, 그리고 취초(取招)한 내용 등을 일일이 기록하여 온 뒤에 내가 이것에 근거하여 증거를 만들어야 너희 나라와 추호도 관계가 없게 될 것이다. 숨겨서 스스로 낭패스럽게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누누이 말하는데, 급속하게 보고를 만들어 보내어 나중에 말다툼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그 때에 청나라 군대의 주장(主將)은 섭(葉, 섭지초)입니까? 섭(聶, 섭사성)입니까? 음이 같아서 구별하기가 어려우니 상세히 탐문하여 공문(公文)위에 적어 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일 취초한 말입니다. 영장과 중군은 이미 참관을 했다고 하는데, 통사(通詞, 통역)가 곁에 있어 자연히 알고 있을 것이니 반드시 회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만약 계속 피하려고 한다면 임금께 아뢰어 잡아다가 신문할 수밖에 없으니 참관한 사정을 이것으로 명령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전임 감사가 크게 겁을 먹은 일은, 국가에 일이 생기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호도(糊塗)하여 회피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여기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거듭 서로(西路)의 일본군이 이미 의주를 다 건너간 것을 며칠 전 일본 대사관에 온 전보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 전보에 의하면, “청나라 군대가 다시 구연성(九連城)에서 패하여 송경(宋景)은 혼자 탈출하여 죽음을 모면하였고, 앞에는 주둔하는 진영이 없어 석권할 기세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사람이 말하기를, “멀지 않아 조약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했는데, 만약 연이어 패배하여 조약을 맺으면 청국이 크게 무너지게 될 것은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달(10월) 1일 밤에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비도(匪徒)의 우환이 언제 끝나겠습니까? 지금 들으니 보은(報恩)에 모였다고 하는데, 또한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나 충주(忠州) 등지도 지금 크게 어수선할 것입니다. 순무사(巡撫使)가 이미 순무영을 세웠더라도 병사가 500명이 안되는데다가 식량과 무기도 없어 일마다 군색합니다. 선봉(先鋒) 이규태(李奎泰)가 여러 날 동안 출발하지 못하였고, 일본군은 며칠 뒤에 1,000명을 파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비(東匪)가 각 처에 흩어져있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1,000명의 군사로 물리치지는 못할 듯합니다. 이것은 차차 크게 징계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당(匪党)이 매우 어리석은 중에도 교활하여 옮겨 다니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강자를 피해 약자를 침범하여 마치 명(明)말의 유구(游寇, 유구(流寇)이다)와 같습니다. 이것은 읍(邑)마다 의병을 일으키고, 촌(村)마다 보(堡)를 쌓아 각자 스스로 싸우지 않고는 마을을 지킬 방도가 달리 없습니다.
지금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법을 세우고 함께 권면하며 여러 읍을 다니며 그들이 서로 호응하여 돕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먼저 이런 뜻을 경상감사에게 전보로 통지하였습니다. 읍마다 사람들이 의지할만한 호걸을 택하여 그로 하여금 마을에서 용감한 자를 모으게 하고, 요호(饒戶)에게 권유하여 식량의 일을 맡기며, 그 능력의 여부를 살펴서 소모관(召募官) 등의 직임을 준다면 국가는 병력과 재력을 쓰지 않고도 그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한을 백성에게 주어 혹시 폐단이 더욱 생길 것을 걱정합니다. 이런 염려가 없지는 않으나 이런 때를 맞이하여 어찌 과실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방편을 많이 마련하여 앉아서 곤경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현영운(玄暎運)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 이미 체직(遞職)을 아뢰고 후임을 내었습니다. 만약 뚜렷한 공로가 있다면 나중에 어찌 변통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나중 일을 염려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주선하도록 대신 말해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심병(沁兵)은 7일에 출발하여 인천항에 이르러서 9일에 화륜선을 타고 10일에 군산(群山)에 도착해 보름 전에는 노성(魯城)에 갈 수가 있습니다. 식량과 기계가 있다면 어찌 쥐새끼같은 적을 걱정하겠습니까? 황헌주(黃憲周)는 부지런하고 뜻이 있으며 군사에 관한 일에 능숙하여 제가 믿고 맡기던 사람입니다.
객지에서 굶지 않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반드시 하는 일에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귀영(貴營)과의 거리가 조금 멀어서 이것이 흠이 됩니다. 주사(主事) 이병규(李秉珪)는 저의 생질인데, 지금 휴가를 얻어 내려갑니다. 사람됨이 허약하여 병이 많으나 평소에 지극한 성품으로 향리(鄕里)에서 인심을 얻고 있습니다. 이번에 내려가는 뜻은 향리를 화합하여 스스로 지키려는 계획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이러한 계획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다만 사람들을 모으고 실제 준비가 없다면 먼저 그 피해를 받을 것이니 일에 따라 특별히 돌보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태공(太公, 흥선대원군)에게 올리는 글은 대신 바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비록 군대를 빌리고 싶지 않더라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날에 잘 타일러서 해산시킨다는 계획이 이미 허사가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일일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헤아려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1894년 10월 4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어제 저녁에 김학우(金鶴羽)가 자객에게 살해를 당했는데, 이것이 무슨 변괴입니까? 현재 경무(警務)에서 뒤를 밟아 체포하려고 하나 그 종적이 아직도 막연하니 놀랄만합니다.
부산의 일본 병관(兵館)이 이용호(李容鎬)와 윤병갑(尹炳甲)이 밀지(密旨)를 고쳐서 백성을 선동한 일로 지금 모두 한양에 올라와 정탐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정부가 기한을 정해 윤(尹)을 추적하여 체포하였고, 이(李, 이용호)는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일본인이 다시 대감과 동도(東徒)가 밀통한다고 의심을 하여 저희들이 힘껏 변호를 하였습니다. 도원장(道園丈, 김홍집)의 기록과 전적(全賊, 전봉준)에게 전한 격문 및 2명을 효수(梟首)하여 경계한 일로 의사를 분명히 하니 저들도 의심을 풀었습니다.
평재(平齋, 박제순(朴齊純)의 호) 인형(仁兄) 대인(大人) 절하(節下, 절도사에게)
저번에 9월 6일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다 알았습니다. 이런 때에 몸이 초췌하고 정신이 피로할텐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조카가 갑자기 용인(龍仁)에서 적의 변고가 있다는 것을 듣고 황급히 길을 바꿔 바로 돌아서 귀영(貴營)에 갔는데, 그 사이에 이미 도착했습니까? 보고 들은 것이 이런 종류가 아닌 것이 없어 비록 놀랄만한 것을 듣더라도 다시 심상(尋常)해집니다. 지금 군대를 파병하는 일 때문에 조정의 논의가 끝내 확정되지 않고, 질질 끌어 날을 보내며 사람마다 칠실지우(漆室之憂)를 품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우석(又石, 이재면(李載冕)의 호)어른이 보내온 형의 편지를 받아보니, 각 안건마다 논한 정형이 매우 자세하여 우리들의 천마디 만마디 말보다 낫습니다. 박(朴, 박내현)을 효수하여 경계한 일은 옥안(獄案)에 억매이지 않아 상쾌할 만합니다.
이후로 사람들의 의혹을 없앨 수 있고, 경병(京兵)을 보낼 수 있으며, 적의 간담을 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거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한한 복이 되어 기쁨과 축하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완백(完伯, 전라감사)이 글을 읽은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잠을 자는 듯 꿈을 꾸는 듯합니다. 비도(匪徒)의 기세가 이와 같으나 의정부에 1자(字)의 보고도 없으니 오히려 이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좌우에서 견제하여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한탄스럽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일은 지난번에 적어 보낸 것으로 해서 임시로 공문을 만들어 프랑스 공사관에 조회(照會)하였으나 아직 대답이 어떠한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바쁘기만 할 뿐 조금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귀화했다고 하는 자는 대개가 얼굴만 바꾸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속임수는 크게 나랏일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이번의 형의 편지는 그 도움이 적지 않습니다. 만약 일전의 장계(狀啓)에 성토하는 한마디 말도 없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속담에서 말하는 휘(徽)·흠(欽)·배(拜)
1894년 9월 20일 밤. 아우 윤식 올림.
제 사촌이 이미 감영에 도착했으나 혼자 빈 성(城)에 앉아 일본군과 주선할 뿐입니다. 청나라 사람은 이미 달아나서 경내 밖으로 나갔고, 일본군은 의주(義州)에 도착했으나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강가의 수비가 더욱 삼엄하여 바로 건널 수 없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동도(東徒)가 서쪽으로 올라간다는 얘기가 무성하여 이미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수령을 파견하여 각각 수백명을 이끌고 내려가서 탄압하게 했습니다. 이어서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였으나 순무사가 정해지지 않아서 계속 군사를 파견할 것입니다. 일본인도 먼저 1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아군(我軍)을 도와 기미에 따라 ≪동도를≫토벌한다고 합니다.
보내온 편지를 받고 요사한 기운이 아직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소 근심스럽고 괴로우시리라 여겨지니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일본군은 일간 500명을 파견하여 3갈래로 나누어 내려갈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용인(龍仁)과 안성(安城)을 거쳐 충주(忠州)에 도착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수원(水原)을 거쳐 바로 귀영(貴營)에 도착하여 군대를 나누어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편지 중에 저에게 보낸 다른 편지는 이미 일본 공사에게 보냈는데, 아직 회신을 받지 못했으나 반드시 전부를 철병(撤兵)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심병(沁兵)은 대감이 이미 주둔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신임 전라 감사에게 주어 완영(完營, 전주 감영)을 함께 지키게 한다면 귀영의 일에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비도(匪徒)는 무리를 모아 기세를 이루지만 그 실상은 맹랑(孟浪)하여 빈손의 적에 불과하고, 오합지졸(烏合之卒)처럼 비록 많더라도 어찌 두려워 할 것이 있겠습니까? 양창(洋槍, 서양 총(洋銃)이다)을 얻더라도 사용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고, 또한 탄알이 없으면 도리어 토총(土銃)만 못합니다. 토총은 볼품없는 기계인데, 어찌 서양 총을 대적하겠습니까? 그래서 일본군 1명이 비도 수천명을 상대할 수 있고, 경병(京兵) 10명이 비도 수백명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계가 예리한지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일본군 1명이 비도 수천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어떤 놈의 말이겠습니까? 일본군이 10명이면 비도 수만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근래에 괴산(槐山)의 일본군이 비도와 마주쳤는데, 중과부적(衆寡不敵)이어서 몇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들었습니다. 이 비도는 아직도 제법 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는 1~2명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 모두 두려워서 흩어집니다. 정형과 일의 형편이 이와 같으니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지역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적과 상대한다면 그 성패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괴롭고 피로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괴로움을 어찌하겠습니까? 정신이 산란하여 이만 줄입니다.
1894년 10월 12일 밤. 아우 윤식(允植) 올림.
일본인이 병사를 보낼 때에 적을 평정한 뒤 반드시 위무(慰撫)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3도(三道)에 각각 위무사 1명을 파견하여 군대를 따라 갈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지금 초기(草記)를 만들었는데, 박제관(朴齊寬)을 충청도 위무사로, 전라 감사 이도재(李道宰)를 본도(本道, 전라도) 위무사로, 경상도 선무사 이중하(李重夏)를 바꾸어 위무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호서와 호남의 위무사가 아직 채비를 꾸리지 못하여 일본군과 함께 떠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5~6일을 미루었다가 떠나야할 것 같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연달아 받고 마음이 놀라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일본 공사를 만날 때마다 일본 공사가 어린애 장난으로 보여 처음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파견하는 일본군이 겨우 750명이고 다시 3갈래 길로 나누었는데, 이것으로 비도(匪徒)를 평정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일본인이 정형을 세심히 관찰하는 것이 우리보다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실제가 없는 큰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심병(沁兵)은 처음에 군산으로 바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그 뒤에 내포(內浦)에 소요가 심하고 홍주가 고립되어 급박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상의하여 홍주로 향해 내도(內島)에 내려 먼저 홍주로 가서 위급함을 구제하고 귀영(貴營)으로 향하려고 합니다.
해당 중군(中軍) 황헌주(黃憲周)가 3일전에 병사를 이끌고 인천항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관격(關格, 갑자기 체하여 생기는 위급한 병)이 일어나고 산증(疝證)까지 이어져서 병세가 가볍지 않아 움직이는 데에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300명의 병사와 아직도 인천항에 머무르며 몸을 조리해서 화륜선에 오르려고 합니다.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스즈키(鈴木彰) 소위(少尉)가 귀영에 남아 지키는 일은 전에 이미 일본 공사에게 여러번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것에 근거하여 이미 해당 병관(兵官)에게 명령을 했다고 합니다. 어제 다시 간청하여 편지 1장을 얻어 보냅니다. 갑자기 그만두고 떠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경병(京兵)과 일본군이 계속 전진하고, 이어서 심병도 와서 모이면 멀지 않아 눈살을 펴게 될 것이니 쥐새끼같은 무리들을 어찌 크게 걱정하겠습니까? 3로(三路)의 위무사 중에서 호서의 위무사로 처음에는 심순가(沈舜歌)를 올렸으나 모면하려고 하여 다시 박치교(朴致敎)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방(百方)으로 그만두려고 하여 일이 따라서 늦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일에는 이와 같은 것들이 많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1894년 10월 15일 밤. 아우 윤식 올림.
이노우에(井上馨) 공사의 편지를 함께 부칩니다.
날마다 편지가 왕복하여 위안이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어버리는 것만 못합니다. 어제 비도(匪徒)와 조금 접전을 하여 이미 적 1명을 죽이고 10여명의 적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기쁜 소식이고 이전의 명성대로입니다. 병사의 간담이 그것에 힘입어 대단해졌을 것입니다. 요즘에 지내시는 형편은 어떻습니까? 매번 보내주신 편지를 일본 공사관에 통지할 때마다 일본인이 그것을 보고 크게 웃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왕패(王覇)가 시장사람의 야유를 만나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무릅쓰고 대신 간청하여 조금도 소홀함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일본군 1중대가 그저께 이미 출발했고, 며칠내에 귀영(貴營)에 도착해서 이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합세하면 물리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니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본인이 적을 판단하는 것이 매우 세심하여 진실로 적을 가볍게 보고 큰소리를 친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신임 전라감사 이성일(李聖一, 성일은 이도재의 자임)도 일본인이 적을 가볍게 본다고 매우 걱정하였습니다. 저도 그 말을 믿고 있습니다. 호남의 적도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비록 심창(沁槍, 심병(沁兵)의 총)과 심포(沁砲, 심병의 대포)를 얻었더라도 개인적으로 연습하면 끝내 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만약 경영(京營)의 군대와 서로 마주친다면 승패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일본군과 만난다면 비록 수가 많더라도 용기를 펴보지도 못하고 엄청난 명성을 듣기만 해도 공연히 기운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어찌 군대가 병사 숫자가 많은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심병(沁兵)이 인천항에 이르렀으나 총대관(總帶官, 중군병방) 황헌주(黃憲周)가 갑자기 중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 생사(生死)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주둔한지 5일이 지났으나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데, 전장에 나간 장수를 바꾸는 것도 쉽지가 않아 제가 밤낮으로 근심하는 것이니 빨리 답장을 구합니다. 정신이 산란하여 이만 줄입니다.
1894년 10월 17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평재(平齋, 박제순의 호) 인형(仁兄) 대인(大人) 절하(節下)
보내주신 편지를 연달아 받고, 당신 집에 보낸 편지를 탐문해보니 비도(匪徒)의 기세가 급박하여 고립된 성(城)에 조금 의지하고 있어 걱정과 피로가 지나쳐서 신도(愼度)에 이르렀다니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곳의 공(公)들이 귀영(貴營)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또한 편안하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고심하여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역량(力量)이 모자라서 모두 여의치 않습니다. 전에 파견한 군대는 수원에 이르러 체류하다가 다시 급하지 않은 동쪽 땅으로 향했는데, 이것은 모두 일본인의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귀영이 급박하더라도 만약 한 곳만을 구제한다면 비도가 모이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토벌하여 평정할 기약이 없기 때문에 한번에 끝내려는 계획입니다. 한(漢)의 주아부(周亞夫)가 양(梁)의 위급함을 구제하지 않았으나 양의 포위가 저절로 풀린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밀인 듯하니 누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더욱 방어에 힘써서 감히 쉽게 침범하지 않도록 하고, 조금 기다리면 저절로 방법이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소문의 원본은 당신의 조카를 통해 얻어 보았으나 이런 때에 사직하려는 것은 사체(事體)가 온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1894년 10월 19일 밤 아우 윤식 올림.
심병(沁兵)이 이미 출발했으나 일본인이 긴급하지 않다고 극력 주장하여 그만두고 영(營)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다 알았습니다. 수비가 점점 견고해지고, 조도(調度, 품격)가 방정하여 미친 도적도 두려워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따라서 사기가 더욱 올랐을 것입니다. 자사(刺史, 감사의 별칭)의 건강도 완쾌되어 국가를 위해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최근에 곧 이 도적을 소탕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심병(沁兵)의 철수를 당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즘의 정형(情形)이 어떠한 지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 군대를 독려하여 일본군과 협력하여 지키고, 밖의 도움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힘을 합쳐 토벌하며, 저들이 만약 패하여 흩어지면 그 접주(接主)와 접사(接司)를 모두 체포하여 요사한 기운이 뒤를 이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스즈키(鈴木彰)의 편지는 바로 전하고 표(票)를 받아 보내주십시오.
일본 공사관의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스즈키가 귀영에 머물러서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에 사직 상소는 단지 임금을 번거롭게 할 뿐이고 양해를 얻지도 못할 것입니다. 공(功)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물러나는 것이 온당한 도리입니다. 어찌 잠시 견디지 못합니까? 당괴(党魁)는 비록 죽더라도 그 죄는 바다를 터뜨려도 씻기가 어렵습니다. 신원(伸寃)하라는 얘기는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말이 더해질까 걱정스럽고, 일에 있어서 이로움이 없습니다. 좋으시기를 바랍니다.
1894년 10월 22일 밤. 아우 윤식 올림.
생질 이(李)가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 온전히 도착을 했다니 기쁩니다. 만약 만나서 이런 뜻을 전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21일 밤에 주신 편지를 24일 밤에 받아보았습니다. 매우 신속하여 위로됨과 기쁨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구원군이 점점 모여 고립된 성(城)이 의지하게 된 것은 대감의 복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복입니다. 요사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생민(生民)을 다시 안정시키기를 바랍니다. 지금 눈을 씻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介南)은 천보(天寶, 당(唐) 현종의 연호)년간의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과 같습니다. 이 도적 2명을 죽인다면 나머지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 도적 2명이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데, 하늘의 뜻이 반드시 모여서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순천(順天)·남원(南原)·고창(高敞) 등과 같은 읍의 수령은 모두 욕을 면하지 못했고 생사도 알지 못하여 말을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홍주 목사의 위엄을 멀리서 듣고 지금 조정에서 유서(諭書)와 포상이 내려졌습니다. 공주와 청주의 적이 감히 호서를 침범하지 못한 일이 조금 민심을 안정시킵니다. 다만 내포(內浦)의 소문이 날로 심한데, 선봉군이 지체되는 것은 일본군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약속 때문입니다. 신임 전라감사가 내달 5일에 떠나기로 했으나 심병(沁兵)이 이미 떠났다가 일본인이 만류하여 심영(沁營)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신임 전라감사는 호송할 군대가 없어 다시 심병 200명을 뽑아 호송할 계획입니다. 이노우에(井上馨) 일본공사가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궁에 들어와서 대신들을 모아놓고 정치 19조를 임금께 올려 실시할 것을 기약하고, 다시 위에 고(告)하고 아래에 선포하여 온 나라가 훤히 알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자주독립과 정치를 개혁하는 일은 모두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새벽에 인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등불을 돋우어 황급히 씁니다. 이만 줄입니다.
1894년 10월 24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거듭 알립니다. 한산(韓山)의 정대무(丁大懋)는 청렴한 관리입니다. 지금 나이가 72세로 매우 늙고 병들어서 이런 비도(匪徒)의 소굴을 맞아 아침저녁으로 위급함을 고하고 해임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의정부는 어찌 이유 없이 수령을 바꿉니까? 반드시 본영(本營, 관할인 충청감영)의 계파(啓罷)가 있은 뒤에야 후임을 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매우 쉽지 않은 일이고, 그 사정은 공사(公私)간에 매우 괴롭습니다.
지난 27일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귀영(貴營)이 구원병에 힘입어 방어하니 비도(匪徒)가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서 영남(嶺南)으로 흩어졌습니다. 어제 영남의 전보를 받아보니, 또한 곳곳마다 위급함을 알렸습니다. 도처에 무인지경(無人之境)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일본군 대위(大尉)가 산에 올라가서 비로소 놀랐고, 저들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저번에 일본 공사의 말을 들어보니, “3 갈래 길의 군대가 멀거나 가까운 데서 그들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사방에서 압박하여 그 퇴로를 막아 섬멸할 것이다. 지지부진한 것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3 갈래 길의 군대가 아직 다 모이지 않았으나 비도가 기미를 알고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또한 일본군의 계산 밖에서 나온 것으로 저들 중에 반드시 출중한 자가 있어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비도를 잡을 때마다 일본인은 바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의≫하나는 그 옥석(玉石, 선악)을 조사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밀지(密旨, 임금의 비밀지시)를 꾸며 백성을 선동한 종적(蹤跡)을 조사하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노우에(井上馨)가 이런 말을 하였는데, “비도가 주고받은 서찰을 찾아낸 것이 책상가에 있다. 이것이 바로 저들이 밀지로 명령한 것이다. 이밖에 달리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용호(李容鎬)와 윤병갑(尹炳甲)도 밀지한 일이 일본인의 염탐에 걸려들어 잡혔습니다. 법무아문에서 회심(會審)을 하여 평문(平問)을 하였으나 아직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대개 이와 같은 일들이 많습니다. 해서(海西)의 비도가 또한 대단합니다. 해주의 적이 재령(載寧)을 습격하려고 하니 일본인이 평양에 파견하여 주둔하고 있는 1중대를 보내어 토벌하였습니다. 동도(東徒)의 우환이 팔도(八道)에 널려 있으니 어찌 운수(運數)가 아닙니까? 한탄스럽습니다. 일전에 일본인이 여순(旅順)의 입구를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이것은 중국이 가장 역점을 두던 곳입니다. 지금 달리 믿을만한 곳이 없어 북경(北京)에서 피난할 계획을 논의하여 매우 어수선하다고 합니다. 중국의 현재 일도 알만합니다. ≪일본과 청국간에≫조약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1894년 11월 1일 아우 윤식 올림.
거듭 천안(天安)의 군대가 탄알 20,000개를 더 보내달라고 하여 제가 대신 일본 공사에게 요청을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가 그것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조선의 군대가 적을 만나면 창(槍, 총(銃)을 의미한다)을 버리고 도망가서 적에게 도움을 줄 염려가 있다. 탄알이 모자라면 반드시 일본군 병관(兵官)과 상의하여 그 신표(信票)를 얻어서 보내면 바로 보내줄 것이다. 일본 공사관도 일본 병관에게 탐문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탄알을 요청하면 반드시 일본 병관의 신표를 얻어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9일에 보내신 편지를 받아보고 기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지양(至陽, 가장 왕성한 양기(陽氣)이다)이 돌아오는 때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신지요? 남쪽 하늘의 구름 빛에 요사한 기운이 없어지니 바로 제 마음의 바램에 부합합니다. 이두황(李斗璜)은 쓸만합니다. 중앙에서 파견한 경군은 어찌 기율(紀律)이 없습니까? 경병(京兵)은 거만하고 횡포한 것이 고질이 되었으니 탄식할 만합니다.
심병(沁兵)은 완백(完伯, 전라 감사)을 호송하기 위해 보내기 때문에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전라 감사는 부임하여 수비만을 하고 다른 일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수원에 반달(15일) 머무르고 질질 끌다가 출발하였습니다. 지금 일본인이 비도(匪徒)의 형세가 점점 궁박해지는 것을 보고 힘을 써서 토벌하려고 이번에 군화(軍火)를 많이 싣고 호남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많은 비도가 멀지 않아 토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귀영(貴營, 충청 감영)에 병사들이 모여 군량과 접대를 하느라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또한 많은 비도가 흩어지더라도 나머지 무리가 곳곳에 숨어 있어 나중의 대책에도 다소 신경이 쓰일 것입니다. 이것이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저는 늘 괴롭고 힘듭니다. 내일 어가(御駕)를 모시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유(告由)하러 갑니다. 이번이 바로 옮겨갈 기회이나 임금의 뜻을 알지 못하니 어찌 하겠습니까?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정신이 매우 산란하여 이만 줄입니다.
동지(冬至) 하루 전날 아우 윤식(允植) 올림.
연이어 승리의 소식을 받으니 기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괴(匪魁)가 오히려 풀숲에서 숨을 쉬고 있고, 나머지 무리들이 아직도 호남과 영남에 가득합니다. 조정의 관리가 부지런히 정사에 힘쓰는 때는 오히려 지난 날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때에 대감이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심을 알았습니다. 병사들이 성(城) 한 곳에 모여 있어 그것에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으나 접대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생질인 이(李)를 만나 형제의 편지를 보고 대감께서 남쪽을 지킨 위대한 업적을 알았습니다. 매우 대단하십니다. 전라 감사가 식량이 부족하다고 화성(華城, 수원성)에 머무르고 있는데, 언제 떠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전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정치를 개혁하고 자주(自主)의 기틀을 새로 세우는 일은 이웃 나라 공사의 힘에 의지하여 차례대로 거행할 것이나 과연 시종(始終)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1894년 11월 17일 밤 아우 윤식(允植) 올림.
근래에 소식이 조금 끊겼습니다. 비록 다행스럽게도 초미(焦眉, 매우 급한 상황)의 걱정은 점점 풀렸으나 오히려 울적합니다. 지후(至候, 동지 때의 날씨인 듯)가 많이 어그러진 때에 지방관으로 지내시는 대감의 형편이 좋으신지요? 피로가 쌓인 뒤에 다시 ≪백성을≫보듬고 안정시키는 노고가 있어 다소 괴로우시리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나머지 무리가 숨어들어 얼굴만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지 않아서 베개를 높이 하고 눕지 못할 것입니다. 경병(京兵)과 일본군이 모두 호남으로 향했다는데, 귀영(貴營, 충청 감영)에서 모집한 토병(土兵, 그 지역에서 모집한 병사)으로 충분히 지킬 수가 있습니까? 신임 전라감사는 그 사이에 이미 감영에 도착했고, 전임 감사(김학진)의 소식은 어떠합니까? 이 친구 때문에 매우 괴롭습니다.
저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으나 이번 동지(冬至)날에 임금의 어가가 태묘(太廟, 종묘)에 새로 나아가서 자주(自主)와 개혁(改革)의 일을 고(告)하려고 합니다. 마침 한산(韓山)의 수령 정대무(丁大懋)가 해임되었는데, 계파(啓罷) 후에 보름이 지났으나 아전이 숨겨서 듣지 못해 끝내 비도(匪徒)의 난리를 만났습니다. 80 노인이 맨발로 70리를 달아나 겨우 몸만 빠져나왔고,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전부 잃어버려서 이미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좌수(座首)에게 맡겨 놓은 저포(苧布) 몇 필은 숫자를 맞추어 돌려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은 모두 순영(巡營, 충청감영)에 관문(關文)으로 지시한다고 하기 때문에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맡겨 놓은 물건의 목록과 좌수의 성명은 상세히 탐문하여 뒤에 알려드리겠습니다.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1894년 12월 1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이주사(李主事)의 녹지(錄紙) 1건(件)을 함께 보냅니다.
임금께서 얼굴 부위에 풍단(風丹)으로 편안하지 못하여 임시로 뒤로 미루셨습니다. 지금 날로 좋아지는 희망은 있으나 아직도 정상으로 회복되지 못하여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말씀드릴 것은, 호서의 정형(情形)이 비류(匪類)가 조금 진정되어 흉악하고 교활한 우두머리는 산골짜기와 숲속으로 흩어져 숨었고, 강요를 당한 죄없는 사람은 점점 돌아오고 있으나 관병(官兵)과 유도(儒道)라고 불리는 자들이 도리어 강요를 당했다가 돌아온 평민을 침탈하여 곳곳마다 집을 부수고 망신을 주어 그 소요로 편안하지 못하여 오히려 지난 날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이에 허실을 서로 가리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 목사와 감사가 된 자는 더욱 백성의 안정(安定)을 우선으로 하고, 죄를 지은 유명한 우두머리가 아니면 일일이 찾아내어 체포해서 나머지 백성을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우리나라의 병정은 한양과 지방을 막론하고 매우 몰지각하여 세를 이용하여 약탈하는 습관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배우니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이들을 단속하여 나가서 체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난날에 호서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양반의 폐단이었습니다. 하늘의 도가 순환하여 지금 가장 불쌍한 자는 양반집만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이름이 있는 집안 중에 진심으로 ≪동학에≫입도(入道)한 자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집집마다 결딴이 나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비괴(匪魁)를 찾아내어 체포할 때에 다시 그 지명도(知名度) 때문에 뜻하지 않은 재앙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관병은 모두 상놈으로 평소에 반명(班名, 양반이라고 이를 만한 명색)과는 원수가 되어 때를 이용하여 못된 짓을 저지르는데 반드시 양반집입니다.
좌우로 침탈을 당하여 살아갈 여지가 없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대감께서 지금 비도를 토벌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일을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 처리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겨 용서하시는 덕을 베풀어 호서의 사족(士族)들이 물불과 같은 도탄(塗炭)을 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음공(陰功)이 어떻겠습니까? 저의 고언(瞽言, 사리에 어두운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미리 방법을 마련하여 가지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본 관서(官署, 외무아문)의 주사(主事) 이강하(李康夏)의 집이 당신 관아에 있어 또한 창상지변(滄桑之變, 엄청난 변화)을 겪어 후환이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특별히 보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李)씨 집뿐만 아니라 도(道)의 전체 사족들이 모두 이런 바램을 가지고 있으니 깊이 헤아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제 주사(主事) 이강하(李康夏) 집의 인편에 편지 1통을 부쳤는데 이것보다 먼저 받아보셨으리라 여겨집니다. 매우 추운 때에 대감께서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시다는 것을 아니 위로가 되고 제 바램에 부합됩니다. 비당(匪党)이 멀리서 날뛰어 군대를 주둔하여 지키고 있으나 지금의 절박한 근심은 전에 비해 조금 덜해져서 비로소 정사를 펴고 명령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서리가 온 뒤에 칠곡(桼谷)이 다시 따뜻해지니 호서의 백성을 위해 축하할 만합니다. 저는 여전합니다. 늘 평기(坪基) 장전(長田)의 생질편지를 받아보고 훌륭한 자사(刺史)를 잃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또한 대감께서 비방을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는 뜻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일은 이미 지난 것이고, 공론(公論)이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 난리가 지난 뒤에 백성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매복한 비도의 잔당을 탄압하는 일은 결코 서투른 사람이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이러한 번거롭고 괴로운 생각은 하지 마시고, 일개 성(省)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서 해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대감께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1894년 12월 2일 아우 윤식(允植) 올림.
생질 이(李)에게 보내는 답장을 전해주도록 분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연일 하교(下敎)를 받으니 위로가 되고 이웃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 뒤에 인민(人民)이 제법 모여들었으니, 여러 읍의 수령들이 관아에 앉아 읍의 일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군무아문에서 각 읍에 주둔하여 방어할 군사를 임금께 아뢰어 정했습니다. 삼남(三南)의 수십개 읍에 각각 주둔하는 군사는 300명에서 150명까지 같지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마련할 방법으로 매복한 나머지 ≪비도의≫무리를 제압하고, 화살에 놀란 새와 같은 마음을 가진 불쌍한 백성을 위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별군관(別軍官)과 유도군(儒道軍)이라고 하는 것은 차차 거두어 돌려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호남의 소식은 근래에 어떻습니까? 괴수 2명은 언제 머리를 바칩니까? 임기준(任基準)이 성(城)에 들어와서 며칠동안 일본인의 처소에 갇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심리하여 처리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임금의 풍화(風火)증세가 점차 회복되어가고 있으나 아직 풍기와 화기가 남아있어 여전히 그것을 없애는 약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저는 여전합니다.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1894년 12월 4일 밤 아우 윤식(允植) 올림.
청(淸)과 일본이 장약(仗約, 조약문서)을 주고 받았는지는 최근에 달리 들은 것이 없습니다. 조약을 맺은 듯하나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따로 편지 1통을 보내니 평기(坪基)의 제 생질에게 전하도록 분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프랑스 선교사가 전에 당신의 관아에 갔다가 해를 입은 선교사를 매장한 곳을 살펴보고 이장(移葬)을 도모하는 한가지 일입니다. 해를 입은 선교사를 조사한 것은 전임 충청감사 때의 일인데, 여러 차례 주고받은 편지가 책상에 있어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이번 선교사가 갈 때에 특별히 보호하여 실망에 이르지 않도록 해주시고, 그가 머물고 한가롭게 관아 내를 걸어 다닐 때에 병정(兵丁)으로 하여금 호위를 하게하여 뜻밖의 재난을 막아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해당 선교사가 지금 귀영(貴營, 충청 감영)에서 완영(完營, 전라 감영)으로 가다가 방에서 잃어버린 집물(什物)의 배상금으로 2,000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특별히 보호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런 걱정이 있을 것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그만두고 다음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894년 12월 14일 밤 아우 김윤식(金允植) 올림.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섣달 추위가 매우 이상하고, 해가 이미 제야(除夜)가 되었습니다. 대감께서 지내시는 형편이 좋으신지요? 매우 그립습니다. 저는 우연히 감기에 걸렸다가 1달 만에야 일어났습니다. 마침 이 때에 상소를 올려 심영(沁營)의 병부(兵符)는 그만두고 아이를 심영(沁營)에 보내 관아의 권속(眷屬)들을 데려오려고 합니다. 공사(公私)간에 바쁘고 어수선하여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청산(靑山)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적은 그 사이에 이미 해산하여 현재 어느 곳에 있습니까? 이 적을 올해 안에 쓸어버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마침 후반(候斑, 임금을 알현할 때의 반렬)을 따라 물러났습니다. 파발이 바빠서 대충 씁니다. 새해를 맞아 큰 복이 오고 나라와 집안이 태평하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1894년 제야(除夜)에 아우 윤식(允植) 올림.
평기(坪基)에 보내는 편지를 전해주도록 분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