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甲午年, 1894) 정월이 당도하니 내 나이 16세라. 새해를 맞이하여 태평가(太平歌)를 부를 적에 초 8일이 말목 장날이었다. 석양(夕陽) 무렵에 마을 사람들이 수근수근 하더니 조금 있다가 통문(通文)으로 저녁 먹은 후에 장터에 모이라는 기별이 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 여러 마을에서 징소리며 나팔소리·고함소리가 천지에 뒤끓더니 수천 명 군중들이 우리 마을 앞길로 몰려오며 고부군수(古阜郡守) 탐관오리 조병갑(趙秉甲)을 죽인다고 하는 민요(民擾)가 일어났다. 수만 군중이 사방으로 포위하고 몰아갈 때 군수 조병갑은 정읍(井邑)으로 망명도주(亡命逃走)하여 서울로 도망갔다. 원래 조병갑은 서울의 유세객(有勢客)이었다. 이때 민요군(民擾軍)이 새벽[平明]에 말목 장터로 다시 모여 수직(守直)을 하니 누차 해산명령(解散命令)이 내려졌다. 민중(民衆)이 해산을 하면 장두(將頭)가 죽기 때문에 오랫동안 모여서 엄수(嚴守)하였다. 민요(民擾) 장두는 전명숙(全明淑, 전봉준)씨와 정서(鄭瑞, 一瑞의 오기)씨 등의 몇사람이었다. 당시 전주 병정(全州兵丁) 16명이 미복(微服)으로 철추(鐵椎)를 몰래 숨기고[隱藏] 두목(頭目)을 잡으려고 암행(暗行)하여 내려와서 민요소(民擾所)에 들어섰다. 그런데 장두청(將頭廳)에 대문(大門)이 달렸고 비밀스런 계획이 있는지를 병정이 어찌 알겠는가? 대장소(大將所)에 출입하는 사람은 모두 왼손 회목의 노끈을 매고 있었다. 전주 병정이 대문 안에 들어서자 수직군(守直軍)들이 포박(捕縛)하였으며 5∼6일간 고통을 주고는 백산(白山)으로 진을 옮기면서 좋게 석방해주니 그들은 백배사(百拜謝)를 하였다. 그 후 장터로 다시 와서 해산을 한 후에 전대장(全大將)은 동학밀도(東學密道) 부하 수십 명을 이끌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헤어졌다. 나는 3월에 정혼(定婚)이 되어 4월 초3일이 대례일(大禮日)이었다. 이때 인심이 소동(搔動)하고 유언(流言)이 흉흉하더니 초2일에 동학군(東學軍)이 무장(茂長) 임내(林內, 인내) 안 산골 속에서 무리를 모아서는 무장·고창(高敞)·고부의 3∼4개 군을 함락시키고 군기(軍器)를 탈취해서 말목 예동(禮洞)으로 행진(行進)하여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전주 병정 몇 소대가 부상(負商) 수만 명을 이끌고 우리 마을에 당도할 때 마을 사람들은 식수(食水)를 준비하였다. 주호(主戶)를 부르는 군령(軍令)이 엄숙(嚴肅)하여 내 부친께서 대장소에 들어서니 백미(白米) 3석(石)으로 밥을 지으라는 영(令)이 내렸다. 밥과 된장 통을 마련할 때 동학군이 천태산(天台山)을 넘어가니 병정들이 그 소식을 알고 바로 뒤쫓았다. 동학군이 황토(黃土)재로 올라가니 병정들은 쫓아가서 뒷 봉우리로 올라갔다. 초엿새날 새벽이 되자 총소리가 콩 볶듯이 요란하여 나는 아버님과 마을 앞 벌판으로 피난하였다. 지금은 그곳이 옥토(玉土)지만 신작로(新作路) 옆에서부터는 대부분이 갈대밭이었다. 4월 초5일 밤중이었지만은 나와 아버님은 물론 우리 마을의 남녀가 다 갈대밭에 숨었으며, 우장(雨裝) 도롱이로 엮은 배 위가 묶여서 푹석거렸다. 초6일 새벽부터 날이 새면서 소식을 들으니 전주 병정들이 패했다고 하였다. 만약 병정들이 이겼다면 고부는 도륙(都戮)되었을 것이다. 천운(天運)이 망극(罔極)하여 병정들은 검사봉(劍死峯)에 진을 쳤다가 패진(敗陣)했다 한다. 그 후로 동도(東道)가 크게 일어나서 면면촌촌(面面村村)에서 전도(傳道)가 바쁘고 입도인(入道人)이 발광하였다. 그들은 술과 안주를 먹고 장을 보았다. 거옥(巨沃)한 치성(致誠)으로 마을 안에 모여앉아 13자 주문(十三字注文)을 외기에 정신없었다. 그 13자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 강령문(降靈文)은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知 願爲大降, 知는 至의 오기)’이다. 이 주문(注文, 注는 呪의 오기)을 심신(心神)이 약한 사람이 많이 외면 강령(降靈)한다 했으며, 방에 앉아 뛰기 시작하면 목검(木劍)을 들고 춤을 춘다. 미친 사람의 모습이었다. 본래 동학의 교주는 경상도(慶尙道) 최학자(崔學子, 최제우)로 오만년무극대도천서(五萬年無極大道天書, 道는 運의 오기)를 옥제(玉帝)에게서 받아 포덕천하(布德天下)한다고 했으니, 그의 휘(諱)는 제우(濟兩) 호(號)는 수운선생(水雲先生)이다. 나는 갑오년(甲午年, 1894) 삼동(三冬)에 말못(말목의 오기)에서 『시전』을 읽었고, 을미년(乙未年, 1895) 삼동에 국정동(菊汀洞) 이진사(李進士) 앞에서 『서전』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