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유고(林下遺稿)
1894년 9월 일 제행일기[甲午九月日濟行日記]
1894년 1월 일[上之三十一年甲午正月日]
전라도(全羅道) 고부군(古阜郡)에서 민란(民亂)이 시작되었다. 군수(郡守) 조병갑(趙秉甲)이 끝없는 탐욕스러움과 포학함으로 정해진 이외의 세금을 수탈하자 백산(白山)·화호(禾湖) 등지에 쌓아 둔 수천 석의 곡식을 고부 군민들이 가서 먹어치우고는 모여서 난리를 일으켰다. 전명숙(全明叔)·정일서(鄭一西, 西는 瑞의 오기)·김도삼(金道三)이 무리의 괴수가 되어 석 달 동안 흩어지지 않자, 감사(監司) 김문현(金文鉉)이 영교(營校) 이재협(李在夾), 영리(營吏) 조동호(趙東昊), 병대(兵隊) 30명을 몰래 보내 난의 괴수를 붙잡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밀스러워야 할 일이 엄밀하지 못하여 도리어 붙잡히게 되어 병대 1명은 어지러운 방망이질에 맞아죽었다. 전명숙 등은 재앙이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민가의 총을 거두어들이고 민가의 농기구로 창과 칼 따위를 만들어 관군(官軍)을 거역할 계획을 세웠지만 백성들 중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작난(作亂)을 의심하였다. 새로운 군수(郡守) 박원명(朴源明)이 정일서·김도삼에게 청하여 화복(禍福)을 일러주고 중민(衆民)의 해산을 권하였다. 전명숙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포군(砲軍) 50명을 이끌고 무장(茂長)의 동학인(東學人) 손화중(孫化中)의 무리에게 합류하였다. 동학술(東學術)은 지난 경신년(庚申年, 1860)에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사람 최제우(崔濟愚)가 만든 것으로,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사르면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속여 중민(衆民)을 유혹하였는데 국법으로 금지하여 벌을 받아 죽었다. 그 도(道)는 귀천의 구별이 없고, 도(道)에 들어간 사람들을 접장(接長), 도를 전하는 사람을 접주(接主)라고 하였다. 도를 전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은 1만여 명이나 되고 적은 사람은 1,000∼2,000명이 되었으며, 무리를 모으는 것만 오로지 일삼았으니 연읍(沿邑)이 더욱 심하였다. 전라도는 서장옥(徐長玉, 長은 璋의 오기)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충청도(忠淸道)는 최시형(崔時亨)이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모두 제우(濟愚)의 제자들이다. 명숙이 화중에게 가서 동학의 무리 5,000∼6,000명을 불러 모아 무장(茂長)의 인천(人川)에서 왔는데 깃발 위에는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라는 6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동학도는 양식을 싸지도 않고 길을 떠나서 백성들의 곡식을 의지하기도 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기도 하였다. 연이어 무장·고창(高敞)·흥덕(興德)·고부·정읍(井邑)·태인(泰仁) 등의 읍을 함락시켰으며, 군기(軍器)를 빼앗고 관장(官長)을 능멸하기도 하였다.
4월[四月]
초4일
감영군이 부안(扶安)으로 들어가니 감사 김문현이 이곤양(李昆陽)을 영관(領官)으로 삼았는데, 곤양은 차함(借啣)이다. 감영(監營)의 병대 300명과 열읍(列邑)의 한정(閑丁)·부상(負商)·백정(白丁) 등 1만여 명을 이끌고 뒤쫓아 백산에 이르자 머물러 진을 치고 있던 동학의 무리들이 달아나다 고부의 황토치(黃土峙)에서 영군(營軍)과 만났다.
초7일
새벽에 동학군이 이곤양의 영군을 패배시키고 죽인 사람이 수 백 명이나 되었다. 군기(軍器)를 모두 빼았고 곧장 전주부(全州府)로 향했지만 한 성(省)의 힘만으로는 다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급히 전보를 보내 조정에 알리자 홍재희(洪在喜, 喜는 羲의 오기)를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하였다. 홍계훈이 경군(京軍) 1,500명을 이끌고 전주에 도착하자 진을 치고 머물러 있던 동학도(東學徒)가 영광(靈光)·무안(務安)·함평(咸平)으로 달아났지만 나주(羅州)에서는 매우 견고하게 성을 지키고 있어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초토사가 뒤이어 영광읍에 도착해서 경군 30명을 보내 동학의 거처를 정탐하게 하였다. 동학의 전군(全軍)과 장성(長城) 화룡시(華龍市)에서 만나 경군이 대포를 쏘아 수 백 명의 동학들을 죽이고 경군은 7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경군이 본진으로 돌아오자 동학도는 장성을 경유하여 다시 전주로 향하였다.
5월[五月]
27일
전주부로 들어가니 감사 김문현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성 밖의 민가는 거의 모두 불타고 동학은 성안을 근거지로 삼았다. 초토사는 완산(完山) 위에 군대를 머물면서 성안으로 대포를 쏘자 동학배(東學輩)가 세 차례나 성을 나와 몸에 탄환을 맞은 자들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상황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고 글을 보내 초토사에게 애걸하면서 군대를 거두고 귀화할 것을 청하였다. 초토사가 그들의 말을 믿자 동학들이 성문을 열고 달아났다. 이 때 황해(黃海)·평안(平安)·함경(咸鏡) 3도(三道)에서 청(淸)·왜(倭)가 병사를 조련하고 있었지만 거리가 있고 또 나라에 일이 많아 우선은 동학이 귀화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감사 김문현, 전운어사(轉運御史) 조필영(趙弼永),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 전 군수(前郡守) 조병갑에게 모두 찬배(竄配)의 형전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신임 감사(監司) 김학진(金鶴鎭)이 동학을 안심시켜 비록 귀화시키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동학도가 갈수록 더욱 창궐하여 관의 곡식과 개인의 재화를 마음대로 출납하였는데도 열읍(列邑)의 수령들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원망을 품은 무리들과 부랑자들이 다투어 동학으로 들어가 스스로 의병(義兵)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접주(接主)가 출입할 때 기를 들고 나발을 불면서 총포를 쏘는 병사들이 앞뒤로 골목사이에 호위하였는데, 쏘는 포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비록 오합지졸들이지만 다시 개미떼와 같은 형세를 이루었으니 어찌 황지롱병(潢池弄兵)이라고 논할 수 있겠는가?
9월[九月]
27일
전라도 부안현 동문(東門) 중리(中里)에서 길을 떠나 서쪽으로 10 리에 있는 염소포(鹽所浦)에 도착하여 제주(濟州) 우도(牛島)의 강윤각(姜允恪)의 배를 타고 제주로 향하였다. 이 행차를 계획한 것은 모두 사제(舍弟) 방훤(邦烜)이 한 것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 비밀스러워 오직 친척들 가운데 그 일을 아는 사람들만이 와서 모였는데, 종제(從弟) 찬문(贊文), 당질(堂姪) 윤명(允明)·윤초(允初)·명숙(明叔)·인석(寅錫)·용욱(龍旭), 재종질(再從姪) 추경(秋卿), 종손(從孫) 성률(成律), 재종손(再從孫) 성습(成習), 삼종손(三從孫) 손공집(孫公集), 표종제(表從弟) 신일첨(辛一詹), 친구 박자삼(朴子三)·김치도(金致道)·신주경(辛周卿)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송별하였다. 사질(舍姪) 규문(奎文)·규섭(奎燮)·규순(奎淳), 종제(從弟) 낙삼(洛三), 친구 강사희(姜士希)가 뱃머리에 와서 전별하였다. 당시 어머니의 소상(小祥)이 겨우 지나 최마(衰麻, 상복)를 입고 있었다. 둘째 동생 방륙(邦陸)과 조카 6 명을 데리고 가지 않아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마음이 바뀌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염소(鹽所)에 사는 신도여(辛道汝)는 나에게는 재종처남(再從妻男)이 되고, 그의 아비 응환(應煥)씨와 신동직(辛東稷)씨는 우리 아버지와는 생전에 교분이 특별이 두터워 두 집안의 우의는 좋아 속마음을 터놓고 이별하려고 방문을 하였는데 마침 그는 외출을 하고 집에 있지 않아 서운했다. 이날 밤 항구에 정박하여 묵었다.
표종제 신일첨에게 답하는 글[答表從弟辛一詹書]
김학원(金學源)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시대적 상황이 호랑이의 꼬리를 밟은 듯 한데, 헤어져 1만 리 바다를 건너가니 바닷물이 넓은가? 아니면 이별의 회보가 깊은가? 강문통(江文通)의 별부(別賦)에 이르기를, “암연히 사그라드는 혼은 오직 이별일 뿐이네”라고 하였다. 이 무렵에 와 닿는 것마다 슬픔이 생겨나 가슴 속 가득 피가 끓어 비록 오색채호(五色彩毫)가 있다 한들 잘 표현해 내지 못할 듯 싶다. 그러나 조만간 만날 수 있을 지는 오직 하늘이 나라를 보호하려는 뜻에 달려 있을 뿐이다. 김학원은 제주 성내(城內)의 사람으로 일첨과는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어 서찰을 보내 부탁해 두었다.
28일
식구들과 함께 처 신씨(辛氏)와 두 딸, 아우 방훤, 형수 이씨(李氏), 조카 규봉(奎鳳), 질녀(姪女), 속비(贖婢) 순임(順壬)·김영돌(金永乭)·송청보(宋靑甫) 이하 사람들을 태우고, 이날 낮 조수(潮水)를 따라갔지만 배가 미처 수 리(里)도 가지 못하고 조수가 얕아져 배가 바닥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다가 밤 조수에 떠날 수 있었다.
29일
새벽에 모항포(茅項浦)에 도착하니 재종질 추경이 첩을 데리고 이곳에 우거(寓居)하고 있어 내행(內行)으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밥을 먹게 하였다. 추경은 읍에 있는 집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마을 사람 허응식(許應植)과는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는데 나의 재종질 연중(連中)의 딸과 약혼을 한 사이로, 이날 관례를 행하였다. 일행을 데리고 그의 집에 가니 나와 방훤에게 술을 대접하였다. 이보다 앞서 박원오(朴元五)의 배가 머물러 정박하여 대접을 받고 있었다. 박원오는 정읍 사람으로 장사꾼인데, 부안(扶安) 줄포(茁浦)에 와서 우거하고 있으면서 방훤과 오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가 이번 길을 떠나면서 연로하신 아버지에게 그 연유를 고하자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내 나이 장차 90으로, 서산에 해는 벌써 저물었으니 너는 식구들을 데리고 가서 때의 어지러운 화를 면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장남(長男) 득중(得中)에게 정읍 고향에서 조부(祖父)를 모시게 하고는 비로소 처 김씨(金氏), 둘째 아들 창국(昌國), 셋째 아들 말동(末同), 딸, 방훤의 측실(側室) 김씨가 낳은 아들 규택(奎澤), 담양인(潭陽人) 양계현(梁季賢)을 배에 태웠다. 계현의 아버지의 호는 추초(追樵)이며, 근칙(謹飭)한 선비로 문사(文辭)가 풍부하고 나와 시를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영북수초록(瀛北隨草錄)』에 실려 있다. 의술에 밝아 줄포에 와서 지내면서 약재를 걸어 놓았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계현은 그의 막내아들이다. 방훤이 제주로 간다는 것을 알고는 계현을 맡겼다. 이에 떠나려 함에 방훤과 헤어지고 이틀을 쌍포구(雙浦口)에서 자고는 만나지 않고 다만 절구(絶句)와 소서(小序)를 남겨 두고 돌아갔다.
쓸쓸한 낙엽은 장주(長洲)에 떨어지는데
천리 길 행장 낙엽편주에 맡기네.
사방에 가득한 전장의 안개는 눈물을 견디지만
오경의 서리와 눈은 도리어 머리를 침범하네.
추옹(樵翁)은 멀리 이별의 글을 전하니
내우(萊友, 옛벗)를 찾으며 아직도 머물러 있네.
슬프다! 고향을 이렇게 이별하니
끝없는 나의 슬픔 물과 함께 흐르네.
[방훤이 짓다.]
수성(壽星)과 남극(南極)은 장주(長洲)를 비추는데
남은 뼈를 수습하여 떠나는 배에 싣네.
9월 서릿바람 나뭇잎에 불어오는데
천년의 봉우리는 오두(鰲頭)를 이고 있네.
수고로움을 나누며 호월(胡越, 남쪽 오랑캐땅)에서 생사를 함께했는데
난리로 훈지(塤篪)가 이별을 달리 하네.
고향은 아득히 어디에 있나?
피눈물을 참지 못해 만 줄기나 흐르네.
[내가 화답한 것이다.]
이날 밤 배 위에서 자고 바람이 불어 배가 떠날 것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