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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0월[十月]

초1일

칠산(七山)과 대양(大洋)을 지났다. 칠산은 점점이 바둑돌을 둔 것과 같아 칠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매년 한식절(寒食節)이면 각지의 고깃배가 이곳에 와서 석어(石魚, 조기)를 잡았는데, 이곳은 부안의 끝 지점으로 고향 산천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아! 9세 조고비(祖考)(妣) 이하 산소가 모두 부안에 있고, 종족(宗族) 수삼백(數三百) 명의 복(服)이 있고, 지친(至親) 50∼60여 명이 서로 경조(慶弔)의 예를 행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천리로 이별하여 만날 기약이 없으니 고향을 그리는 생각 어느 때인들 잊을까? 영광(靈光)의 경계에 이르니 여러 섬들이 화살촉처럼 늘어서 맑은 기운이 모인 듯하였다. 오량(五兩)의 바람도 파도를 일렁이게 하는 것이 마치 짜놓은 무늬와 같았다. 과연 산 옷깃과 바다 띠라고 할 만하였다. 아깝다! 동학에 물든 먼지가 시운을 억눌러 그렇게 된 것인가?

초2일

나주(羅州) 경계에 이르니 떠 있는 많은 섬들이 점점 멀어지고 해문(海門)과 평평하게 펼쳐진 바다와 열읍(列邑)의 산들이 차례대로 드러나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으로 돌아보면서 붓을 적셔 기록할 만한 것이 많았다. 뱃사공들은 문자에 어두워 잘못된 말이 많아 모두 기록할 수가 없었다. 수영(水營) 앞바다에 이르자 성첩(城堞)이 산에 의지해 있고 나무들은 하늘에 맞닿아 있으며 민가는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은은하게 비치는 것을 바라보았는데 이때 왜선(倭船) 한 척이 바다에 정박을 하고 있어 배의 화려한 형상은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조금 앞으로 나아가니 좁던 입구가 더 좁아져 여울이 급히 흐르고 눈처럼 물결을 흩날리고 바람도 없는데 배가 흔들려 사람들은 모두 공경하고 조심하였으니 하늘이 베풀어놓은 위험이라고 할 만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이곳에서 왜적을 섬멸하고 공을 세웠다고 한다. 벽파정(碧波亭) 앞 바다에 정박을 하고 묵었다. 밤 조수에 배를 출발하였다.

초3일

새벽에 보길도(甫吉島)에 도착했다. 바람이 풍랑을 일으키며 나뭇잎이 어지럽게 날리어 땅의 모난 바위로 옮겨 정박을 하고 동행할 박원오의 배를 기다렸지만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당시 방훤이 그 배를 타고 있어 근심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초4일

제주 별도(別島)의 임일돌(林一乭)의 배가 옥구(沃溝) 군산창(群山倉)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육지의 소식을 물었다. 답하는 말에 우리 형제의 두 배에서 백미(白米) 120석을 약탈당하였고, 강진(康津)·해남(海南) 등지의 상선(商船) 10척 역시 군산창의 동학무리들에게 약탈을 당하여 뱃길이 이로부터 막혔다고 알려 주었다. 이날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인데도 원오의 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초5일

선주(船主) 강윤각과 동행하며 물건을 되찾을 것을 의논하고 마주 앉아 걱정을 하는데 제주사람 윤정학(尹正學)이 작은 거룻배를 타고 와서 말을 전했다. 박원오의 배가 3일 새벽에 벽파정에서 길을 떠나 도중에 바람을 만나 난진(蘭鎭)에 이르러 하루를 묵고, 다음날 만난 노화도(蘆花島) 손달원(孫達元)의 계씨(季氏)가 줄포 선여각(船旅閣) 주인에게 우거하고 있었는데 당시 주객이 서로 익숙하게 아는 사이라 함께 노화도 정구미(井九味)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으면서 소식이 통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면서 탐문하였다고 하였다. 이날 밤 소안도(所安島) 깊은 바다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전송하였다. 밤이 깊어 배가 도착한 뒤 제주로 향하여 돛을 걸었다. 밤 빛은 희미하고 파도는 넘실대어 미처 반도 가지 않아 역풍이 불어와 뱃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며 배를 돌렸다. 잠깐 사이에 바람이 다시 잔잔해져 새벽까지 배를 타고 갔다.

초6일

날씨가 맑고 좋아 한라산(漢拏山)이 비로소 보였다. 마치 크고 훌륭한 덕을 가진 대인이 엄연하고 단정이 앉아 끝을 드러내지 않고 화열(和悅)한 낯빛을 띤 듯 움켜잡을 수도 있을 듯하였다. 나는 평소 병으로 멀리 유람을 할 수가 없어 비록 눈앞의 산조차도 한걸음도 즐긴 적이 없었는데 지금 시세(時世)의 근심으로 인하여 명산에 늙은 몸을 내맡겼으니 기이한 일이다. 뱃사람이 나에게 이르기를, “존객(尊客)께서는 어젯밤 위험을 아시는지요? 바람이 이롭지 않았는데 서쪽으로 청국(淸國)으로 가거나 동쪽으로 일본(日本)으로 가지 않고 마침내 순풍을 만나 큰 바다를 무사히 건넜으니 식구들의 큰 복입니다”라고 하면서 서로 위로하였다. 신시(申時, 오후 3∼5시) 쯤에 제주 우도에 도착하였다.

초7일

선주 강윤각에게 가니 객실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서로 이름을 알리고 술을 대접받았다. 우도는 본래 소와 말을 기르는 목장이었다. 지난 갑진년(甲辰年, 1844) 허(許)씨가 처음으로 밭을 개간한 것이 풍족하고 민가가 400여 호(戶)가 되는데, 벽돌로 담장을 높이 쌓고 밭두둑 역시 이처럼 하였다. 처음 이곳의 여인들을 보니 모두 이고 지고 남자들의 일을 하면서 물에 들어가 미역·전복을 땄는데 이름하여 잠녀(潛女)라고 하였다. 비록 산업(産業)으로 생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 실정이 측은하였다. 남자들은 부표를 타고 물고기를 낚았으며 해산물의 수익이 다른 곳보다 넉넉하였다. 밥을 하기 위한 땔감나무와 이엉으로 덮는 띠풀은 나루를 건너 마련하였고 빗물을 모아 음료로 삼았으니 이것이 흠이었다.

초8일

행원(杏源)에 살고 있는 선달(先達) 송경서(宋敬瑞)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경서는 부안 계화도(界火島) 사람으로 식견이 탁월하여 세상이 혼란할 것을 미리 알고 몇 년 전부터 옮겨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섣달 상선(商船)에 쌀을 싣고 행원에 도착하여 흉년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집집마다 쌀 2되씩 주어 섣달그믐의 꺼리로 삼게 하자 백성들이 본목(本牧)에게 알려 본목이 불러 축하하며 술을 대접하였고 백성들의 마음을 후하게 얻었다. 방훤과 동행할 것을 약속하여 지체하기가 어려워 차례대로 행원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초9일

송경서의 답이 왔는데 고인(雇人)에게 일을 하도록 하고 방훤과 박원오를 만날 것을 청하였다.

10일

방훤과 원오가 송경서의 집에 갔다.

11일

밤에 뱃사람 고대원(高大元)과 함께 뱃머리에 앉았다. 대원이 말하기를, “존객께서는 노인성(老人星)을 아시는지요?”라고 하여, “모르겠소!”라고 하자, “남극(南極)의 가장 큰 별입니다. 매일 밤 저 곳에서 나와 한 시간 정도는 보이다가 다시 들어갑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섬에 가장 장수하는 사람은 몇 살이나 됩니까?”라고 하자, “100세 노인도 있고, 간혹 80∼90세 노인은 허다합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제주도엔 노인이 많다고 들었는데 정말이군요”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과연 길성(吉星)이 비춘다는 증거일 것이다.

12일

방원과 원오가 행원에 집을 사놓고 왔다.

13일

14일

15일

16일

17일

배가 가기가 어려워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

18일

행원으로 옮겼다. 민속(民俗)이 우도와 같았지만 밭은 대부분 척박하고 기름진 곳은 적었다. 해산물의 수익은 미치지 못하지만 땔나무와 물은 풍족하여 송경서를 만나 바닷길의 고생을 위로하였다. 어느 날 배를 출발했고, 어느 날 정박을 했으며, 태운 사람들에 관하여 물었다. 대답하기를, “9월 19일 계화리에서 출발하여 25일 행원에 도착을 하였고, 처 이씨(李氏), 아들 남석(南石), 어린 아들 1 명과 딸 5 명, 고정(雇丁) 오달용(吳達用), 비(婢) 분례(分禮), 삼종제(三從弟) 윤보(允甫)와 아들 달순(達順)과 딸 1명, 김원택(金元宅)과 처 송씨(宋氏)와 아들 판용(判用), 어린 아들 1명이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같은 고향사람들로 서로 안개 낀 수 천리 밖에서 만나 동학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종사(宗社)를 보존하여 이 땅에서 슬픔과 경사를 더불어 함께하니 정의(情誼)의 돈독함은 천륜형제(天倫兄弟)에 견줄 만하기에 제주행의 전말을 기록하고 여러 집안에 보관하여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조상이 당시 함께 고생한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선대의 정의(情誼)에도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경서가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생각이니 어찌 기록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사제(舍弟) 방륙(邦陸)에게 주는 글

지난 번 헤어질 때 남은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번 달 초 6일 제주 우도에 도착하여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여 행원으로 옮겼다. 앞서 도착한 송경서를 만나 집을 사서 편안히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사람들의 습속은 질박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없으니 상고시대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시대의 어지러움이 조금도 없어 화를 피할 만한 곳이라 생각이 된다. 그러나 땅값이 너무 비싸 올 때 가기고 온 것이 너무 적어 새로 생활해야하는 여러 가지 절목들에 있어 절로 갈등이 되어 탄식스럽구나. 본읍의 요사이 풍색(風色)은 어떠하냐? 식구들은 별탈이 없느냐? 내가 떠난 뒤로 집안의 지친(至親)들은 반드시 많이들 걱정할 터이니 너는 이 편지를 보여주어 안심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의 농조(農租, 소작료)는 힘닿는 대로 부쳐 보내기를 바란다. 나머지는 황망하고 정신이 없어 이만 줄인다.

19일

20일

배에서 내렸다.

21일

집값으로 220냥이 들었다.

22일

겉보리 14마지기를 갈았다. 밭 값은 310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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