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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고부(古阜) 민란의 괴수(魁首) 전명숙(全明叔)이 한 지역의 백성들을 이끌고 수개월을 백산(白山)에 머물렀다. 이에 정읍(井邑)의 손화중(孫和中)이 동도(東徒) 수 천 명을 환기시켜 인천강(仁川江, 인내)에서 고창읍(高敞邑)에 모였는데 동학란(東學亂)이 이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 괴수는 보은(報恩)의 최제우(崔濟愚)와 최시형(崔時亨)이라고 한다. 제우는 이미 나라에 붙잡혀 참수를 당하였지만 시형은 달아났으니 그 무리가 일어난 것도 시형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4월[四月]

초5일

다시 고부 천치(天峙)에 모였는데 본도(本道) 감사(監司)가 본영(本營)의 군대를 보내 그들을 물리치고는 이에 각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성을 지키고 적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때 적의 기세가 바야흐로 성하였다.

초5일

초8일

본 읍성(邑城)을 도륙하였다. 다음 날 무장읍(茂長邑)을 도륙하고 인가를 불사르며 노략질하는 것이 더욱 심하였다. 이때 왕사(王師, 경군)의 행차가 이웃 경계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여항(閭巷)의 잔민들은 두려워하며 병사를 모으고 산길로 가서 노숙하는 자들이 꽤나 많았다.

10일

적병(賊兵)이 영광(靈光)에서 함평(咸平)으로 내려와 머물렀다.

15일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禧, 禧는 羲의 오기)가 경군(京兵) 3,000 명을 이끌고 과연 본읍(本邑)에 와서 머물러 진을 쳤다. 다음 날 무장에서 영광으로 와서 묵고 곧바로 함평에 도착하자 적병은 벌써 나주(羅州)에서 장성(長城)의 황룡강(黃龍江)에 이르러 월평(月坪)에 주둔하였다. 다음 날 경병대관(京兵隊官) 선전(宣傳) 이학승(李學承)이 기병(騎兵) 200 명을 이끌고 뒤쫓아 신촌(莘村)에 진을 치고 맞붙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학승은 전사하였으니 이날은 바로 4월 22일이다. 적의 사망자도 매우 많았다. 적들은 군대가 후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이 각자 제 살기를 도모하여 밤낮을 따지지 않고 이험(夷險)을 가리지 않으며 노령(蘆嶺, 갈재)에서 다시 정읍에 모였다가 며칠이 되지 않아 완성(完城)을 함락시키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감사는 달아나고 도성(都城)은 잃어버려 적의 기세가 더욱 떨쳐졌다. 집들은 불타고 남녀 사상자는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28일

초토사 홍재희가 군사를 되돌려 본읍에 이르러 머물렀다. 다음 날 흥덕(興德)으로부터 와서 정읍에서 묵었다. 세 번 째날 전주(全州) 인근에 도착하여 용두현(龍頭峴)에 진을 쳤다. 이때 평양(平壤)의 군대 500명이 합병하자 기세가 크게 떨쳐졌다. 서로 몇 과녁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적들은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다음 날 순식간에 맞붙어 크게 적진을 깨부수자 적들은 되돌아가 성문을 굳게 닫고서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강화를 요청하자 초토사는 무릇 백성들이 무고하게 전쟁의 피해를 보는 것을 애처롭게 여기고 임금으로부터 또 고유문(告諭文)이 있는 터라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적들은 이에 흩어지고 초토사는 본영에 병기를 남겨둔 채 군대를 돌려 북으로 올라갔다. 이로부터 적들은 포학한 짓을 함부로 자행하여 각 고을에 도소(都所)를 크게 설치하였으니 모두 12포(包)였다. 큰 포는 1만 명, 작은 포는 600∼700명이었다. 적들이 이르는 열읍(列邑)은 그들의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한사람도 굳게 지키는 사람이 없었지만 오직 나주(羅州)와 운봉(雲峯) 두 고을만은 끝내 잃지 않았다. 6월부터 9∼10월까지 형벌로 억누르고 살육을 더하면서 군기(兵器)를 빼앗고 곡식을 탈취하는 등 말류(末流)의 폐단까지 하지 않는 짓이 없자 일대가 소연(蕭然)하여 사람들은 살고 싶은 의지가 없어 모두 왕사(王師)의 군대가 출정하기를 마치 큰 가뭄에 구름을 기다리는 듯하였다. 이 때 전명숙은 이미 전주에서 군기를 탈취하고 북으로 올라가 금강(錦江)에 주둔하고, 김기범(金箕範)은 남원에 모여 15일을 주둔하면서 남원부사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죽이고 이어서 북으로 올라가 모든 포(包)를 합하여 공주(公州)에 모이자, 본영의 병정(兵丁)이 출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이때 조정에서 출병하라는 명령이 있어 신정희(申正禧, 禧는 熙의 오기)를 도원수(都元師)로 삼고, 이규태(李圭台, 台는 泰의 오기)·이두황(李斗璜)을 좌우 선봉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전명숙과 접전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신 원수(申元師)가 공주에 머물고, 좌우 선봉은 승기(勝氣)를 타고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 나란히 정읍의 천원(川原)역에 이르기 까지 모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이기면서 추격하자 전명숙은 노령(蘆嶺)을 넘어 사가리(四街里)에 이르렀다. 전명숙은 밤을 틈타 달아나고 왕사는 이미 장성부(長城府)로 들어가 진을 치고 머물렀다. 왕사의 한 부대는 흥덕에서 고창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나주목사(羅州牧使) 민종렬(閔種烈)이 초토사로 굳게 본성(本城)을 지켰는데 적을 막아낸 방법과 적을 토벌한 꾀는 일찍이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매일 죽인 적이 적어서 20 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적에게 욕을 당한 것이 자못 여러 번 이었다. 이때 손화중·최경선(崔景先, 先은 善의 오기)·홍낙관(洪洛觀, 觀은 寬의 오기)·오중문(吳仲文, 仲文은 勸善의 자)등이 금성(錦城)을 도륙하고 각 포(包)의 흩어진 무리들을 수습하여 장성의 황룡(黃龍), 나주의 북창(北窓) 등지에 모여 적의 기세가 크게 떨쳐졌다. 그 사이 민생은 도탄에 빠져 아녀자들은 울부짖고 통곡을 하니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12월[十二月]

초3일

왕사가 과연 본읍의 경계로 들어가 묵었다. 다음 날 다시 장성에서 합병을 하니 병세(兵勢)가 크게 떨쳐졌다. 이때 백성들은 살아갈 뜻이 마치 큰 가뭄에 비를 만난 듯이 여겼다. 손화중 등은 이에 유곡(維谷)의 형세를 알고 살 것을 도모하여 각기 달아날 곳을 모의하여 병기를 던져버리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갔다. 오합지졸들은 마치 바람 앞에 낙엽처럼 떨어지니 이에 각 벼슬아치들에게 명하여 성을 지키고 적들을 체포하며 도로 옆에는 모두 군막을 설치하고 수색하여 체포하도록 하였다. 또 영문(營門)에 감결(甘結)의 방을 걸어 말하기를, “적들 가운데 목을 베어 바치는 자에게는 속죄하고 상을 논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하로 그물을 쳐놓아 그들은 하늘에 오르거나 땅으로 숨어들 방법이 없었다. 비록 그 무리들이 억만의 수가 되지만 도리어 앞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배반하는 상황을 보였다. 전명숙·손화중·김기범·홍낙관 등의 여러 괴수들은 모두 사로잡혔고, 각 전장에서 죽은 자들은 마치 산을 쌓아 놓은 듯하여 그 수를 이루다 셀 수가 없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각 읍으로 들어가 뒤쫓아 체포하던 중 보은(報恩)의 최시형은 지금껏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나머지 놓쳐 잡지 못한 자들도 간혹 있기는 했지만 을미년(乙未年, 1895) 2월이 되어서야 먼지비가 비로소 개고 하늘이 다시 맑아졌다. 각 벼슬아치들 가운데 공적이 있는 사람들은 태평성대를 즐거워하였다.

4월[四月]

15일

밤 꿈에 어떤 부녀자 수 십 명이 모두 소복을 입고 흰 포대기를 메고 왔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자 그들은 동학의 부녀자들로 장성·청암(靑岩) 인근, 백암(白岩) 경계에 사는 사람들로 경병(京兵)이 온다는 말을 듣고 난리를 피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이윽고 또 무뢰배 1,000 명이 모두 평양 갓을 쓰고 말을 탄 채 깃발을 잡았는데 깃대는 대나무로 만들고 깃대의 장식은 마포(麻布) 3척(尺) 쯤으로 만들었다. 고사치(古沙峙)에서 검암(儉岩) 뒷길로 곧바로 본읍으로 내려가는데 내가 갑자기 놀라 깨고 보니 꿈이었다. 마음속으로 스스로 점쳐보니 여자의 소복은 남편을 잃은 것이오, 남자의 마포깃발은 그들의 명정(銘旌)이었던 것이다. 동학의 하는 바를 마치 폐간(肺肝)을 보는 듯하니 그들의 패함은 필연적인 것이다.

주석
고부 천치(天峙) 천치는 오늘날 고창의 덕정과 당촌에서 정읍 부안면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고개를 말한다.
평양(平壤)의 군대 500명이 합병하자 평양의 수비병인 기영병(箕營兵)은 서울 수비를 위해 배치했지 남하하지는 않았다.
도소(都所) 전라도 각 고을에 집강소를 차리고 농민통치를 단행한 사실을 말한다. 그 규모에 따라 도소, 대도소라 불렀다.
나주(羅州)와 운봉(雲峯) 나주에는 목사 민종렬과 수성군, 운봉에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고 집강소 설치를 막았다.
남원부사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죽이고 2차 봉기 시기의 사실을 말한다. 김개남은 남원에 49일을 머물렀다고 했고 남원부사와 장흥부사를 죽인 사실이 없으니 사실 오류이다. 장흥부사 박헌양은 장흥전투에서 시기 죽었다.
천원(川原) 천원은 현재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를 말한다. 이곳은 예전 역참이 있었고 장성의 입암산성과 가깝다. 전봉준은 태인에서 패전한 뒤 입암산성에 숨어 있다가 순창으로 도피했다.
나주의 북창(北窓) 등지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그리고 무안의 배상옥이 이끈 농민군은 1894년 11월 나주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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