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寄]
一. 지금 4월 초 6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부안현 공형이 낸 문장(文狀)에서, “부안현감이 저들에게 곤욕을 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며, 공형 또한 저들에게 주리를 틀리고 매우 맞아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있습니다. 주둔한 저들 무리들은 군기를 빼앗아, 그날 진시 무렵에 남쪽대로를 향하여 갔으며, 그들이 간 것은 아마도 고부군으로 향하는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잇달아 도착한 당일 신시(申時)에 낸 부안현의 보고에, “현감이 그간 저들에게 잡혀 있다가 저들이 떠나려고 할 때 겨우 몸을 피하였는데, 김제 죽산에 영군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급히 진이 있는 길을 택하여 가다가, 또 죽산 진영의 군대가 고부로 돌아서 향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백산으로 갔다. 그러나 죽산과 백산 양 진이 합세하여 이미 군대를 이동시키고 저들 무리들이 향하는 곳으로 전진하였으므로 현감은 그대로 관청으로 돌아갔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별초군(別抄軍) 80명은 순영문에서 함께 점검하여 최한택(崔漢澤)은 본진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一. 4월 초 7일 오시(午時)에 낸 금구현의 보고에, 저들 무리들이 고부 황토산 영진으로 진을 옮겼다고 하며, 또 황토산 아래에 진을 쳐서 신시(申時) 무렵 접전을 하였고, 그날 동이 틀 때에 패주하여 도망쳐서 각처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一. 초토사또가 경군 5백 명과 청나라 사람 10명을 이끌고, 4월 초 7일 영하에 행차하였습니다.
一. 우영관(右領官) 이곤양(李昆陽), 대관(隊官) 이재섭(李在燮), 유판근(柳判根), 교장(敎長) 백경찬(白景贊), 진영교(陳永敎), 서기 이돈승(李敦昇), 김화형(金化炯) 등이 병사와 각 읍에서 와서 기다리고 있는 포군 등을 이끌고 4월 초 3일 사시(巳時)에 행군하여 출발하였습니다.
一. 초토사가 경군 900명을 이끌고 군산항에서 4월 초 7일 전주부에 들어가서 유숙하였고, 청나라 사람 17명은 대환포(大丸砲) 4좌를 지고서 함께 와서 그들에게 대접할 것과 처소를 순영과 부의 각 공청에 나누었습니다.
一. 대관인 유판근, 이재섭과 교장 백경찬, 진영교, 집사 정창권(鄭昌權)은 고부군에서 4월 초 8일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피하여 달아나 돌아 왔습니다.
一. 4월 초 8일 인시(寅時)에 낸 정읍현의 보고에 저들 무리 수천 명이 4월 초 7일 미시(未時)에 고부의 경계에서 이곳에 도착하여 정읍현의 경계 연지(蓮池) 모천(茅川) 강변에 모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술시에 곧바로 읍내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一. 군수에 보충하기 위하여 내는 돈은 여산(礪山)의 수령이 500냥, 김제의 수령이 300냥이며, 모두 단자를 갖추고 아울러서 올라 올 것입니다.
一. 4월 초 8일 정읍 겸임 태인현에서 보고한 내용에서, “저들 무리가 곧바로 장청에 들어가서 방문을 부수고 갇혀 있는 저들 무리 6명을 풀어 준 후 또 군문을 부수고 많은 양의 기계와 창과 검을 가져갔으며, 동헌 각 곳에 있는 공형과 여러 서리들과 도사령(都使令)의 가산을 모두 부수고, 부상들이 살고 있는 3채로 모두 불살랐으며, 곧바로 저녁밥을 먹고 해시(亥時, 오후 9~11시)에 곧바로 고부 삼거리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8일 유시(酉時)에 낸 금구현의 보고에서 저들은 그날 동이 틀 무렵 흥덕현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고부, 부안, 태인, 고창, 정읍 등 5개 읍의 군기를 저들 무리들이 모두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