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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계사년(癸巳年, 1893) 겨울, 내가 일로 경성(京城)에 있으면서 국태공 석파옹(國太公 石坡翁, 대원군)을 운현궁에서 뵈었다. 공은 매우 나를 아끼어 나를 손자로 부르셨고 내가 날마다 찾아뵈었더니, 아끼는 글씨와 그림들을 꽤 많이 주셨다.
갑오년 봄, 내가 전주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씀드리자 공께서는 친히 석란(石蘭) 10폭을 그리고 그 위에 “내가 난을 친지 50년이 되도록 의리를 저버리고 시세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는데 이 소년은 영남의 유서 깊은 집안의 태생으로 인상이 청아(淸雅)하고 멀고 먼 천리 길 큰 고개를 넘어와서 나의 노필(老筆)을 구하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석란 10폭을 그려 충정에 표하니 향기로운 난초처럼 곧은 돌처럼 영원히 서로 잊지 말자. 석파 75세에 쓰다”라고 썼다.
4월 초에 내가 짐을 꾸려 길을 나서려고 하는데, 마침 동학당(東學黨)이 호남에서 난을 일으켜 조정에서 관군(官軍)을 보내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호서와 호남으로 가는 길은 매우 위험하였다. 그래서 주저하면서 출발하지 못하고 난리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4월 27일 관군이 불리하고 동도(東徒)가 전주를 함락한지 여러 날이 지났다는 소식을 갑자기 들었다. 또 관군이 전주성 밖을 방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집도 성 밖에 있는데, 부모님의 안부를 모르겠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마침내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나서 5월 9일에서야 비로소 전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우(祠宇)가 모두 불탔으며 겨우 생명만 보존할 수가 있었다. 부모님과 처제는 각자 동서로 흩어졌다. 이때 동도는 이미 성 밖으로 나와 관군들이 겨우 성 안으로 들어갔다.[이상은 동학들이 난을 일으킨 경유를 소략하게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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