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봄, 고부 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정치를 잘못하였다. 이 때문에 고부의 사인(士人) 전봉준(全琫準)[사람들은 全祿豆라고 부른다]은 적으나마 지기(志氣)가 있어 드디어 인민을 불러 모아 군수의 죄를 성토하며 무리지어 흩어지지 않았다.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兌, 兌는 泰의 오기)가 안핵사(按覈使)로 고부군수를 조사하였지만, 이 사람 역시 공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심은 더욱 경색되었다. 전봉준은 동학에 들어가 동학도인이라 칭하고 동학의 거괴(巨魁)인 금구(金溝)의 김덕명(金德明,) 무장(茂長)의 손화중(孫化中), 태인(泰仁)의 김개남(金開南)과[각기 무리 수 천명을 가지고 있었다.] 관계를 맺고, 각기 무리를 이끌고 합하여 큰 세력을 이룬 뒤 고부에 주둔하였다. 전라관찰사 김문현(金文鉉)이 관리를 보내 효유(曉喩)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이에 무남영(武南營),병사 300명을 파견하였는데, 곤양(昆陽) 이근창(李根昌)과 초관(哨官) 이재한(李宰漢)·유성후(柳成厚) 등이 거느렸다. 보부상(褓負商) 도반수(都班首) 송봉호(宋鳳浩)가 보부상 수천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따랐는데, 동도는 충분히 상대가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장수는 지략이 없고 군대는 기강이 없어 한갓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만 있었다. 관군은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주민들을 약탈하였다. 관군은 고부에 도착해서 백산(白山) 꼭대기에 진을 쳤다. 날이 저물어 바야흐로 저녁을 먹으려 하는데, 군대는 항오(行伍)를 잃어 다만 배를 채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동도가 기회를 틈타 별안간 습격하여 죽이자, 관군과 보부상들은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무너졌으며 서로 짓밟아 죽은 사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영관(領官)인 곤양 이근창이 죽고 나머지는 각자 달아났다. 이 때부터 동도의 기세가 더욱 커져 더 이상 평정할 계책이 없자, 전라관찰사는 감히 숨기지 못하고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걱정을 하면서 선전관(宣傳官) 이수(李壽)를 보내 입으로 효유하도록 하였지만, 금구원(金溝院) 들판에 이르러 피살되었다. 이에 경영병(京營兵, 장위영 병사) 3백명과 강화병(江華兵) 2백명을 보내 홍재희(洪在禧)[啓薰으로 개명하였다.] 를 장수로 삼아 가서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관군이 전주에 이르러 전 영장(前營將) 김시풍(金始豐)과 전 오위장(前五衛將) 정석희(鄭錫禧)를 참수하였는데, 대개 참소로 인하여 잘못 죽인 것이었다.
살펴보건대, 김시풍과 정석희 두 사람은 본디 담략이 있는 데다가 경력도 있었다. 비록 나이가 연로할지라도 기력이 강하여 지난 고부 백산전투에서 이 두 사람을 장수로 삼았다면 반드시 낭패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홍(洪, 홍계훈)이 전주에 도착하여 패군(敗軍)의 장수를 죽이지 않고 군기를 엄숙히 하였지만, 도리어 간세(奸細)한 첨언으로 인하여 갑자기 쓸모가 있는 두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홍이 이처럼 밝지 못하였으니, 어찌 장수노릇을 할 수 있었겠는가? 홍이 패배를 당한 것은 진실로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두 사람의 죽임으로 동도가 안심하고 전주로 들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