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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이때, 동도는 장성(長城) 등지에 주둔해 있으면서 전라좌도(左道)의 무리와 합세하여 수만의 무리에 이르렀다. 관군이 추격하여 장성의 황룡장터에[月坪 앞] 이르러 적과 만나 여러 차례 혼전(混戰)을 하다가, 관군이 불리하여 회선포(回旋砲) 수 문(門)을 빼앗겼다. 동도는 관군을 버리고 곧장 전주로 향하여 성을 함락하였다.[이것이 4월 27일이다.] 전라관찰사 김문현(金文鉉)과 판관(判官) 민영승(閔泳昇)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판관은 조경(肇慶)·경기(慶基) 두 전(殿)의 영정(影幀)과 신위(位牌)를 모시고 위봉산(威鳳山) 이궁(離宮)으로 옮기고 이를 구실로 삼았지만, 이 역시 달아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관군은 이틀 뒤에야 동학농민군을 추격해 전주에 이르러 황학산(黃鶴山)과 완산(完山) 위에 진을 치고 성을 굽어보고 대포를 쏘아댔다. 성 안팎의 민가 수 천호가 불탔다.[우리 집도 그 속에 있었다.] 동도들이 서북문을 열고 일제히 달려 나와 곧장 황학산으로 개미떼처럼 올라갔다.[대장이 황학산에 있었다.] 관군들이 굽어보면서 대포를 쏘니, 포탄이 비오듯 하였다. 동도들이 맨손으로 춤을 추면서 시체를 밟고 앞으로 전진하였다. 관군은 곧 패하여 뒤로 밀렸다. 관군은 단지 완산에 있는 강화병이 급히 와서 구원해 주기만을 기대하면서 근근이 버텼다. 동도들이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서로 몇 일 동안 대치하였다.
정부에서는 동도를 누르고 전주성을 되찾을 방책이 없어 매우 우려하였다. 마침내 김학진(金鶴鎭)을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로 임명한 뒤 그로 하여금 화해하도록 하였다. 신임 전라관찰사 김학진이 삼례역(參禮驛)에 내려와 머물렀으나, 전주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드디어 관군과 동도에게 사신을 보내 조정의 명으로 화해하게 하였다. 이에 동도들이 북문을 열고 성 밖으로 나와서 관찰사와 관군은 비로소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5월 8일]
이때, 나는 서울에서 소식을 듣고 밤새 내려와 5월 9일에서야 비로소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의 모습이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정도로 완전히 변해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참담하였다. 집안의 종들은 재를 헤치고 타다 남은 쇠붙이를 수습하여 입에 풀칠할 계책을 도모하였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손상이 없었다. 곧바로 초곡(草谷)의 강보경(姜甫京)의 집에서 아버지를 뵙고, 또 척동(尺洞)에 사는 진사(進士) 종숙(從叔)의 집에서 어머니를 뵈었다. 처와 동생들도 각자 어느 한 곳에서 서로 위로하고 달래며 있었다. 이 때부터 동분서주하면서 날마다 밖으로 나가 양식을 구하였다. 몇 일 뒤 관군은 서울로 돌아갔다. 다만, 강화병 2백 명만은 성을 지킬 계획으로 남아 있었다.
6월, 관찰사가 감영으로 전봉준 등을 불렀다. 이때 성을 지키던 군졸들은 각자 총과 창을 쥐고 좌우에 정렬하였다. 전봉준은 높은 관과 삼베옷을 입고 당당하게 들어오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관찰사가 관민(官民)이 서로 화해할 계책을 상의하고 각 군(郡)에 집강(執綱)을 두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동도가 각 읍을 할거하고 공청(公廳)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서기(書記)·성찰(省察)·집사(執事)·동몽(童蒙)과 같은 임원을 두어 완연히 하나의 관청을 이루었다. 집강소는 날마다 백성들의 재물을 뒤져서 뺏는 것을 일삼았다. 이른바 읍재(邑宰, 수령)는 이름만 있을 뿐 행정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읍재를 내쫓고 이서(吏胥)들은 모두 동당(東黨)에 입적(入籍)하여 목숨을 보존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봉준은 수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구 원평에 웅거하면서 전라우도(全羅右道)를 호령하였으며, 김개남은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남원성(南原城)에 웅거하면서 전라좌도(全羅左道)를 통할하였다. 그 나머지 김덕명(金德明)·손화중(孫化中)·최경선(崔景善) 등은 각각 어느 한 곳에 웅거하였는데, 그들의 탐학과 불법은 개남(開南)이 가장 심하였다. 전봉준은 동도에 의지하여 혁명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거괴(巨魁)들은 각자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면서 가렴주구(苛斂誅求)만을 일삼을 뿐 약속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봉준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태로 7·8월에 이르렀지만, 저들의 불법이 갈수록 더욱 거세져서 부호들은 거의 모두 흩어졌다. 아울러 천민들은 모두 날뛰면서 재물을 토색질할 뿐 아니라, 묵은 원한을 갚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호남 일대는 혼란한 세상이 되었다.
나는 6월 그믐경부터 고산(高山) 화평(花坪)에 사는 지평(持平) 종숙(從叔)의 집에 가서 기거하였다. 그 근처의 동도들은 십 수백 명씩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일산(日傘)을 펴고 날마다 교대로 찾아와서 돈이나 재물을 토색하고 패악한 짓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이리저리 대접하면서 날마다 빌면서 지냈는데, 8월 초에 이르러 실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종숙의 모든 식구들을 데리고 전주 곤지리(坤止里)에 와서 우거하였다. 이때 아버지도 전주에 우거하였으며, 여러 식구들은 아직도 여러 곳에 있었다. 그래서 일상으로 왕래하느라 도무지 여가가 없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한통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바로 맹덕민(孟德敏)[운현궁(雲峴宮) 대원군과 친근한 사람으로 뒤에 호서관찰사(湖西視察使)가 되었다.]이 부안군(扶安郡) 덕천촌(德川村)에 와서 머물면서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한 것으로, “여러 가지 상의할 것이 있는데, 일 때문에 이곳에 지체하고 있어 직접 가서 찾아 뵙고 인사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한번 와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오랫동안 서울 소식을 듣지 못해 매우 답답하던 때였고, 더군다나 맹(孟, 맹덕민)은 절친한 사람이라 편지를 받은 다음 날 곧바로 덕천(德川)으로 가서 서로 만나니 매우 즐거웠다. 안부인사를 나눈 뒤 시사(時事)를 언급하였다. 맹이 말하기를, “지금 동도들의 소요는 삼남(三南)이 모두 그러하나, 호남이 가장 걱정이 됩니다. 요즘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께서 정사(政事)를 관여하고 있어 장차 볼만 할 것입니다. 국태공께서 바쁜 중에도 매번 정모(鄭某, 정석모)가 고향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묻기를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뜻이 자못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있어서 일 것이니, 그대는 한번 가서 만나 시사를 상의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국태공께서 바쁜 중에도 잊지 않으신 것이 감사하기는 하지만, 내가 공명에 뜻이 없으니 굳이 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시사가 매우 어려우니 장차 어떻게 실마리를 찾을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앉아서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맹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서 서로 웃고는 자리를 끝냈다.
그곳에서 사흘을 묵고 전주로 돌아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감영의 종이 사방으로 나의 소재를 물어 관찰사의 말을 전하였는데, “국태공께서 동도를 밝게 깨우치기 위해 보낸 사람이 객관(客館)에 있는데 급히 만나고 싶어 하니 왕림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곧바로 가서 만나보니, 바로 김태정(金泰貞)·고영근(高永根)으로 두 사람이 효유문을 가지고 왔다. 김(金, 김태정)은 국태공이 가장 믿는 중요한 인물로서 나와는 절친한 사람이다. 국태공께서 때때로 안부를 묻곤 하였다고 성대히 말하였는데, 지난번 부안에서 맹군이 말하는 것과 같았다. 또 국태공의 편지를 소매에서 꺼내 전해주었는데,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이별한 뒤 소식이 없어 서로 아끼는 마음이 어긋날까 걱정이 되었네. 지금 동도들이 창궐하니 실로 걱정이 적지가 않으니, 먼저 효유를 한 뒤에 토벌하지 않을 수 없네. 금령(錦嶺) 두 도에는 이미 사람을 보내 효유문을 선포하였지만, 유독 호남에는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네. 그대가 수고로움을 사양치 말고 나라를 위해 노력해주길 간곡히 바라네. 다소간의 사연은 입으로 전하고 이만 줄이겠네. 갑오년 늦가을 석옹(石翁) 돈(頓)”라고 하였다.
내가 이 편지를 가지고 돌아와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께서는 한참 말이 없으시더니, 이윽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이도 어리고 식견도 어두운데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태공께서 급히 이렇게 맡기신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미 맡기셨으니 어길 수도 없다. 한번 가보도록 하라”고 하셨다.
다음날, 김·고 두 사람과 함께 감영으로 들어가 관찰사를 만나고 전주군(全州郡) 집강(執綱) 송덕인(宋德仁)을 불러 효유하는 뜻을 전했다. 덕인이 말하기를, “오직 명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관찰사가 말하기를, “동도 가운데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데, 그 기세가 매우 커서 남원에 먼저 효유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만약 남원이 귀화한다면, 나머지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곧바로 영교(營校) 한 사람[송계운(宋啓運)]을 차정(差定)하고 사령(使令) 한 사람을 배행하게 하여 그날로 곧바로 남원으로 향하였다. 이 날은 바로 9월 7일이었다. 오후 4시경에 전주를 출발하여 해가 져 어둑어둑해질 무렵 임실현(任實縣)에 도착하였다. 현감(縣監) 민종식(閔鍾植)이 나와서 맞아 주었다. 저녁을 먹으니 밤은 이미 2경(更)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많은 관예(官隷)를 동원하여 횃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여 남원에 이르니, 밤은 이미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김개남이 많은 성찰(省察)·집사(執事) 등을 보내 남문 밖에 객관을 정하였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김·고 두 사람과 함께 가서 김개남을 만나 보았다. 개남은 정청(正廳)에 앉아 있었는데, 위의가 매우 성하였다. 서로 인사의 예를 마치고 효유문을 보여준 뒤 국태공의 뜻을 입으로 전하였다. 개남이 다 보고 말하기를, “공들이 온 뜻을 내가 벌써 알고 있소. 청컨대 잠시 물러나 편히 쉬고 기다렸다가 뒤에 상의합시다”라고 하고는 성찰들로 하여금 각기 한 사람씩을 담당하게 하여 객사를 따로따로 정하였다. 그래서 세 사람은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동정을 살펴보니, 비록 객관을 정하였다고는 하지만 감금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머무는 객관은 바로 보성(寶城) 사람 안접주(安接主)[동도들 중에 무리를 이끌고 있는 사람을 접주라고 한다.]의 처소였다. 안씨는 나이가 60여세로 성품이 매우 온후하고 말이 은근하였는데, 나에게 온 뜻을 물어 내가 상세히 전말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안씨는 얼굴에 근심을 띄면서 한탄해 마지 않으며 말하기를, “세상 살아가는 길이 매우 험하지만, 이번 길 역시 어긋난 것이 아니겠소?”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라와 백성에 관련된 일이니 평탄함과 험함을 어찌 가리겠습니까?”라고 하자, 안씨는 고개만 끄떡일 뿐이었다.
해가 장차 정오가 되자 갑자기 관부(官府)가 시끄럽더니, 대포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고각(鼓角)이 일제히 울렸다. 내가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안씨가 말하기를, “근래 새로 오방기(五方旗)를 7·8천개 만들어 오늘 장대(將臺)에서 기제(旗祭)를 지내려고 하는 것인데, 기제를 지낼 때는 반드시 나쁜 풍파가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고는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오늘 내가 깃발 아래 희생이 되겠구나. 이미 죽을 곳으로 들어왔으니, 구차히 죽음을 모면하려 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하였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군졸(軍卒) 30여명이 벌떼처럼 에워싸고 와서 안씨에게 이르기를, “오늘 대접주(大接主)가 장대에 좌정하고 막 기제를 지내려고 하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정모(鄭某)를 잡아다 기다리라고 명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안씨는 안색이 변하며 말하기를, “이런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을 했다”라고 하면서, 술을 가져오게 한 뒤 나에게 마시게 하였다. 나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모름지기 정신을 잘 가다듬으시오”라고 하고는 자신이 거느린 성찰·동몽 3·4명을 불러 간곡히 부탁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반드시 정씨를 잘 보호해서 가거라”라고 하였다.
내가 군졸들을 따라 장대에 이르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호령이 서릿발과 같았다. 김·고 두 사람과 영교(營校) 송씨(宋氏)를 보니, 모두 섬돌 아래에서 칼을 쓰고 있었다. 드디어 섬돌 아래 나를 무릎 꿇게 하였다. 내가 소리높여 말하기를, “나는 국태공의 명을 받들고 왔소. 만약 귀화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찌 이처럼 욕을 보인단 말이오”라고 하자, 개남이 사나운 목소리로 “너는 나이도 어린 것이 집에서 책이나 읽을 것이지[말은 올바름] 어찌 망령되게 공명을 생각하여 개화당(開化黨)을 쫓아 국태공을 꾀어 이런 효유문을 얻어 왔느냐. 어떻게 국태공의 본래 뜻이라 하겠느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욕을 당한 것은 비록 분하지 않지만 무고하는 것은 억울하니 잘 살펴보기 바라오”라고 하자, 개남은 “나도 벌써 자세히 알고 있으니 변명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난장(亂杖) 5·6대를 맞은 뒤 목에 큰 칼을 쓰고 김·고 두 사람과 함께 나란히 앉았다. 나는 너무 분하여 아픈 것도 몰랐다. 김태정(金泰貞)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대감(大監)[국태공 대원군을 가리킨다.]이 우리들을 죽이려 하는구려. 우리들이 죽는 것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귀군(貴君)은 무슨 잘못이 있겠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있으니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부디 정신을 가다듬어 천명을 기다리시오”라고 하였다.
저녁에 개남이 회군(回軍)하여 우리 일행을 묶어 앞세우고 갔는데, 나는 성찰과 동몽들로 하여금 나의 머리에 칼을 씌워 에워싸도록 하였다. 오작교(烏鵲橋)) 위, 광한루(廣寒樓) 옆에 이르렀다. 내가 하늘을 보며 크게 웃자, 성찰들이 무엇 때문에 웃는지 물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춘향(春香)의 신세가 되었으니 우습구나”라고 하자, 무리들이 모두 탄식하였다. 다시 안씨 처소로 돌아와 갇혔다. 안씨는 어쩔 바를 몰라 술로 나를 위로하며 귀속말로 이르기를, “오늘 죽음을 면했으니 혹시라도 살 길이 생길지 모르니 부디 정신을 가다듬으시오”라고 하였다.[이 날이 바로 9월 8일이었다.]

주석
드디어 관군과 동도에게 사신을 보내 조정의 명으로 화해하게 하였다.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일본군의 진주로 국내외 위기를 느낀 정부는 동학농민군과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결국 폐정 개혁을 약속한 뒤 화약이 체결되었는데, 화약 체결일자는 5월 7일설과 5월 8일설이 있다.
6월, 관찰사가 감영으로 전봉준 등을 불렀다. 전라관찰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감영에서 만나 회담을 가진 날짜는 7월 6일이다. 따라는 6월은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난장(亂杖) 주장당문(朱杖撞問)이라고도 한다. 본래 죄인을 고문할 때에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진행했는데 그 규칙을 무시하고 신체의 부위를 마구 때리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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