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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국태공이 나를 동도에게 보내 귀순하게 한 것에 대해 추후에 들은 내용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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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태공(國太公)이 나를 동도에게 보내 귀순하게 한 것에 대해 추후에 들은 내용이다.

이준용(李埈鎔)이 소년배들과 함께 서로 교묘한 계획을 세웠는데, 몰래 전 승지(承旨) 이건영(李建英)을 파견하여 국태공의 명으로 김개남을 회유하여 병사를 일으켜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건영이 이 밀유(密喩)를 가지고 나보다 하루 먼저 이미 남원에 도착하였다.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나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국태공의 참뜻이니, 이른바 효유문이라고 하는 것은 외면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개남이 드디어 우리 일행들을 죽일 뜻으로 효수(梟首)를 하여 기제를 지낼 희생물로 삼으려고 하였다. 개남이 바야흐로 장대에 앉아 있을 때, 전봉준(全琫準)[당시 금구(金溝)에 있었다.]이 개남에게 급히 편지를 전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우리들의 거사는 나아감만 있고 물러남은 없으니 만약 국태공의 명을 따른다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것이오. 만약 정모 일행을 죽이지 않으면, 국태공의 바램을 끊어놓을 수 없게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개남은 평소 봉준과 서로 시기하였다. 김개남은 이 편지를 보고 전봉준이 자신에게 화를 떠넘기려고 하는 것으로 여겨 마음을 돌려 먹고 드디어 효수하려는 일을 그만두었다. 우리 일행이 효수를 면한 것은 실로 전봉준의 편지 한통 때문이었다. 생사의 지경이 한 올의 머리털과 같이 위태로웠으니, 이 또한 천명일 것이다. 우습다.

이날 밤, 분한 기운이 가슴을 찔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또 목에 긴 칼을 쓰고 있어 누우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앉아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날, 또 개남의 처소 (南原作廳)에 잡혀 들어가니 김·고 두 사람과 영교(營校) 송씨가 모두 중형을 받고서 문밖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개남이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 서울 사람이 알려온 것을 들으니, 너희들은 모두 죄가 없고 오로지 꼬임에 빠져 온 것이다. 너희들은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김은 결단코 그럴 리가 없다고 하고 고는 고초를 견디지 못해 허물을 나에게 돌렸다.] 내가 김개남에게 말하기를, “결단코 꼬임에 빠져 온 것이 아니오. 그러나 국태공이 나에게 일을 맡긴 것이라면, 저 두 사람은 나를 따라 온 것에 불과하니 만약에 죽어야 한다면 내가 스스로 그것을 감당하겠소. 저 두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소. 더군다나 영교는 더욱 더 같은 예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개남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의 당돌함이 어찌 이러하냐. 너 스스로 죽으려 하는 것이니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10여대의 곤장을 세게 맞았다. 내가 혼절하여 땅에 누워있자 들춰 메고 나왔다.
반식경쯤 되어 다시 정신이 들어 눈을 떠서 보니, 수행한 성찰·동몽들이 곁에서 부르고 있다가 내가 회생한 것을 보고 곧바로 술을 입에 따랐다. 내가 일어나 앉아 큰 대접에 급히 술을 마시니, 심신이 비로소 안정이 되었다. 머리를 들어 돌아보니, 안씨의 처소가 아니었다. 어느 곳인지를 묻자, “이곳은 바로 전량관(典糧官) 담양(潭陽) 접주인 남응삼씨(南應三氏)의 처소”라고 하였다. 잠시 후, 남씨가 방에서 나와 칼을 어루만지며 나에게 말하기를, “이런 고운 소년이 무슨 일로 이런 큰 곤욕을 당한단 말인가? 나는 약한 마음으로 남이 나쁜 일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는 탓에 일찍 와서 위로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드디어 동몽들로 하여금 자기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나를 옮겨 편안하게 하고 매우 잘 대해 주었다. 이 사람은 바로 남씨와 관계된 담양(潭陽)의 거괴(巨魁)로 무리가 매우 많고, 개남에게 신임을 받아 지금은 전량관이 되었다. 빈객의 왕래가 빈번한 데도, 나는 칼을 옆으로 쓰고 방 가운데 누워 있었다. 살이 터지고 피가 흘러 아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잠을 자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어서 고통스럽게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남씨가 개남의 처소에서 회의가 있어, 마침 좌중에 사람이 없었다. 내가 눈을 감고 신음을 하니, 홀연히 어떤 사람이 곁으로 와서 연이어 ‘정군(鄭君)’이라고 불렀다. 내가 눈을 뜨고 보니, 나와 동년배의 소년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묻자, “굳이 누구인지를 묻지 말고 먼저 이 약을 드시오”라고 답하였다. 드디어 우황 수십 푼쭝[分重] 을 먹고 화주(和酒)를 권하여 마셨다. 내가 곧바로 그것을 먹고 “후의에 감사합니다. 귀성(貴姓)이 무엇인지요?”라고 하자, 답하기를, “나는 국기춘(鞠基春)[뒤에 기연(基淵)으로 개명]이오. 나는 대대로 담양에 살고 있고 형제와 친척들도 군(郡) 일을 하고 있었는데, 동도들의 침략으로 끝내 집안을 보존할 수가 없었소. 그 때문에 나는 남씨의 서기(書記)가 되어 따르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집안을 보존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라오. 그대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동정심을 견디지 못하고 감히 이렇게 위로하는 것이오. 나는 건너편 방에 있어 비교적 편하니 그대는 반드시 남씨에게 간청하여 나의 처소로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하오”라고 하였다. 내가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자, 그는 탄식함을 이기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날 늦게 내가 남씨에게 청하기를, “이곳은 왕래가 매우 빈번하여 칼을 옆으로 하고 쓰러져 누워있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실로 공사에 불편함이 많습니다. 서기의 방으로 옮겨갔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남씨가 “좋소”라고 하고는 곧바로 국군(鞠君)을 불러 말하기를, “이 정군(鄭君)도 소년으로 그대와 함께 거처하는 것이 어떻겠나?”라고 하였다. 국은 일부러 난처한 듯 하다가 재차 청한 뒤에야 비로소 응낙하는 척 했다. 드디어 나를 둘러메고 국의 처소로 옮기자, 국은 때때로 술을 권하기도 하면서 걱정을 잊도록 힘써 도모했다. 내가 머리를 풀고 칼을 베고 누워 날마다 전령(傳令)의 문장을 수천 줄을 쓰고 술을 마시고는 번번이 미친 듯 노래하고 크게 웃으며 죽고 사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자 남씨 역시 때때로 와서 위로하였다. 개남의 성찰·집사들 10명은 모두 소년으로 국(鞠)과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왕래하였다. 내가 그들 옆에 쥐죽은 듯 누워있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탄식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비웃기도 하였다. 이러기를 6∼7일을 보내자 목에 찬 칼이 조금 익숙해져 고통을 모르게 되었지만, 장독(杖毒)은 매우 나빠져서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자 국이 곧바로 의원을 불러 치료하였다.
또 다시 3∼4일이 지났는데, 9월 19일이었다. 내가 바야흐로 신음을 하고 누워있는데, 홀연히 어떤 사람이 뜰에서 물어 말하기를, “전주의 정진사(鄭進士)가 이곳에 남아 있다고 하는데 지금 어느 방에 있소”라고 하였다. 국군(鞠君)이 창의 유리로 엿보고 놀라고 기뻐하며 나를 깨워 말하기를, “너는 오늘 살았다. 너는 오늘 살았다”라고 하였다. 내가 연유를 묻자, 국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대접주(大接主)[김개남]의 종형인 김삼묵(金三默)인데, 대접주가 존경하고 중히 여기는 분이다. 지금 와서 너에 관하여 물으니, 너는 오늘 살았다”고 하였다.
국이 곧바로 문을 열고 맞아들이자, 개남의 모든 성찰이 모시고 왔다. 내가 급히 칼을 들고 일어나 앉자, 삼묵이 나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떻게 이런 곤욕을 만났는가?”라고 하면서 곧바로 수행하던 성찰을 불러 곧바로 칼을 풀어주게 하며, “만약 대접주가 꾸짖거든 내가 한 것이라 답하라”고 하였다. 성찰이 “예, 예”라고 대답하고는 일어났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놀랍고 이상하여, “선생께서는 어디서 오셨는지요?”라고 물어보았더니, 삼묵이 말하기를, “그대의 집안 어른이신 태일씨(太一氏)도 함께 왔는데 밖에 있소. 우리 딸 아이가 이틀 후에 시집을 가서 몸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대의 아버지께서 태일을 보내 이런 일을 알려와 만사를 제치고 온 것이오. 내가 만약 일찍 알았다면 마땅히 오지 않았겠소. 처음 듣고 비로소 온 것일 뿐이라오. 일이 급박하니 한가히 말할 수 없소. 내가 오늘 들어가 대접주를 만나서, 지난해 우리 아이가 금구에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대의 도움으로 면할 수 있었으므로 지금 갚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특별히 김개남에게 용서를 청할 것이오. 이를 알아주시오”라고 하고는, 또 말하기를 “만약 대접주가 불러서 묻거든 그대는 반드시 서울 사람을 핑계대는 것이 좋을 듯하오”라고 하였다. 내가 미쳐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 가버렸다.
조금 지나자 오라는 명령이 있어 내가 따라서 뜰에 이르자, 김태정과 고영근 두 사람은 먼저 와서 뜰에 있었다. 개남이 김태정에게 물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국태공의 꼬임에 빠져 감히 이곳에 왔으니 죄가 이미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저 정모(鄭某)는 나이도 어린 사람인데 너는 어떻게 꾀어서 왔느냐?”고 하자, 김태정이 극구 변명을 하며 말하기를, “어찌 감히 꾀어서 올 리가 있겠습니까? 정씨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일찍이 명망이 있고 대감(大監)[국태공]이 손자로 부르며 애지중지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특별히 편지를 보내 호남의 일을 맡긴 것이니 어찌 감히 꾀어 올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개남이 나에게 묻기를, “너는 저들의 꼬임에 빠져 왔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어찌 꼬임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막 김태정이 말한 것은 추호도 어긋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개남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는 저들과 함께 죽기를 기약한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사실을 속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개남이 다시 묻지 않고 다시 가두라고 명하였다.
삼묵이 즉시 따라나와 나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아까 부탁하였는데 어찌 어긴단 말이오. 내가 대접주의 면전에서 그대는 꼬임에 빠져 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대의 말과 다르니 내가 면목이 없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함께 죽을 곳에 와서 남을 속이고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나로 하여금 의롭지 않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선생께서 나 때문에 멀리서 오셨는데, 감사함에 몸 둘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께서 만약 살릴 방법이 있으면 우리 일행을 살리시고 그렇지 않다면 나 혼자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선생께서 깊이 살펴주십시오”라고 하자, 삼묵이 묵묵히 나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나는 실로 감격하여 눈물이 나오. 내가 마땅히 다시 사실을 말하겠소”라고 하고는 몸을 일으켜 갔다.
잠시 후 성찰을 통해 전령(傳令)을 내어 모두 풀어주고 따로 한 객관을 정하여 남다르게 더 치료를 해주라고 하였다. 이렇게 일행이 비로소 한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의 가마꾼 4명과 종 1명이 모두 풀려나 만났다. 남씨는 “정진사(鄭進士)가 오랫동안 우리들의 처소에 머물러 있어야 우리들이 마땅히 계속 치료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따로 객관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행은 함께 같은 객관에 있었고 나만이 남씨의 처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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