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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김삼묵과의 관계를 서술함[敍金三默之關係]

김화여(金化汝)는 태인(泰仁)의 구족(舊族)으로, 삼묵은 그의 호이다. 평소 명망이 있고 공거문(公車文), (신하가 임금에게 상소하는 글)의 문장을 잘하여 매번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전주(全州)에 이르면 반드시 방문하였다. 나는 그를 선생으로 대하였다. 족숙(族叔) 태일씨(太一氏) 역시 익히 알고 지냈다.
경인·신묘년간(1890∼1891)에 태일씨가 일이 있어 태인(泰仁) 오공동(五公洞) 김단성(金丹城)의 집에 여러 달을 머물렀는데, 삼묵과 같은 마을이라 밤낮으로 종유하면서 시를 평하고 글을 논하면서 우의가 매우 무르익었다. 내가 남원에서 욕을 당할 때 어떤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께서는 걱정을 하였고 태일씨도 곁에서 함께 걱정을 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주선하다가 비로소 삼묵도 동학의 괴수라는 것을 알았다. 비록 기포(起包)[동도가 병사를 일으키는 것으로 기포라고 한다.]하지 않았지만 수천의 무리를 가지고 있으며 김개남과는 종형제로 개남이 매우 존경을 하였다. 그래서 곧바로 태일씨가 여덟 명의 가마꾼을 보내 밤새 와서 도착하였다.[그의 아들 문환(文桓)은 금구에 갇혀 있을 때 나로 인하여 풀려나게 되었으니 이 역시 사실이다.]

다음날, 삼묵이 돌아가려 할 때 나에게 이르기를, “지금 반드시 함께 돌아갈 것을 도모하는 것은 정히 정리(情理)에 합치되는 일이니, 대접주가 ‘장차 치료하고 호송하라’고 한다면 이 역시 억지로 그 뜻을 어길 수는 없소. 지금은 단연코 다른 걱정은 하지 마시오. 그대는 마음 편안히 잘 지내고 있으시오. 내가 사위를 맞이하는 것이 하룻밤 밖에 남지 않아 돌아가지 않을 수 없소”라고 하고, 그날 짐을 꾸려 돌아갔다. 오직 태일씨만 떨어져 있기는 하였지만, 조금은 외로움을 면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목에 쓴 칼은 이미 풀렸고 머리를 정돈하고 관을 쓰니, 겨우 사람의 형상을 회복하였다. 또 남·국 두 사람의 보호를 받음으로 인해 몸이 점점 건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처럼 십 수 일이 지나니, 전날과 비교하여 분명히 살길이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전날은 일단 죽을 곳으로 들어왔으므로, 도무 지 살 길이 없어 다만 천명만을 믿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미 살 길을 얻기는 했지만, 아직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바뀌어 마음이 실로 초조하였다. 그래서 온갖 계책과 생각으로 벗어날 길만 도모할 뿐이었다. 이때 개남의 부하인 여러 소년들은 국(鞠)과 연락을 하면서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였다. 새어나오는 정보를 들어보니, 개남은 아직 병사를 일으켜 서울에 갈 뜻이 없고 때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하나의 계책을 생각해 내어, 밤에 국군(鞠君)에게 말하기를, “너는 집을 떠난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라고 하자, 국이 말하기를 “어떻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없겠는가마는 고심해 봐도 그럴 계책이 없네”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나에게 한 가지 계획이 있는데,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풀려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나?”라고 하였다. 국(鞠)도 그 계획을 듣기를 청하여, 내가 계획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국이 말하기를, “좋네. 마땅히 그 계획대로 하겠네”라고 하였다.
다음날 여러 소년이 또 이르렀다. 국이 말하기를 “지금 대접주가 남원에 웅거하면서 전라좌도를 통할하고 있어 각 군(郡)의 거포(巨包)들이 이곳에 모이지만, 길이 멀어 위령(威令)이 각 고을에까지 미치지 못하네. 만약 흩어져 있는 동도들이 인민들을 학대하면, 원망은 위로 돌아갈 것이네. 5영(五營)을 두루 설치하여 군(郡)을 다스리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을 것이네. 그리고 거포(巨包)의 접주로 하여금 가서 진무하게 하고 일이 있으면 와서 도와주고 일이 없으면 물러나 지키면서 형세를 서로 의지한다면, 위령은 멀리까지 미칠 것이네. 이는 바로 만전의 계책인데, 여러분들의 고견을 모르겠소”라고 하였다. 여러 소년들은 수긍을 하며 좋다고 하고는 곧바로 가서 개남에게 말하니, 개남도 좋다고 하였다. 곧바로 그날 밤 국군(鞠君)에게 절목(節目)[오늘날의 장정(章程)]을 짓도록 하였다. 그래서 당일 밤 나와 국은 함께 초안을 짓고 곧바로 탈고를 하여, 아침을 기다렸다가 김개남에게 제출을 하였다. 이에 5영인(五營印)을 새기고, 5영기(五領旗)[다만 영(營)자는 혐의가 있어 령(領)자로 대신한다.]를 수를 놓아 만들고, 각 군에 5령(五領)을 두고 담양(潭陽)을 전령(前領)으로 삼았다. 그리고 남씨를 장수로 삼아 3일 안에 출발하였다가 본령(本領)을 안정시키고 5일에 한번 조회하러 오는 것으로 절목을 정하였다.
남·국 두 사람은 바삐 짐을 꾸려 장차 다음날 길을 떠나게 되었다. 국이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대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나?”라고 하였다. 내가 귓속말로 몇 마디 하자, 국도 수긍을 하였다. 장차 출발하는 이른 아침에 내가 남씨에게 말하기를, “공이 지금 금의환향(錦衣還鄕)하니 실로 백열(柏悅)의 정을 감당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어찌 할까요”라고 하였다. 남씨가 말하기를, “나는 지금 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슬퍼하는 것은 오직 그대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서로 만날 것이니 나는 장차 친지들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여 잘 보호하도록 하겠네”라고 하였다. 국이 옆에서 손을 흔들며 말하기를, “공은 어찌 깊이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정군이 목숨을 보존한 것은 지금까지 진실로 공의 두터운 보호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정군이 떨어져 있다면 내일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 어찌 이전의 공(功)을 애석히 여기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정군이 만약 함께 돌아가지 못하면, 우리는 맹세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남씨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 하면 좋겠나?”라고 하자, 국이 말하기를, “공이 대접주에게 간청하여 담양으로 옮겨 가두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남씨가 곧바로 가서 간절히 간청하여 허락을 얻어 나도 짐을 꾸리고 가마꾼과 종은 동도의 복건으로 꾸몄다. 내가 가서 김·고 두 사람과 영교(營校) 송씨(宋氏)를 방문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였다.[지금 여러 사람과 함께 벗어나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한 계책이 없어 한스럽고 원망스러웠다.] 이 날은 바로 9월 그믐날이었다.
오후에 남씨를 따라 담양으로 출발하였다. 평소 남·국 두 사람의 애정과 보호 때문에 남씨의 부하인 성찰·동몽들도 욕을 당하고 있는 나를 매우 존경하였다. 심지어는 함께 동행하게 되자, 무리들이 모두 매우 기뻐하였고 남씨보다 나를 더 좌우에서 호위하였다. 그들은 공사장(公事長)으로 나를 불렀다. 대개 공사장은 접주 다음의 지위로 공사를 총괄하는 사람이니, 우습도다 우습도다.
군대의 행렬이 매우 느려 겨우 순창(淳昌) 적성강(赤城江)을 건넜을 뿐인데, 해는 벌써 저물었다. 남원부(南原府)와의 거리가 30리였다. 적성촌(赤城村)에 들어가 객관을 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이르자, 온 마을이 모두 비어 있었다. 다만 마을의 늙은이 두 사람만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내가 남씨에게 말하기를, “동도는 아직도 군기가 없어 도처에서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고 있다. 그 때문에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다. 이는 실로 매우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공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엄한 명령을 내려 작폐를 금하도록 하였다. 특히 나와 남씨는 동행한 군사들이 머물고 있는 곳을 특별히 더 단속하였다. 또 마을 늙은이들에게 잘 말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고 술을 가지고 와서 축하를 하였다.
다음날 일찍 적성을 떠나 담양군(潭陽郡)에 이르렀다. 이 고을의 동도 수천명과 군속(軍屬)·이졸(吏卒)들이 모두 나와 맞이하니, 위의가 매우 성대하였다. 수성청(守城廳)에 객관을 정하였다. 내가 남씨에게 말하기를, “공이 이 고을에 와서 고을을 안정시키자 이민(吏民)들이 환대하여 맞이하는 것은 공의 평소 공덕으로, 반드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께서는 십분 유념하시어 대중들의 바람을 잃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남씨가 비록 식견은 없지만, 본심이 악독하지 않아서 나의 말을 잘 들어 과연 큰 폐해는 없었다. 민정(民政)은 부사(府使)에게 일임하고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다. 혹 범죄자가 있어 매를 치려고 하다가도 내가 곁에서 귓속말로 이르기를, “공의 착한 마음으로 어찌 사람을 곤란하게 한단 말이오”라고 하면, 남씨는 웃으면서 그만 두었다.
10월 10일경, 병사를 일으켜 서울로 갈 것이니 무리를 인솔해 남원으로 와서 모이라는 개남의 명령이 있었다. 그렇지만 남씨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만류하였기 때문이다.
10월 20일경, 족숙(族叔) 태일씨(太一氏)의 아우 길모(吉謨)가 전주에서 동복(冬服)을 마련하여 왔다. 형제가 비로소 서로 만나니, 생사와 이별이 마치 꿈결과 같아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 때 내가 입은 옷은 바로 9월 초에 입은 모시옷으로 추위를 막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땀에 젖고 피로 얼룩져 냄새를 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담양에 도착하는 날 국씨가 겨울옷 한 벌을 갖추고 와서 나에게 바꿔 입기를 권하였지만, 나는 끝내 듣지를 않다가 이날 비로소 아우가 가지고 온 옷으로 바꿔 입었다. 아우가 알려주기를, 김개남이 10월 보름 무렵에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전주로 들어가 남원부사(南原府使) 이용기(李龍基)[신임으로 부임차 전주에 당도하였다.]를 참수하고 고부군수(古阜郡守)[신임으로 성명 미상]를 죽이자 온 관부(官府)가 진동을 하고 인민들이 두려워 떨었다고 한다. 또한 이미 청주(淸州)로 떠났던 김·고 두 사람은 전주에 와서 노자를 주어 올려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내가 아우를 이끌고 가서 남씨를 만나 돌보아준 덕에 감사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오늘 아우의 말을 들으니 아버지께서 내가 어려움을 만나고 나서 걱정이 빌미가 되어 지금 위독하다고 하니 빨리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남씨가 차마 버려둘 마음이 없어 말하기를, “그대의 정리(情理) 또한 절박하다. 나는 장차 남원에 가서 성을 지키며 대접주가 개선하기를 기다릴 것이니, 그대는 모름지기 남원에 도착하는 대로 헤어지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하였다. 내가 억지로 청하지 않고 드디어 허락하였다. 곧바로 족숙(族叔)과 아우를 전주로 돌려보내면서, 임실로 종을 보내 아버지의 병의 급한 소식을 전해주기로 약속하였다.
10월 24일 남씨를 따라 남원으로 가는 도중에 태인(泰仁)[우회하는 길로 갔다.]을 지나다 잠시 오공동(五公洞)에 사는 김삼묵을 방문하였다. 이때 삼묵도 기포(起包)를 하여 병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백성들에게 별다른 폐해를 끼치지 않았다.
다음날 임실에 이르니, 가노(家奴)가 이미 도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였다. 내가 집에서 온 편지를 남씨에게 보여주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하였더니, 남씨가 말하기를, “이번 행차에 국기춘(鞠基春)도 병으로 오지 못하는데 그대마저 돌아가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한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내가 두 세 번 간청하자 부득이 허락하였다. 손을 잡고 서로 헤어져 곧바로 출발하여 상관면(上關面)에 이르자, 해는 이미 저물어 마자리(磨子里)에 투숙하였다. 다음날 전주로 돌아오니, 바로 10월 29일이다.
금구(金溝) 장전리(長田里) 최씨(崔氏) 집[길모(吉謨)의 처가이다.]에 가서 아버지를 뵙고 수일 뒤 전주로 돌아왔다. 청주에서 개남이 크게 패하였다는 소식과, 정천(定川)에서 전봉준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크게 이르러, 죽은 동도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패한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각 군(郡)의 인민들이 의군(義軍)을 조직하여 보이는 즉시 죽였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차례대로 잡혀, 개남은 전주에서 효수되었고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이 되어 끝내 또한 죽었다. 그 나머지 김덕명·손화중 무리는 어떤 자는 죽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하여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김삼묵·남응삼은 모두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 김삼묵의 아들 문환(文桓)은 거괴(巨魁)로 잡혀 전주 진위영(鎭衛營)에 갇혀 죽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살려준 은혜가 있어 당국자에게 빌고 당시 부관(副官) 주종한(朱鍾翰)·권임(權任) 박정화(朴正燁) 두 사람을 통해 백방으로 주선하여 간신히 석방시켰는데, 지금까지도 왕래를 하고 있다. 남씨의 소식은 끊어졌었다. 그 뒤 10여년이 지나 일진회(一進會) 일로 전주에 갔었는데, 남씨도 와 있었다. 나는 그의 숙소를 방문하여 차와 먹을 것을 갖추어 대접하였다. 이 때부터 왕왕 나를 찾아와 요청하는 바가 있으면, 매번 힘을 다해 도모하였다. 은혜를 갚는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지난 일을 회상하면 실로 저버릴 수가 없었다.
다음해 봄[을미년] 나는 난리를 겪고 나서 풍화(風火)가 빌미가 되어 건강이 안좋아 석전리(石井里) 산정(山亭)에서 몸 조리하고 있었다. 국기춘이 서울 행차를 하려고 하다가 일부러 나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지금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과 내각대신 박영효(朴永孝)와는 옛 우의가 있다. 지금 두 공(公)이 벼슬을 하고 있으니, 가면 반드시 등용될 것이니 그대도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나?”라고 하였다. 나는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래서 국(鞠) 혼자 서울에 갔는데, 곧바로 법부주사(法部主事)에 임명되었다. 두 공(公)이 패하자, 국 또한 7·8달을 구금되었다가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어 10년만에 돌아오게 되었다.[지금 이름은 기연(基淵)이다.]

주석
백열(柏悅) 송무백열(松茂柏悅)의 준말로 벗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이다.
정천(定川) 정천(定川)은 경천(敬川)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공주 우금치전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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