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五月初一日]
예조 초기에, “이번 경과(慶科)는 어떤 과(科)의 사례로 거행해야 합니까? 그리고 어느 날로 계산하여 택일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는데, “임신년(壬申年, 1872, 고종9)의 사례에 의거하여 하고, 8월 보름 사이로 정하여 들여보내라”고 하였다. 또 초기에, “문무과(文武科)의 경과 정시(庭試)의 길일(吉日)은 8월 16일이고 방방일(放榜日)은 28일로 정해서 행해야 합니다”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 초기에, “청나라 군함이 곧 정박한다고 하니 공조참판 이중하(李重夏)를 영접관(迎接官)으로 차하(差下)하고 미리 가서 힘쓰게 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시기를,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신정희(申正熙),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성기운(成岐雲)은 모두 군무(軍務)를 구관(句管)하게 하라” 하였다.
먼저 순변사(巡邊使)를 차송(差送)한 뒤에 원임대신이 입시하여 사사로이 뵐 때, 임금께서 청병(淸兵)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하교하시길, “총리 원세개(袁世凱)가 말하기를 만약 조회(照會)하는 일이 있으면 당연히 전보로 통지하면, 며칠이 안되어 군함이 내박한다고 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모두 사세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하였다. 임금께서는 일본인이 인연(夤緣)하여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판부사 김홍집(金弘集, 호는 道園)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군대가 적도를 소탕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조치입니다. 일본은 우리가 처음부터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움직인단 말입니까?” 하였다. 경연에서 물러난 뒤에 보국(輔國, 보국숭록대부) 민영준(閔泳駿)이 영돈[영돈령부사] 김병시(金炳始, 호는 용엄(蓉庵))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사람까지 보내어 몰래 질문하길, “경연하는 자리에서 청병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을 가지고 여러 대신이 충분한 논의가 있었는데, 합하(閤下)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어찌 어렵고 신중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일본 군대도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김병시가 찾아온 사람에게 조용히 말하길, “대개 이 일은 이미 정론(定論)이 있다고 하니 억측으로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도(匪徒, 동학의 무리)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지만,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어찌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민심이 따라서 쉽게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정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일본의 문제도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관(淸館)의 조회(照會)가 지금 잠시 늦추어졌고 이미 우리 병사도 출발하였으니, 잠시 하회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민대감[閔泳駿]께서 ≪궁궐에≫ 들어가 이 말을 상주하니, 임금께서는 “이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나 닥쳐올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여러 대신들의 논의 역시 ≪청병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성기운(成岐運)이 청관에 가서 총리 원세개에게 조회의 건을 전달하니, ≪청관에서는≫ 곧장 천진(天津)으로 전보를 보내었다. 며칠이 되지 않아 청병의 전함이 연안에 정박하고 도독(都督) 섭지초(葉志超)가 2천여병을 거느리고 아산에 상륙하니, 이중하(李重夏)가 영접하여 머물렀다.
5월 4일[初四日]
의금부 초기에, “남쪽의 죄인 조병갑(趙秉甲)을 곤장을 때리며 심문했으나 다시 형벌을 내리소서”라고 하였다. 판(判)에서 말하길, “이 죄수는 뇌물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많이 괴롭혀서 남쪽의 소요를 일어나게 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평범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다시 엄한 형벌을 내려 원악도(遠惡島)에 안치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당일에 압송하여 강진(康津)에 안치시켰다.
5월 8일[初八日]
일본군 1만여 명이 인천에 정박한 군함에서 육지에 내렸다. 먼저 3천여 명으로 곧장 도성에 들어와서 일본 상인을 보호한다고 말하고 일본공사관 앞에 머물러 진을 쳤다. 그리고 인천에서 서울로 이르는 길에 간간히 머물렀는데, 진(陣)을 친 곳이 연이었고 군량이송이 끊이지 않고 만리창(萬里倉)에 쌓아두었다. 일본 특별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통솔하면서 일본공관에 주둔하니, 이 때문에 안팎의 민정이 놀라고 걱정하였다.
조회(照會)합니다. “우리나라 전라도에서 관할하는 태인(泰仁), 고부(古阜) 등의 현은 민습이 매우 사납고 성정(性情)이 속이길 잘하여 평소에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달 가까이 동학교비(東學敎匪)가 만여 명의 무리를 이루고 현읍(縣邑) 10여 곳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지금 또 북쪽으로 진격하여 전주성치(全州省治)를 함락하였습니다. 앞서 연군(鍊軍, 홍계훈이 지휘하는 장위영군)이 파견되어 나아 가서 소탕하고 진무하였으나, 비적들이 마침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여 연군이 패배하여 포계(砲械) 여러 건(件)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흉측하고 완고한 무리들이 오래도록 소요를 일으켜 꽤 염려스럽습니다. 게다가 한성과의 거리가 겨우 4백 몇 십리에 불과하니, 만약 그들이 다시 북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내버려두면 기보(畿輔, 경기도)가 소란스러워져서 손해가 적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훈련받은 각 군사의 현재 숫자는 겨우 도회(都會)를 호위할 정도입니다. 또한 아직 전투를 경험하지 못하여 특히 흉적을 섬멸하는데 쓰기에 어렵습니다. 그러다 오히려 세력을 키우고 시일이 오래 되면, 중조(中朝, 청나라)에 걱정을 끼치는 일이 더욱 많아질지도 모릅니다. 임오년(1882년 임오군란)과 갑신년(1884년 갑신정변) 두 차례 걸친 우리나라의 내란을 살펴보니, 모두 중조 병사가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전례에 따라 지원안을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귀국의 총리(總理, 원세개)에게 청하오니, 번거롭더라도 신속하게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에게 전보하여 몇 개의 부대를 파견하여 빨리 와서 대신 소탕하소서. 아울러 우리나라 각 병장(兵將)으로 하여금 따라서 군무를 익혀 장래의 방어계책을 세우도록 하여 주십시오. 사나운 비적이 꺽어지면 곧장 철수를 요청할 것이며, 감히 계속 머물러 방어해 주기를 요청하여 천병(天兵, 청나라 병사)이 오래도록 밖에서 고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귀국 총리께서 신속히 도울 방안을 세워 급박한 상황을 구제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조회를 기다립니다.”
5월 8일[同日]
전교하시기를, “군사들이 호남으로 싸우러 간지 벌써 한 달이 되었다. 이처럼 무더운 때에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쟁 상황에서 노고를 무릅쓰는 상황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연이어 승리했다는 보고를 받아보니, 그 공로가 가상하다.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위문하고 관찰사에게 명하여 음식을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 장계(狀啓)로 보고하라” 하였다.
전교하시기를,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임무를 띠고 있으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인 완부(完府)에 소요가 처음 일어났을 때 금지하지 못하고, 갑자기 성안으로 난입하는 것도 힘써 막지 않고 그대로 성(城)을 버리고 도(道) 경계 밖으로 넘어 갔으니, 한 지방을 맡은 신하가 자기가 맡은 지방에서 죽어야 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는가? 그가 범한 죄를 논한다면, 원래 당률(當律)이 있으니 설사 스스로 설명하게 하더라도 해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작할 점이 없지 않으니 특별히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인자함을 베풀어 갇혀 있는 죄인 김문현(金文鉉)을 사형에서 감하여 거제부(巨濟府)에 안치(安置)하고 형극을 가하라” 하였다.
5월 12일[十二日]
전교하시기를, “이번에 남쪽에서 일어난 소요에 대하여 무력을 쓰지는 못했지만 군사들이 한 달이나 바깥에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고초를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용감히 싸워서 공로가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는 해당 군영(軍營)에서 순차에 관계없이 등용하고, 죽은 사람들은 본도(本道)에서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게 하며, 장관(將官)과 관인(官人)으로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전쟁에서 죽었든지 횡액으로 죽었든지 간에 나라 일에 죽은 것은 마찬가지이니 표창하거나 벼슬을 추증하는 절차를 실제에 따라서 즉시 시행하도록 하라. 군수(軍需)에 필요한 것을 서울과 지방에서 마련하는 일체의 일은 해당 군영(軍營)과 해당 도(道)에 자세히 사정을 알아보고 회감(會減)하기도 하고 급대(給代)하기도 하여 혹시라도 폐단이 늘어나지 않도록 묘당(廟堂)에서 낱낱이 참작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무부 초기에, “호남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을 지금 바꾸어 차정하고 그 대신 순창군수(淳昌郡守) 이성렬(李聖烈)을 차하(差下)해야 합니다”하니, 윤허하였다. ≪조필영은 여러 차례 백성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민장(民狀)에 거명되었고 이에 이르러 파면되었는데, 그 이상의 처벌은 없어서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음≫
5월 15일[十五日]
내무부 초기에, “순변사(巡邊使) 전보에 의하면, 호남의 비류(匪類)중 이미 그 우두머리들은 베어졌고 위협에 못 이겨 무리를 좇다가 흩어져 도망한 자들은 등소(等訴)하여 애걸하며 모두 병기를 버리고 마음을 바꾸어 귀화하였습니다. 그 중에 간혹 엉겁결에 귀의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신칙하여 하여금 일일이 효유하여 귀농하여 각자 자신의 본업에 안주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돌이켜보건대, 지금 소란이 지나간 뒤 민심은 반드시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것이 많으니, 초토사는 심영(沁營, 강화의 鎭撫營)의 병방(兵房)을 잠시 진영에 머무르게 하여 민심을 어루만지며 안심시키고, 순변사는 즉시 철군하도록 분부하십시오”라고 하니, 윤허하였다.
5월 16일[十六日]
내무부 초기에, “어제 호남의 ≪비도들을≫ 소탕하여 평정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미 순변사로 하여금 철수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지금 또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이 보낸 전보를 살펴보니, 남아 있던 비도(匪徒)들도 흩어져 돌아갔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던 창과 포를 버리거나 반납하여 거의 모두가 귀농하였습니다. 지금의 사세로는 ≪저들을≫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며, 원근을 조사하는 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경병(京兵)과 심병(沁兵)은 즉시 철수할 수 있으며 기병(箕兵, 평양 병사)은 잠시 머물게 하여 민심을 진정시킨다고 합니다. 비도(匪徒)가 이미 제거되었고 그 나머지가 모두 흩어졌다면 눈앞의 급선무는 오직 신속하게 군사를 회군시켜 백성에게 하루의 번거로움이라도 면하게 하고, 은혜를 베풀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안을 서둘러 도모하는 것입니다. 난리를 겪은 민심도 진정시켜 어루만지지 않을 수 없으니 심영(沁營)의 병방(兵房)은 잠시 완부(完府)에 안주(按住)하게 하고 초토사는 당일로 철수하도록 해야 합니다”하니, 윤허하였다.
5월 20일[二十日]
부사과(副司果) 이설(李偰)의 상소에 비답하길, “만약 이와 같다라면 모두 해괴한 소리에 속하니, 혹 지적할 것이 없으면 모두 묘당(廟堂)에서 해당 도신을 조사하여 즉시 계품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추의(秋議, 형조참의) 이남규(李南珪)의 상소에 비답하길, “말한 바에 조리가 있고 그 말이 또한 적절하고 절실하니 매우 칭찬할만하다” 하였다.
부사과 이최영(李最永)의 상소에 비답하길, “시폐를 잘 말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였다.
전교하시기를, “연이어 장주(章奏, 신하가 임금께 상주하는 글)의 준발함을 보니 공의(公議)가 들끓어 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실로 백성을 가렴주구하여 원망을 산 것을 논한다면 반역죄로 응징하는 것이 마땅하다. 전 호남전운사 조필영에게 찬배(竄配)의 법률을 시행하라” 하였다.≪함열(咸悅)에 유배되었음≫
5월 20일[同日]
영돈령부사 김병시(金炳始)가 입시했다고 한다. 임금께서 청국과 일본이 서로 대치하는 일로 말씀이 있었다. 영돈이 대답하길, “등대(登對, 어전에 나아가 임금을 직접 대함)한지 오래 되었고 게다가 병으로 혼미해서 시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너무 어둡습니다. 그러나 호남의 문제를 논하건대,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이 보기에, 이들은 모두 본디 양민(良民)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 여러 수령들이 재물을 함부로 빼앗아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그 원망을 호소하고자 취회(聚會)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해당 수령들은 설득하고 타이르지 않고 그들을 동학도(東學徒)로 지목하여 무력으로 위협하니, 저들은 무서워 자신을 보호하고 살 방도를 도모하고자 무리를 모아 창궐하는 거사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난역으로 귀결되어 서울의 군사를 발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이미 경솔한 행위인데, 청국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은 더 큰 실수입니다. 설사 저들 무리가 모두 불궤(不軌)의 마음을 품고 있었을지라도 한 지역의 토비(土匪)에 지나지 않으니,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처치할 방도가 없다고 걱정해서 번거롭게 상국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군사를 요청하여 한 번에 몇 천 몇 만을 모두 소멸시키면, 비록 당장의 일시적인 쾌함은 있을지라도 차마 해서는 안되는 정치에 속합니다. 가령 한 사람이 죄를 얻어 형벌을 줄지라도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하지 기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다른 나라의 군사를 오도록 요청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백성을 모두 죽이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신(史臣)이 이것을 기록하여 후세가 보게 될텐테 당연히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시길, “참으로 그렇구려!”라고 하였다.
영돈이 말하길, “일본군이 온 것 또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병사 수천을 거느리고 무인지경에 들어가듯이 갑자기 도성에 들어왔습니다. 조정의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이것이 어떤 국체(國體)란 말입니까? 인천항에서 육지로 내릴 때 마땅히 금지해야 했습니다. 비록 형세가 대적할 수 없었을지라도, 경성까지 이르는 동안 한 마디 훈계나 꾸지람도 없었으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가 있습니까?” 하였다.
하교하시길, “이처럼 위난(危難)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정치와 관계되니 마땅히 서둘러 개혁해야 한다. 용인(用人), 군정(軍政), 재정(財政)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는 것은 비록 위난의 때가 아니더라도 폐단이 일어날 때마다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씀하시길, “마땅히 다른 나라의 법을 취하여 사용해야 한다” 하였다.
영돈이 말하길, “법이 오래 되면 폐단이 생기니 단지 선왕의 성헌(成憲)은 그대로 두고도 대략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반드시 양법(良法)이 있을 것이니 이것도 모방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법규를 완전히 폐기하고 다른 나라의 법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씀하시길, “재정이 매우 문란하다. 지금 호혜향(戶惠餉, 호조 선혜청의 군량)과 각 군영의 물자를 모두 모아 호조에 귀속하려 한다. 다른 나라도 이와 같은 법이 있다” 하였다.
영돈이 말하길, “물자를 모두 모아 관리 하는 것은 각각 분장하는 것만 못합니다. 최근 관직의 연혁이 매우 많습니다만, 그 이익을 볼 수가 없고 대개 이런저런 번잡함만을 더할 뿐입니다. 훈국(訓局, 훈련도감)이 혁파되었지만, 문서와 장부는 매우 어지럽고 이서배들은 오히려 그대로 있습니다. 육사(六司,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의 혁파로 쓸데없는 인원이 감축된 것으로 말하지만, 그 뒤 새로 신설된 직책이 육사보다 몇 십 배에 달합니다. 임금님께서 기필코 한 곳으로 모아 관리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재무 신하에게 널리 자문하시고 스스로 처리하셔야 합니다.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위영(統衛營)과 장용영(壯勇營) 두 영은 모두 전곡(錢穀)이 해당 군영에서 지급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친군영(親軍營)에 의지합니다. 사람들이 간혹 친군영은 문득 사고(私庫)와 같다고 말하기 때문에, 함께 맡아 관리[句管]하도록 하고 해당 군영이 각자 관장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탁지(度支)에 모두 속하게 하여 함께 관리[都聚]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또 말하길, ‘이것은 임금께서 편리함을 취용하려는[取用取便] 까닭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말할 것이니, 어찌 어렵고 조심스러움을 만드십니까?” 하였다.
하교하시길, “각각 명목이 있는데 어찌 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돈이 말하길, “각각 명목이 있다면 어찌 각각 분장(分掌)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대저 근래 생재(生財)에는 방도가 많은데, 거의 500년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국계(國計)가 어렵고 궁색한 것도 500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니, 이것은 씀씀이에 절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씀하시길, “일찍이 남용한 적은 없다”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길, “만약 남용한 적이 없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신이 비록 일일이 진술할 수 없지만, 생재(生財)의 수 같은 것은 바깥사람 역시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재물이 있는 데도 모두 어떤 곳에 사용하였습니까? 이것을 만약 알뜰하게 사용하였다면 반드시 이럴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한계가 있는 재물이 어떻게 끊임없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원망이 쌓이고 나랏일에 비리가 생기는 것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하였다. 또 말하길, “사(私) 한 글자를 제거하고 씀씀이에 절도가 있으면, 나머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