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八月 初一日]
의금사(義禁司) 초기에, “죄인 박영효(朴泳孝)가 원통한 일을 하소연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감히 원정(原情)을 제출하였으나, 죄명(罪名)이 지중(至重)하므로 봉입(捧入)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전교하시기를, “봉입(捧入)하라”라고 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가 아뢰어 말하길, “방금 내린 비지(批旨)에 죄인 박영효의 원정(原情)을 봉입하라는 명이 있는 것을 보고 신은 경악하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아아! 이 죄인은 죄악이 가득하고 기강 위반이 지극히 무거워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없던 난역(亂逆)입니다. 법망에서 요행히 빠져나가 연줄을 이용하여 바다를 건너 목숨을 건져서 한 실오라기의 생명이 지금도 연장되고 있으니 더욱 신인(神人)이 공분합니다. 지난번 지속(支屬)을 먼저 용서해 버린 것은 실형(失刑) 중의 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곤란과 우환이 있는 때에 한번 시험해 보려는 계략을 감히 내어 미친 듯이 날뛰면서도 거리낌이 없으며 제멋대로 단자를 제출하는 것이 마치 경범죄를 범한 죄인이 일상적으로 원통해 하면서 스스로 자부하는 것과 같지만, 정상(情狀)을 살펴보면 흉측하고 또 참혹합니다. 신의 이 말은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한 나라 전체의 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결단을 내려서 이미 내린 명령을 빨리 거두고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캐내어 마땅한 벌을 주어야 합니다.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대답하시기를, “봉입(捧入)하라” 하였다.
금부(禁府, 의금사) 초기에, “죄인 박영효(朴泳孝)의 원정(原情)을 봉입(捧入)하는 일입니다”하니, 전교하시기를, “봉입하라”라고 하였다.
박영효원정[朴泳孝原情]
죽을 죄를 지은 신 박영효의 원통하고 절박한 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은 대대로 녹을 타먹는 가문의 후손으로 신의 부자·형제 때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총우(寵遇)를 입고 아울러 영록(榮祿)을 누리게 되었는데, 신의 부자는 특별한 은덕에 감격하였으나 보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아버지 원양(元陽, 박원양)은 신의 형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길, “나라를 위하여 보답하려면 위험과 어려움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나이가 어리고 식견이 얕아서 그 말을 듣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만 우러러 성은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생각을 하였으나, 사리에 맞는지 거슬리는지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갑신년(甲申, 1884) 겨울에 시국 형편이 날로 어려워지고 나라의 정세가 점점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는 걱정스럽고 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서 바로잡을 방도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충성이 효과도 없이 악명을 뒤집어써서 위로는 임금에게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가문에 화를 미치게 하였으며 부모형제는 거의 다 죽고 이 한 몸만 떠돌아다니다가 다른 나라에 도망하였습니다. 신이 지은 죄는 한 시각이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이 한평생 마음 속에 다짐한 것은 창천(蒼天)에 물을 수 있습니다. 만약 한번 드러내지 않고 도랑 속에서 스스로 목을 맨다면 애매한 악명은 천년 후에도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럼을 무릅쓰고 떠돌아다니며 처지가 나빠진 지도 거의 12년이라는 오랜 세월 가까이 됩니다. 삼가 듣건대, 요즘 전하의 정사와 교화가 갱신되어 허물을 벗겨준다고 하기에, 신은 기쁨을 금할 수 없고 뒤이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국에 돌아가서 죽는 것이 바로 오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울러 신의 이번 걸음은 단지 전하의 얼굴을 다시 우러러보고 구구한 심정을 다 하소연하려는 것이 첫째였고, 부모 형제의 해골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는 것이 둘째였습니다. 이 소원만 성취된다면 비록 개천과 수렁에 빠져가서 죽는다고 해도 한이 없습니다. 신은 이미 임금에게 죄를 짓고 부모에게 화를 끼쳤으니 그저 천지간에 있는 하나의 곤궁한 사람일 뿐입니다. 일본에서 나그네살이 하는 11년 동안 잠을 자도 편치 않고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았습니다. 처자를 두지도 않았고 음악을 즐기지도 않은 채 밤낮으로 근심과 황송함에 쌓여 오직 우리 임금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성 밖에 엎드려 있은 지가 벌써 여러 날이 지났으나, 보잘 것 없는 정성이 구중궁궐 속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엎드려 강음(江陰, 강남)에서 대명(待命)하니 천지 같은 부모의 심정으로 신의 괴로운 마음을 굽어살피시고, 신에게 결코 딴 생각이 없음을 살피시어 사패(司敗)로 하여금 법령을 어기고 명령을 어긴 죄를 의논하게 하신다면, 도끼와 끓는 가마의 형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몸둘 바를 모르고 아뢸 바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 임금께서 대답하시기를, “처분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8월 3일[初三日]
전교하시기를, “용호영(龍虎營)의 군무(軍務)를 통위사(統衛使)로 하여금 관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전교하시기를, “박영효(朴泳孝)의 일은 정형(情形)을 논한다면 누구인들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느냐마는 그의 마음속을 살펴보면 사실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 지금 원정(原情)을 보니 10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 죄명을 특별히 효주(爻周)하여 말소하라”고 하였다.
8월 4일[初四日]
의안(議案)
대군주(大君主)께서는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날마다 외전(外殿)에 나와서 모든 정사를 친히 결재하십니다. 이미 계품(啓稟)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회의 날에는 총리대신(總理大臣)이 의관(議官) 몇 명을 거느리고 편전(便殿)으로 공손히 나아가서 당일 의논할 조목을 진주(陳奏)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일본 보빙대사(報聘大使)는 성망(聲望)이 있는 자를 신중히 선택하여 파견하되 도쿄(東京) 주재 판리공사(辦理公使)는 감하(減下)하고 전권공사(全權公使)를 차송(差送)해야 합니다.
우승지(右承旨)가 아뢰기를, “삼가 내려진 전교를 보니 죄인 박영효(朴泳孝)의 죄명을 특별히 효주(爻周)하여 말소하라는 명령이었는데, 신은 깜짝 놀라서 어찌 할 바를 몰랐으며 이어 걱정스럽고 통분한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역란[亂逆]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이 죄인처럼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가 어찌 있겠습니까? 나라를 등지고 은혜를 저버린 것은 원래 국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데, 바다를 건너 자취를 감췄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이처럼 흉악한 죄인을 해당 형률로 다루지 않고, 단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을 미루어 관대하게 용서하는 은전을 선뜻 베풀면 나라의 법을 펼 길이 없고 공분을 풀 길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내린 명령을 거두십시오.”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알았다. 나름대로 짐작한 것이 있으니 즉시 반포하라”라고 하였다.
8월 6일[初六日]
의안(議案)
상신(相臣)·장신(將臣)들은 공무나 사사를 물론하고 출성(出城)에 구애받지 않지만 공무 외에는 밤을 지새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전환국(典圜局)에 총판(總辦) 1명을 따로 두되, 탁지(度支)에서 규정을 만들어 돈을 주조하게 한다. 아편연(鴉片煙)은 예전과 같이 금지한다.
8월 10일[初十日]
의안(議案)
각 영읍(營邑)의 연보염초전(捐補鹽硝錢)은 이미 배정한 것 외에는 혁파하고, 신설한 명목도 혁파하도록 각도에 행회(行會)한다. 사창조례(社倉條例)를 각 주현(州縣)에 반급(頒給)하여 편하게 준행(遵行)하도록 한다. 친위영(親衛營)을 설치하고 장관(長官)은 도총관(都總官)으로 하여 편제(編制)하게 한다. 국구(國舅)에게 제수 값으로 주는 쌀[祭需價米]은 이미 탁지부에서 내어주고 있으니 종전에 태상시(太常寺)에서 제물을 봉진(封進)하던 일절(一節)은 영구히 정지한다. 각도의 환곡(還穀) 중에서 이무(移貿)·가작(加作) 따위의 명목을 영구히 혁파한다. 의복 제도의 변통을 각영(各營)에 행회(行會)하되, 경영(京營)의 제도를 준용하게 한다.
8월 14일[十四日]
의안(議案)
대개 중앙과 지방의 대소 관원을 선발 등용할 때에는 비록 친척이라도 구애됨이 없이 공정하게 추천하도록 한다. 의정부(議政府) 전고국(銓考局)에서는 관원을 추천한 천주(薦主)의 성명을 장부에 상세히 밝혀 놓았다가, 혹 벼슬을 받은 사람이 사죄(私罪)를 범하였을 경우에는 천주(薦主)를 벌봉(罰俸)하는데 1개월에서 3개월까지를 기한으로 한다. 천주(薦主)가 현직에 있지 아니할 때에는 3개월에서 12개월까지 정망(停望)하게 하여 추천하는 법을 엄하게 밝힌다. 전 광무감리(前 鑛務監理) 이용익(李容翊)을 환차(還差)하여 감독하게 하고 징수한 세금은 3개월에 한 번씩 공무아문에 부쳐 탁지아문으로 넘기게 한다.
8월 16일[十六日]
의안(議案)
대소 관원들을 제배한 뒤에 출사하는 날짜를 서울에서는 5일로 하고 외도(外道, 지방)에서는 영(令)이 도착한 날로 하는데, 경기는 10일, 호서·관동·해서(海西)는 15일, 영남·관서·관동(關東)은 20일, 북도(北道, 함경북도)·제주는 30일로 한다. 기한이 지나면 견파(譴罷)한다. 각 아문 출근의 경우 일로 인한 휴가 외에 출근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날수를 계산하여 감봉하고 15일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면직한다. 각도의 도시(都試)는 일체 혁파한다. 각 지방관이 사적인 사정으로 말미를 받는 것과 신구 관리가 교체하는 동안의 녹봉에 대한 것은 겸관(兼官)의 경우에 속하도록 한다. 행회(行會)해야 한다.
8월 18일[十八日]
의안(議案)
지방의 진공(進供)을 일체 혁파해야 합니다. 지방 각 읍의 경저채와 영저채의 남봉(濫捧)과 이자 위에 이자를 더 받는 것을 엄금해야 하며, 만일 부득불 쇄급(刷給)해야 할 것은 관변(官邊)의 예에 따라 시행해야 한다. 대구 판관(大邱 判官) 신학휴(申學休)는 3년간 벼슬살이를 하면서 오로지 탐오(貪汚)만 일삼았으니 파출(罷黜)해야 한다.
전교하시기를, “이와 같은 불법을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니 의금사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라”라고 하였다.
8월 19일[十九日]
관서선무사(關西宣撫使)에 지중추(知中樞) 조희일(趙熙一)을 차하(差下)하여 해당 관찰사와 함께 타산하여 잘 처리해서 각각 안도하게 하며, 지나치는 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위유(慰諭)하게 하며, 서도(西道)에서 관리의 부정과 백성의 고통을 조목별로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8월 20일[二十日]
의안(議案)
지금 정치 체제가 새로 수립되고 있으니 군주께서는 날마다 외전(外殿)에 왕림하시어 일을 보아야 한다.
비답하시기를, “편전(便殿)에서 소접(召接)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대소 관원의 상소에서 “논핵 등에 속하는 일은 의정부에 계하(啓下)하고 해당 관원에게 전문(傳問)하여 사실(査實)한 뒤 품처(稟處)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전후 죄인들 중에서 범한 죄가 매우 엄중한 경우는 죄명을 벗겨주기 어렵지만 죄인의 아들과 손자 및 세월이 오래 되어 친족 간의 정리가 끊어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리이건, 일반 사람이건 구애됨이 없이 통용해야 합니다”라고 거듭 아뢰었다.
8월 22일[二十二日]
해백(海伯, 황해도관찰사) 장계에, “이번 달 초7일에 청병(淸兵)과 일병(日兵)이 병영 남문 밖에서 접전을 한 뒤 청병(淸兵)은 중화로 회향했고, 일병은 성내로 다시 들어와 머무르고 있습니다. 병영 우후(兵營 虞候) 이중철(李重轍)과 황주목사(黃州牧使) 이보인(李輔仁)은 난을 당해 도피하여 맡은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죄에 해당하니 우선 파출(罷黜)하십시오”라고 하였다.
8월 24일[二十四日]
의안(議案)
주임관(奏任官)이 사직(辭職)할 경우 상소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각각의 해당 아문에 사직서를 제출하면 총리대신이 초기(草記)로 상주(上奏)하여 비지(批旨)를 받아 시행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8월 26일[二十六日]
의안(議案)
국내의 토지·산림·광산은 본국의 호적에 입적한 인민이 아니면 점유하거나 매매를 불허한다.
8월 27일[二十七日]
경무청(警務廳)에 “이준용(李埈鎔)과 이용호(李容鎬) 등 3인이 세도환국(世道換局)을 모의하였다”고 고발한 허성(許姓) 사람이 있었다. 경무사(警務使) 이윤용(李允用)이 대내(大內)에 들어와 아뢰자, 당일 관성장(管城將) 이병휘(李秉輝)가 기무처 회의소(機務處會議所)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허성 사람과 같았다. 또 말하길, “동학도(東學徒)를 불러들여 창의(唱義)하게 하였는데, 이태용(李泰容)·박준양(朴準陽)이 참모였다”라고 하였다. 총상(總相)과 외무대신이 상의(商議)하여 이태용(李泰容)·박준양(朴準陽)에 대한 찬배(竄配)를 청하려 하자 이준용(李埈鎔)이 듣고서 들어와 총상을 보고 말하길, “두 사람이 무슨 죄를 지어 찬배한다는 말입니까? 6월 21일 이후 외인(外人)의 친구로 서로 따른 자는 비단 이 두 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십 명에 대한 기록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참모란 말입니까?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낸 것[白地構捏]입니다. 법으로 다스린다면 소인(小人)부터 형률을 우선 시행한 이후에 이 수십 명을 치죄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총상이 말하길, “이 무슨 말입니까?”라고 하고 그 기록을 급히 찢어버리고 사죄하였다. 대원군(大院君)이 포교(捕校)에게 영을 내려 이병휘(李秉輝)를 체포하게 했는데 체포하지 못하자 이윤용(李允用)이 그를 도피시켰다. 원합(院閤)이 포교에게 곤장형을 집행하고 정하여 이병휘를 기어이 체포하라고 하였다. 또 안경수(安駉壽)를 불러서 묻기를, “이병휘는 어떤 사람이냐?”라고 하자 “감당할 만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물어 말하길, “이병휘를 그대가 추천한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가르치며 말하길, “이 사람의 거취에 대해서는 그대가 반드시 알고 있다. 즉시 체포하지 않는다면 이 일이 범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대가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안경수는 크게 놀라 즉시 영을 내려 이병휘(李秉輝)를 옥에 가두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이노우에카오루(井上馨)가 나와 이 일에 대해 의심을 갖고 일본 사람을 법무아문에 보내 허(許)·이(李) 두 죄수에 대해 철저히 묻고 조사하자 과연 세 가지 편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이용호(李容鎬)의 무리와 같은 패악하고 잡스런 부류들이 이준용(李埈鎔)에게 보낸 편지로, 이병휘는 실로 모르는 것이어서 바로 누명에서 벗어났다. 대원군(大院君)이 텐진[天津]에 편지를 보낸 일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물었을 때에 대원군(大院君)이 당일의 정세로 인하여 부득불한 것이었다고 이병휘가 직언하자, 이노우에카오루 공사의 의심이 확 풀려서, 일이 말끔히 종결되었다. 윤갑병(尹甲炳)·이용호(李容鎬)·송정섭(宋廷燮)은 소모관(召募官)이라 자칭하며 밀지(密旨)를 위조하여 삼남(三南)에 집이 있는 몇 사람에게 전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동비(東匪)와 함께 창의척왜(倡義斥倭)하게 하였다고 한다. 동도(東徒)가 이것을 듣고 더욱 더 창궐하고 무리를 불러 모아서 더욱 번성해졌다. 호남비괴(湖南匪魁) 전봉준(全琫準)·김개남(金介南)은 호서비괴(湖西匪魁) 최법헌(崔法軒, 최시형)과 서로 체결(締結)하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반란의 형세가 뚜렷해졌다. 호남 수십 고을에서 군기(軍器)를 탈취하고 공납(公納)을 거두어 들였으며, 호서 20여 고을에서도 창궐하였다. 일본 군대가 파병되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최비(崔匪, 최시형)만 달아났었는데, 그 무리가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이것은 모두 거짓 밀지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밀지는 이미 많이 드러났다. 법무아문에서 이용호(李容鎬)·송정섭(宋廷燮)·윤갑병(尹甲炳)을 체포하여 형장을 치며 신문하고 엄하게 조사하였으나, 벌써 삼동(三冬)이 지났어도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
8월 28일[二十八日]
의안(議案)
서울과 지방의 제관(祭官)은 파견하지 말도록 해야 하며 제관은 종백부(宗伯府)에서 파견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한다. 액예(掖隷) 이하 각 부·각 아문·각 궁·각 영 소속의 병정(兵丁)에 이르기까지 민사(民事)·형사(刑事) 관계의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법무아문에서 직접 체포하고 즉시 공문을 보낸다. 각도의 토호들이 무단(武斷)하고 평민을 침학(侵虐)하는 경우는 관문(關門)으로 신칙하여 엄금한다.
8월 29일[二十九日]
전교하시기를, “오늘 대원군(大院君)이 행차할 때 파문순포(把門巡捕, 把門巡檢의 속칭)들이 대원군이 탄 가마를 공경함이 없이 매우 무엄하게 보냈다. 당시 잘 신칙하지 못한 경무사(警務使) 이윤용(李允用)에게 관직을 삭탈하는 형전을 시행하라”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