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九月初二日]
정부에서 허진(許璡)을 경무사(警務使)로 삼았다.
전교하시기를, “일본 보빙대사(日本報聘大使)로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을 특별히 보내어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라”라고 하였다.
9월 3일[初三日]
의안(議案)
외도(外道)의 영읍(營邑)에서 경사(京司)로 바치는 약채(藥債)·필채(筆債)·예채(例債)·구청전(求請錢)·벌례전(罰例錢)·호장채(戶長債) 등의 명목은 모두 영구히 시행하지 않는다. 궁내부(宮內府)에서 진공회사(進供會社)를 따로 두고 종전부터 임금이 사용하시던 물품을 용도에 따라 바치되, 매 월말마다 시가(時價)로 계산하여 내주어야 한다. 삼도의 절선[三道節扇]과 양영(兩營)에서 정초에 바치던 세찬(歲饌)을 영구히 폐지한다. 각영(各營)·각읍(各邑)에서 관용(官用)으로 쓰는 물건의 값을 지정(支定)하는 것을 모두 혁파하고 일체 시가(時價)로 사서 사용한다.
9월 4일[初四日]
전교하시기를,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은 천만부당한 일을 가지고 사무를 팽개치고 처의(處義)하는데, 지금이 어떤 때인가? 나라 형편이 위급하고 민심이 경황없어 하니, 이때야말로 군신상하가 분발하고 부지런히 하여 기필코 대업을 도모하여야 할 때이다. 그런데 저런 도리없고 증거없는 황당한 말로 고집하며 결정하지 못하는 단서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경의 변함없는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차마 오늘날에 할 일이겠는가? 공적인 의리를 앞세우고 사적인 감정은 뒤로 미루어야 할 것이다. 이런 때에 응대(應對)하는 것은 실로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다. 경은 이것을 헤아리고 즉시 나와서 사무를 보라”라고 하였다. 좌승선(左承宣)을 보내 전유(傳諭)하였다.
전교하시기를, “수문장(守門將) 김기홍(金基泓)이 상소한 말이 대신을 무함하고 핍박하여 끌어내릴 빌미로 삼았으니 조정이 편하지 않다. 법무아문에서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9월 7일[初七日]
전교하시기를, “칙유와 비답을 통해 남김없이 다 알고서도 경은 한결같이 계속 떠나려고만 한다. 경도 한번 생각해 보라. 오늘날 나라의 형편을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바로 군신 상하가 와신상담(臥薪嘗膽)할 때이다. 내가 믿고 의지하며 조정과 민간이 유지되는 것도 경에게 달렸으며, 경이 평일에 자부한 것도 충군애국의 변함없는 마음이었으니, 편안한 때와 위험한 때를 가리지 않고 곧장 나아가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 방자하게 핍박하는 무고자로써 물러날 빌미로 삼고 있으니, 비록 일상적이고 일이 없는 때일지라도 경은 넓은 마음으로 담소하며 자제해야 하거늘, 지금의 지나친 행동은 내가 기대한 바가 아니다. 며칠씩이나 사무를 지체시키는 것은 백성과 나라에 크게 관계된 일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잠자리와 음식이 달지 않다.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라고 하였다.
전교하시기를, “영남(嶺南) 한 도는 2년간 연이어 흉년이 들었다. 올해는 한발이 더욱 심해 바닷가 각 고을의 정상이 더욱 처참하고, 호남(湖南)의 좌도 바닷가도 기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불쌍한 이 잔존 백성들이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이것은 사실 내가 부덕하여 화기를 불러오지 못해 이런 지극한 고통을 가져왔다. 효자와 사랑스런 손자가 자기 부모와 조부모를 봉양하지 못하게 하였고 형제와 처자가 흩어져 고생하고 구렁에서 울부짖으며 나뒹굴게 하였다. 한밤중에도 이를 생각하면 벽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부황이 난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데도 구휼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부모가 된 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구제할 방도에 대해서는 관찰사의 계사와 묘당의 논의에서 어련히 알아서 최선을 다하겠지만, 자신의 상심이나 상처처럼 여기는 나의 생각에는 실로 그만 둘 수 없는 것이 있다. 지난날 영남을 진휼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이미 획하(劃下)하였지만, 한 때의 급한 형편을 구제하기에도 부족할 듯하다. 호남의 재읍(災邑)에 대해서도 도리로 보아 똑같이 간주해야 할 것이니 특별히 내탕전(內帑錢) 30,000 냥을 내려 보내어 도신으로 하여금 적당히 나누어 구제하게 하되 실효가 있게 하라. 두 도에서 재해가 우심(尤甚)한 고을에는 삭선(朔膳, 매달 초하룻날에 각 도에서 나는 물건으로 차리던 수라상) 및 절물(節物, 철에 따라 나오는 산물)의 상납을 일체 정지하고 절선(節扇, 단오절에 선사하던 부채)의 진상(進上) 또한 정지하거나 면제하여 진휼하는 물자에 보충하라. 아아! 이런 구구한 몇 가지 일을 가지고 어찌 은택을 고루 미치게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마음을 다하여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나의 힘을 다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할 따름이다. 너희 도·수신(道帥臣)은 나의 뜻을 헤아려 실질적인 혜택으로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방략을 널리 펴서 황정(荒政)을 깊이 강구하여, 조세를 감면하고 포흠(逋欠)을 탕감하며 위를 축내는 것을 꺼리지 말고, 우리 조상이 물려준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뜻을 묘당(廟堂)은 두 도 도신에게 삼현령(三懸鈴, 급한 공문을 띄울 때에 봉투에 세 개의 동그라미를 찍음)으로 행회(行會)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9월 초9일[初九日]
의안(議案)
의회(議會)를 의사부(議事部)로 하고, 정부를 행정부(行政府)로 하여 둘이 서로 대치되어 뒤섞이지 않는 것이 바로 모든 나라의 공통적인 규례이다. 지금 마땅히 기무처(機務處)는 장정(章程)을 고쳐 전일(專一) 사권(事權)케 함으로써 정부와 서로 대등하게 한다. 승선원(承宣院)은 정령을 출납하는 곳이니 궁내부(宮內府)에 예속시켜서는 안된다. 의정부로 이속(移屬)시켜 행정 사무만을 행하도록 한다.
9월 17일[十七日]
의안(議案)
대소 관원의 상소는 사직과 헌책(獻策) 등을 제외하고 논핵 등에 속하는 것은 도찰원(都察院)으로 회부하며, 의정부에서 품지(稟旨)한 뒤에야 비로소 죄를 묻도록 허락한다.
9월 19일[十九日]
의안(議案)
나주(羅州)·순창(淳昌)·홍주(洪州)·안의(安義) 네 읍의 비적 토벌을 선창(先倡)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위임(委任)을 품청(稟請)하게 하고, 며칠 안으로 토벌하여 요사스러운 기운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19일 기백(箕伯, 평안감사)의 장계에, “전 감사(前 監司) 민병석(閔丙奭)은 소재를 모르겠습니다. 인신(印信)·병부(兵符) 및 도내 각 읍진 수령·변장(邊將)의 병부(兵符) 좌척(左隻) 72 척(隻)이 모두 없어졌으니 인신(印信)·병부(兵符)를 빨리 만들어 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인신은 방금 주조하여 보냈으니 병부는 승선원(承宣院)에 명하여 빨리 만들어 보내고 내려 보내는 것을 관장하는 각 읍진의 병부(兵符) 우척(右隻)은 새로 만들 때까지 기다려 내려 보낸 다음에 옛날 것은 올려 보내어 태워버리는 일을 명령하여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9월 22일[二十二日]
완백(完伯,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의 장계에, “남원부(南原府)에 모인 비도(匪徒)들이 5, 6만 명이나 되는데 각각 병기를 가지고서 밤낮으로 날뛰고 있고, 전주(全州)·금구(金溝)에 모인 무리들은 일단 귀순하였다가 다시 소란을 피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적을 토벌할 방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한 방면(方面)을 맡고 있는 감사의 책임이 원래 이렇단 말입니까?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매우 놀랍고 개탄스러운 일이니, 해당 도신(道臣)을 우선 견파(譴罷)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대로 윤허하였다.
9월 24일[二十四日]
정부에서 아뢰기를,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의 비류(匪類, 비적)들이 요즘은 다시 영남·관동·경기·해서(海西) 등지로 퍼지고 있다 합니다. 각처의 초무사(勦撫使)는 마땅히 모두 순무사(巡撫使)로 하여금 일체 처리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9월 26일[二十六日]
전교하시기를, “근일 비도(匪徒)들이 더욱 불어났는데, 이것은 전에 없던 변고이다. 임금의 명령에 항거하고서 의병(義兵)이라 칭하니, 이런 짓을 차마 한다면 무슨 짓을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때에 또 협잡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있어서 문서를 위조하고 비류(匪類)들과 내통한다는 소문이 종종 들여오니, 매우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후에 이런 수상한 무리들이 혹은 밀지(密旨)라고 하거나 혹은 분부라고 일컬으면서 민간을 선동하고 수령들을 위협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체포하여 먼저 목을 베고 보고하라. 혹시 망설이면서 결정하지 못하고 덮어둔 채 보고하지 않았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마음대로 놓아준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묘당(廟堂)에서 삼남(三南)의 도수신(道帥臣)에게 알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전교하시기를, “민란이 일어나는 것은 관리들이 탐욕을 부리고 포악하게 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정상이 불쌍하여 나라에서는 차마 토벌하지 못하고 오로지 무마하는 데만 힘썼다. 지금 듣건대, 이 무리들이 소재하는 곳에서 창궐하며 난리를 일으키고, 요사스러운 말로 대중을 선동하여 현혹시키고, 군기(軍器)를 훔쳐 성을 공격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 지난번에 선무사(宣撫使)를 나누어 보내고 계속해서 포고하였으나 미련하고 완고한 것들이 뉘우치지 않고 반역이 날로 심해지니 이들은 양민으로 볼 수가 없다. 이제 군대의 출동을 명하여 요사스런 기운을 깨끗이 없애려 한다. 해당 비류(匪類)들이 병기를 버리고 귀화하여 각기 생업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두목을 잡아서 바치는 자는 죽이지 않고 논상(論賞)할 것이다. 만약 무리가 많다는 것을 믿고 오히려 따르지 않고 감히 왕명을 거역하거나, 혹 겉으로는 고치는 체하고 속으로는 고치지 않으면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자는 모두 토벌하여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묘당(廟堂)은 이런 뜻을 각도의 도신 및 선무사(宣撫使)에게 알려서 비도(匪徒)들에게 선포하게 하여 그들이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라”라고 하였다.
9월 28일[二十八日]
정부에서 아뢰기를, “비류(匪類) 만 명이 성 밑까지 침범하는 것을 병사(兵使)가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막아 싸워서 비적 수십 명을 죽이니 비적들이 비로소 물러나 흩어졌습니다. 호비(湖匪, 충청도와 전라도 동학농민군)들은 서로 기맥이 통하고 연락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감영과 병영의 힘만으로는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방금 상당(上黨)에서 무기를 잃었다는 경보를 들었는데, 이런 보고가 끊임이 없습니다. 호서(湖西)의 감사와 병사들이 평소에 미리 방비하지 못하여 매우 허술합니다. 순무영(巡撫營)에서 빨리 군사를 징발하여 달려가 구원할 방도를 강구하게 하여, 이 비류들을 하루라도 빨리 소탕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양호순무영(兩湖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양호(兩湖)의 비류(匪類)들이 서로 연결되어 호서(湖西)에서 양호(兩湖)에게 원군을 청하였다고 하니, 듣기에 놀랍고 의혹스럽습니다. 우선 심영(沁營, 강화진무영) 병정을 해당 군영의 중군(中軍)이 거느리고 수로를 따라 은진(恩津)·노성(魯城) 등지에 이르게 하여 지키고 막아내는 방도로 삼게 해야 합니다. 경리청(經理廳) 병정을 안성군(安城郡)으로 출정시켜 순행하는 일은 당일로 출발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안성군수(安城郡守) 성하영(成夏泳)이 본군(本郡) 동도(東徒) 괴수 중에서 유구서(兪九西), 접주(接主) 김학여(金學汝), 진천(鎭川) 동도(東徒) 김금용(金今用) 등 세 놈을 기찰하여 체포하고 이 달 27일에 백성을 모아놓고 우선 처형하였습니다.
(일본공사가 제출한 내정개혁안)
청나라에 예속하려는 마음을 끊고 조선국 독립이라는 거대한 기업(基業)을 공고히 도모하는데 마땅히 행해야 할 긴요한 사무에 대한 각첩(各牒)의 대개를 아래에 나열한다.
-. 정권(政權, 정치권력)은 모름지기 한 길에서 나와야 한다.
-. 대군주(大君主)에게는 만기(萬機. 임금이 보는 여러 가지 정무)를 직접 결재할 권리가 있고 -. 법령을 함께 지킬 책임이 있다.
-. 왕실의 여러 사무는 나라를 다스리는 백정(百政)과 확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 왕실의 전모(典謨, 법과 규례)를 제정(制定)해야 한다.
-. 의정부(議政府)와 각 아문(各衙門)의 직무와 책임·권리를 획정(劃定)해야 한다.
-. 모든 조세와 부세는 탁지아문(度支衙門)에 통일적으로 귀속시켜 다루게 한다.
-. 국가의 재부(財賦)에서는 양입계출(量入計出)하여 재정의 기초를 공고히 하고, 아울러 왕실의 경비 및 각 아문의 경비를 미리 정해야 한다.
-. 군제(軍制)를 설정(設定)한다.
-. 모든 예속(禮俗)의 겉치레를 없애고 허풍을 떠는 폐단을 제거하는데 힘쓴다.
-. 형률(刑律)을 제정(制定)한다.
-. 경찰권[警察之權]은 모름지기 한 길에서 나와야 한다.
-. 관리의 복무 규율을 설정하여 꼼꼼하게 거행해야 한다.
-. 지방관의 권한을 제한하여 중앙 정부에서 장악한다.
-. 관리 등용 및 출척(黜陟)에 관한 조례(條例)를 설정하여 감정에 따라 진퇴하지 못하게 한다.
-. 세력을 다투거나 남을 시기하여 이간시키는 낡은 관습을 철저히 없애고 공무를 수행하고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 원망과 복수의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 공무아문(工務衙門)은 현재 설치할 필요가 없다.
-.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제도 및 권한을 바꾸어서 간략히한다.
-. 정부의 긴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각 아문에서 정교하고 노련한 고문관(顧問官)을 초빙하여 써야 한다.
-.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에 파견하여 과업을 익히게 한다.
-. 나라의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내정(內政) 개혁을 명확히 이정한 뒤 곧바로 종묘에 고하고 뭇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한다.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는 이 20조(條)를 한문 1책으로 번역하여 을람(乙覽)하게 한 후, 2책으로 만들어 한 책은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 들이고 한 책은 일본공사관에 두었음≫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처음으로 폐하를 알현할 때에 자주 개화란 준칙을 상주하고 물러나 한문으로 번역하여 1책을 만들어 의정부에 보내어 을람(乙覽)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처분이 즉시 내려지지 않자 화를 내며 재차 총상(總相)과 외무대신(外務大臣)에게 조회하였다. 총상은 여러 번 상주하고 또 일본공사에게 사죄하였고 마침내 처분이 내린 후에 2책으로 만들어 한 부는 대내(大內)에 받치고 한 부는 일본공사관에 보내었다. 14일 저녁 일본공사관에서 총상과 각 아문의 대신, 여러 장신(將臣), 금릉위(錦陵尉, 박영효)를 부르고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서 각 아문에서 새로 낸 장정(章程)을 여러 가지로 검토하였다. 이노우에 카오루 공사가 총상에게 이르기를, “나는 귀국의 자주 개화를 여러 해 동안 성원하다가, 이제야 겨우 공사로 나왔습니다. 5년이내에, 자주 개화를 실시하여 성공한 후에 동쪽 본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공(諸公)들은 반드시 본령(本領)을 사용하여 심지가 공정한 사람을 추천하고 등용하여, 입법하고 실시하되 대군주(大君主)의 칙지(勅旨)를 받들며, 한 마음으로 공사(公事)에 힘쓰되 또 더욱 힘 써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궁내부 대신에게 말하기를, “국가의 흥망은 공의 집안일입니다. 국정의 권리에 대해서는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 및 여러 종척(宗戚)이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은 사무를 담당할 때에 공도를 유지하고 사념을 제거하며 한 마음으로 힘써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금릉위를 보고 말하기를, “공은 나라의 은혜를 받은 것이 다른 신하와 다르니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십분 근신하고 한 마음으로 공사(公事)를 봉행하여 관장하고 있는 사무에 온 힘을 쏟는다면 공가(公家)의 복이므로 미리라도 축하드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6월 이후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군사로써 궁궐을 핍박하고 위협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불경한 것이었다. 자연히 각국 공사의 말도 있어 일본 정부는 그를 불러들이고,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파견하여 보냈는데, 그는 일본의 원훈(元勳) 총리대신으로서, 10월에 나와서 총상을 만나 말하길, “오토리(大鳥)의 군사가 궁궐을 핍박한 것은 매우 불경한 것이었습니다. 또 지금까지의 의안(議案)들은 대부분 급하지 않은 일을 미리 행한 것 뿐이어서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대개 개화에 관한 법[開化之法]은 하루 이틀에 급하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차츰차츰 실시하고 서서히 완성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