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1일[十二月 初一日]
정전시사조례(正殿視事條例).
一. 정전에서 정사를 보는 일은 3일마다 정기적으로 한다.
一. 정사를 보는 날은 총리대신과 각 아문 대신이 먼저 정전(正殿)에 이르러, 대군주(大君主)가 임할 것을 기다린다.
一. 입대(入對) 시간은 봄· 가을에는 사시(巳時) 정각, 여름에는 신시(辰時) 정각, 겨울에는 오시(午時) 정각으로 정한다.
一. 각 국무대신(國務大臣)이 정전에 입대하였을 때는 궁내대신과 나머지 종친 및 현재 대신의 반열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정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一. 법률과 칙령을 비롯해 긴급을 요하는 안건으로 정전에서 기초할 수 있는 것은 총리대신과 각 아문 대신들이 특별히 안건을 기록하여 회의를 거친 후 결정하여 대군주의 윤허를 청한다.
一. 어압(御押)을 받들어 어새(御璽)를 찍은 것은 총리대신과 각 아문 대신 혹은 총리대신과 주임 대신(主任大臣) 혹은 주임 대신(奏任大臣)이 부서(副署)한다.
一. 국무각대신(國務各大臣)이 혹시라도 중대한 일이 있으면 날짜와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정전(正殿)에 가서 입대(入對)한다.
一. 대군주가 정한 시간에 임하지 않았을 때는 궁내관(宮內官)으로 하여금 그 연유를 알리도록 한다.
一. 일이 없어 정사를 보지 않는 경우에는 관보(官報)에 반포한다.
一. 총리와 각 대신들이 정전에서 입대(入對)하여 논의하면 아뢸 일들은 안을 만들어 기록하고 총리대신과 주임 대신이 연달아 서명하여 궁내관으로 하여금 입정(入呈)하게 하고 각 대신들은 그대로 정전에서 감히 물러나지 않고 ‘알았다[知道]’라는 명을 기다렸다가 칙명을 받들어 반포한다.
一. 각 대신들이 기찰할 일이 있더라도 시간이 지났으면 퇴출하고 감히 입대(入對)하지 않는다.
一. 법률과 칙령은 이후부터 정전(正殿)의 의정(議定)이 있지 않은 것은 시행치 마라.
○ 12월 3일[初三日]
호연 초토사(湖沿 招討使) 서목(書目)에 이르기를, “비괴(匪魁) 최동신(崔東信)·박윤일(朴允一)·옥출곤(玉出昆)·문학준(文學俊)·이병호(李丙浩)·김락련(金樂璉) 등을 많은 군민(軍民)들을 모아 놓고 효시하여 군중들을 경계시켰습니다”라고 하였다.
○ 12월 4일[初四日]
칙령(勅令)을 내려, 짐이 육군장관직제(陸軍將官職制)를 재가하여 준행케하였다.
대장(大將)은 정1품이나 종1품, 부장(副將)은 정 2품, 참장(叅將)은 정3품, 정령(正領)·부령(副領)·참령(參領)·정위(正尉)들은 3품, 부위(副尉)·참위(參尉) 들은 6품, 정교(正校)·부교(副校)·참교(參校)들은 품계 외. 칙령을 내리기를, “이준용(李埈鎔)을 주차일본공사(駐箚日本公使)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 12월 5일[初五日]
순무영(巡撫營) 초기(草記)에 이르기를, “방금 선봉장(先鋒將)의 보고를 보니, 교도소 영관(敎導所 領官)의 첩보에 이르기를, ‘지난 11월 25일 한 대(隊)의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 군사 한 대와 함께 금구 원평(金溝院坪)으로 가다가 적 수만명을 만났는데, 대관(隊官) 최영학(崔永學)이 칼을 빼들고 앞장서서 적 37명을 죽이고 회룡총(回龍銃) 10병(柄), 조총(鳥銃) 60병, 탄환 7석(石), 화약 5궤(櫃), 포(砲) 10좌(坐), 도창(刀鎗) 200병, 쌀 500석, 돈 3,000냥(兩), 무명 10통(同), 소 2척(隻), 말 11필(匹), 소가죽 11장(張), 호랑이가죽 1령(令), 문서 2롱(籠)을 압수하였는데, 모두 일본병부대로 가져갔다. 우리 군사와 일본 군사는 하나도 다친 사람이 없이 날이 저물어 묵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주(羅州) 공형(公兄)의 문장(文狀)에, 적도(賊徒)들이 성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28일 선봉장이 통위병(統衛兵)과 일본군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였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초기(草記)에 이르기를, “서산 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泳)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지난 11월 20일 홍산(鴻山)에서 서천(舒川)으로 향하는데, 비류(匪類) 몇 천 명이 나누어 주둔해 있으면서 고함을 지르기에, 직접 대관(隊官) 등을 이끌고 양쪽 길에서 협공하여 적진(敵陣)을 크게 부수어 몇 백 명을 죽였는지 조차 모를 정도였고 네 곳에 병사를 숨겨두어 밤에 달아나는 몇 십 명을 사로잡아 죽였고, 또 김제(金堤)의 적(賊) 강문선(姜門善) 등 열한 놈, 임피(臨陂)의 적 김해룡(金海龍) 등 일곱 놈을 붙잡았고 결성(結城) 전 주사(前 主事) 김성현(金聲鉉)이 단신으로 거괴(巨魁) 최영대(崔永大) 등 네 놈을 붙잡아 모두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고 하였다.
○ 12월 6일[初六日]
완백(完伯, 전라 감사)이 보낸 전보(電報)에 이르기를, “이번 달 2일에 강화 진무영(江華鎭撫營)의 군사가 적의 괴수 김개남(金介男)을 태인(泰仁) 지방에서 사로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청곤(淸梱, 청주병영) 서목(書目)에 이르기를, “공주(公州)와 대전(大田) 들에서 난리를 일으킨 비류(匪類) 이천악(李千岳) 등 일곱 놈과 접사(接事) 김응구(金應九) 등을 많은 군민(軍民)들을 모아 효수하고 많은 사람들을 경계시켰습니다”라고 하였다.
○ 12월 10일[初十日]
칙령을 내려기를, “짐(朕)은 이번 달 12일에 종묘(宗廟)에 나아가 서고하고 다음날에는 태사(太社)에 가겠다”고 하였다.
완백(完伯, 전라 감사)이 보낸 전보(電報)에 이르기를, “이번 달 9일에 전봉준(全琫準)을 산 채로 잡아서, 서울로 압송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 12월 11일[十一日]
출진영관(出陣領官) 성하영(成夏泳)이 이번 달 2일 보고하여 이르기를, “서천(舒川)에서 적을 부순 뒤 다시 호남 군산진(群山鎭)으로 향하니 먼저 모였던 비류(匪類)들이 기미를 알고 이미 달아났고 진(鎭)의 이민(吏民)들은 모두 사악함에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비류들이 군기(軍器)와 공사선(公私船)을 빼앗고, 왕래하는 곡식에 출납하는 도장을 찍기를 마치 관부(官簿)같았습니다. 좌수(座首) 문규선(文奎璇)과 사곡(司穀)· 자초(煮硝)· 도포수(都砲手) 등 네 놈이 적의 거괴(巨魁)였기 때문에 모두 곧바로 쏘아 죽이고 돌아와 서천의 길에서 진을 치니, 해당 군민(郡民) 심경칠(沈敬七)이 접주(接主) 나봉환(羅鳳煥)을 잡아왔기에, 엄히 조사하고 쏘아 죽인 뒤 당일 서산(瑞山)으로 향했습니다”라고 하였다.
○ 12월 12일[十二日]
종묘(宗廟) 서고문(誓告文).
감히 황조(皇祖)와 열성(列聖)의 신령 앞에 고합니다. 생각건대 짐(朕)은 어린 나이로 우리 조종(祖宗)의 큰 왕업을 이어 지켜온 지 오늘까지 31년이 되는 동안 오직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우리 조종들의 제도를 그대로 지켜 간고한 형편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남긴 위업을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짐이 하늘의 마음을 잘 받들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겠습니까? 실로 우리 조종께서 돌보아주고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황조가 우리 왕조를 세우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 지도 503년이 되는데, 짐의 대에 와서 시운(時運)이 크게 변하고 문화가 개화하였으며 우방(友邦)이 진심으로 도와주고 조정의 의견이 일치되어 오직 자주 독립을 해야만 우리나라를 튼튼히 할 수 있습니다. 짐이 어찌 감히 하늘의 시운을 받들어 우리 조종께서 남긴 왕업을 보전하지 않으며 어찌 감히 분발하고 가다듬어 선대의 업적을 더욱 빛내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다른 나라에 의거하지 말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여 백성의 복리를 증진함으로써 자주 독립의 터전을 튼튼히 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그 방도는 혹시라도 낡은 습관에 얽매지 말고 안일한 버릇에 파묻히지 말며 우리 조종의 큰 계책을 공손히 따르고 세상 형편을 살펴 내정(內政)을 개혁하여 오래 쌓인 폐단을 바로잡는데 있습니다. 이에 짐은 14개 조목의 큰 규범[洪範 14조]을 하늘에 있는 우리 조종의 신령 앞에 고하면서 조종이 남긴 업적을 우러러 능히 공적을 이룩하고 감히 어기지 않을 것이니 밝은 신령은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一.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터전을 튼튼히 세운다.
一. 왕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및 종친(宗親)과 외척(外戚)의 본분과 의리를 밝힌다.
一. 대군주는 정전(正殿)에 나와서 시사(視事)를 하되 정무(政務)는 직접 대신들과 의논하여 재결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一. 왕실에 관한 사무와 나라 정사에 관한 사무는 반드시 분리시키고 서로 뒤섞지 않는다.
一.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와 권한을 명백히 제정한다.
一.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모두 법령으로 정한 비율에 의하고 함부로 명목을 더 만들어 불법적으로 징수할 수 없다.
一. 조세나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경비를 지출하는 것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할한다.
一. 왕실의 비용을 솔선하여 줄이고 절약함으로써 각 아문과 지방 관청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
一. 왕실 비용과 각 관청 비용은 1년 예산을 미리 정하여 재정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
一. 지방 관제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一. 나라 안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전습받는다.
一.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법(徵兵法)을 적용하여 군사 제도의 기초를 확립한다.
一. 민법과 형법을 엄격하고 명백히 제정하여 함부로 감금하거나 징벌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一. 인재 등용에서 문벌에 구애되지 말고 관리들을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구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 12월 13일[十三日]
중앙과 지방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렸다. 대군주(大君主)께서 이같이 말하였다.
아, 모든 관리들과 모든 백성들은 짐(朕)의 명령을 들을지어다. 하늘이 우리 조종(祖宗)에게 큰 왕업을 맡겨주시니, 큰 덕(德)이고, 조종들이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자손을 보호하고 백성들을 화목하게 해온 지가 오래되니, 또한 큰 덕이시니, 짐 역시 무궁한 왕업을 이어받아 옛 법을 따르고 또한 큰 계책을 이어, 감히 혹시라도 잘못하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중년이 되도록 하늘의 마음을 받들어 왔다. 그러나 짐이 어찌 감히 덕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겠는가? 덕이 때와 맞아야 빛나게 되니, 짐은 모든 것을 때에 맞게 해야 할 것이다. 지금 각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조약을 지켜나가면서 오직 실질적인 독립을 위하여 힘쓰고 있는데, 실질적인 독립은 내정을 바로잡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하려면 그것은 사실 오랜 폐단을 바로잡고 실속 있는 정사를 잘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있다. 이에 짐은 마음속으로 크게 경계하고 조정에 문의하니, 오직 경장(更張)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짐이 허심하게 생각을 터놓고 선대 임금들이 정한 법을 상고하고 각국의 형편을 거울로 삼아 관제를 고치고 기년(紀年)을 반포하며 군사 제도를 개혁하고 재정을 정리하며 교육에 힘쓰고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공정하게 하며 상업과 공업을 세우고 농업을 장려하고자 한다. 또한 일체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물론하고 전부 없애버려서 백성들을 세우고 위아래가 협력하여 그 말을 실천에 옮기고 그 실천이 실지 효과를 이룩하게 하면, 나라의 복이 될 것이다. 곧 좋은 날을 받아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나가서 짐의 마음을 맹서하고자 하노니, 힘써 일할 지어다. 모든 관리들과 백성들이여! 짐의 나라는 비록 오래되지만 국운은 새로워질 것이다.
아! 너희들 일반 백성은 실로 나라의 근본이다. 자주도 백성에게 달렸고 독립도 백성에게 달렸다. 임금이 아무리 자주를 하려고 해도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 의거하며, 나라가 아무리 독립을 하려 하여도 백성이 없으면 누구와 더불어 하겠는가? 너희들 일반 백성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한결같은 정신으로 임금에게 충성하라.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짐은 적개심이 있다고 할 것이고 짐은 외적을 막을 수 있다고 할 것이로다. 재간과 덕망이 있으면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드러내고 미천하여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귀한 사람에게 가려지지 않을 것이다. 넓고 넓은 어머니 나라에 의지할 곳이 없겠는가? 등용하여 쓸 것이니 너희들 서민(庶民)들은 자신을 수양하라. 너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짐은 보호하고 안전하게 할 것이니 법이 아니고서는 너희들을 형벌에 처하거나 죽이지 않을 것이고, 법이 아니고서는 너희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며 너희들에게서 거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생명과 너희들의 재산은 오직 법으로 보호할 것이니, 너희들은 힘써라. 나라가 부유하지 않고 군사가 강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자주요, 독립이요 하여도 실속이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주, 독립의 큰 위업을 확고히 세우고 온 나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노라. 짐의 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국운은 새로워졌으니 너희 관리와 백성들은 서로 권하고 서로 알려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장려하여 태산처럼 끄떡하지 않게 하고 여러 나라들에서 학문을 널리 탐구하며 좋은 기술을 섭취함으로써 우리 자주 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하라. 이에 짐이 종묘에 다짐한 글도 함께 너희들에게 널리 알리는 바이다. 아! 짐의 말은 이에 그치니 너희들은 힘써라.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적의 두목 김개남은 사로잡은 후에 죄인 호송 수레로 서울로 압송하여 조사하고 사형에 처해야 하나, 해도(該道)에서 조정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효수하였습니다. 설사 중도에서 빼앗길 염려가 있더라도 경솔히 함부로 처단한 것은 극히 놀라운 일이니, 전라감사 이도재에게 월봉(越俸) 2등(二等)의 벌전을 시행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법무대신이 아뢰기를, “지방에서 하는 재판 외에 법무아문의 일체 재판은 의금사(義禁司)에서 임시로 하고 있는데, 해사(該司)를 법무아문 임시 재판소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가지 재판을 모두 그 재판소에서 하게하며 본 아문에서는 재판과 형벌 적용 등의 일을 일체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고, 또 아뢰기를, “무릇 형구(刑具) 중에서 가혹한 형구는 사형죄 외에는 모두 쓰지 못하게 하며 형(刑)으로는 단지 태형(笞刑)만 적용하고, 가두는 데서는 단지 칼을 씌우고 족쇄를 채울 것입니다. 도적이나 사람을 상했던지 불을 지른 것과 같은 죄인에게는 칼을 씌우고, 신문할 때에 죄의 경중을 물론하고 숨기면서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태형(笞刑)을 치며 경한 죄인과 노약자에 대해서는 칼을 씌우거나 족쇄를 채우지 못하게 하되 도망칠 염려가 있는 자는 이 범위에 넣지 말 것입니다. 중앙과 지방의 각 감영(監營), 각읍(各邑), 각 진영(鎭營)의 형벌을 적용하는 곳에서도 이 규례로만 따르고 혹시라도 차이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보고한 대로 모두 윤허하였다.
○ 12월 16일[十六日]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 학무대신 박정양(朴定陽),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 탁지대신 어윤중(魚允中), 농상대신 엄세영(嚴世永), 군무대신 조희연(趙羲淵),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 공무대신 서리 김가진(金嘉鎭)이 아뢰기를, “왕실에 관한 존칭에 대하여 새 규례를 갖추어 드립니다. 주상 전하(主上殿下)를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로, 왕대비 전하(王大妃殿下)를 왕태후 폐하(王太后陛下)로, 왕비 전하(王妃殿下)를 왕후 폐하(王后陛下)로, 왕세자 저하(王世子邸下)를 왕태자 전하(王太子殿下)로, 왕세자빈 저하(王世子嬪邸下)를 왕태자비 전하(王太子妃殿下)로 하고, 전문(箋文)을 표문(表文)이라고 합니다”라고 하니 보고한 대로 윤허하였다.
칙령(勅令)을 내리기를, “군신의 상견례 의식은 참조하여 개정하되 될수록 간소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이제부터 나라의 정사에 관한 사무는 짐이 직접 여러 대신들과 토의하여 재결하겠다. 의정부를 대궐 안에 옮기되 내각(內閣)으로 고쳐 부르고, 장소는 수정전(修政殿)으로 하며, 규장각(奎章閣)은 내각이라고 부르지 말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조신(朝臣)의 대례복(大禮服)은 흑단령(黑團領)으로 하고 대궐에 나올 때의 보통 예복은 검은색 토산 명주로 지은 두루마기와 더그레[塔號] 및 사모(紗帽)와 목이 긴 신으로 하여 명년 설날부터 시행하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감사(監司), 유수(留守), 병사(兵使), 수사(水使) 이하는 이제부터 봉한 상소를 올리지 말고 사무를 구별하여 해당 아문에 보고하면 거기서 참작하여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대소(大小) 관원의 상견례와 호칭 예법을 개정하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지방제도를 개정하는데, 먼저 주(州), 군(郡)의 크기와 거리를 보아 당분간 한 개 읍의 수령이 몇 개 읍을 겸하여 관할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이제부터 팔도(八道)의 각 지방 수령들의 정사와 백성들의 고통을 내무아문에서 수시로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그것을 바로잡고 정리할 방책에 대하여 아뢰고 시행하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대소 제사를 참작하고 논의 결정하여 들여오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칙임관(勅任官)과 각부(各府), 각 아문의 서기관(書記官), 비서관(祕書官)은 대궐 밖에까지 말을 타고 이르는 것을 허락한다. 각처의 육군 장교(陸軍將校)와 경무관(警務官)도 이 규례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지금부터 만일 의견을 말한다는 핑계 아래 국시(國是)를 뒤흔드는 자가 있으면 원소(原疏)는 받아들이지 말고 상소를 올린 사람은 직접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잡아다가 엄하게 징계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전후하여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죄상을 밝혀 풀어주고 죽은 사람은 벼슬을 회복시켜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조목들은 총리대신과 각 아문 대신들이 받든 칙령임≫
○ 12월 18일[十八日]
16일 총리대신이 아뢰기를, “호연초도사(湖沿招討使) 이승우(李承宇)의 장계(狀啓)에 대하여 계하(啓下)한 것을 보니, ‘관군(官軍)이 서천(舒川)에서 비류(匪類)들을 토벌하려고 하다가 읍의 구실아치들에게 속임을 당하여 회군(回軍)하는 바람에 적들이 성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서천군수 유기남(柳冀南)이 보내 온 첩보(牒報)에 의하면, 홍주군장(洪州軍將)을 속인 말들이 놀랍고 도리에 어긋난다’고 하였습니다. 설령 해당 군수와 홍주군장이 처음부터 서로 뜻이 맞지 않았지만 지금은 일이 평정된 뒤이니 유감스럽게도 능멸하고 핍박함이 놀랍고 망령됩니다. 체통을 헤아려 보건데, 파출(罷黜)을 논하는 것이 이치로 보아 합당할 것입니다. 소란을 겪은 읍의 상황도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니, 마땅히 특별히 죄명을 지닌 채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읍리(邑吏)인 나운경(羅雲景)·유한표(劉漢杓)와 같은 경우에는 몰래 선동을 도모하여 군기(軍機)를 그르친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울러 본도(本道)의 감영으로 이송하여 엄히 조사하게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보고한 대로 윤허하였다.
완백(完伯, 전라감사)의 전보(電報)에 이르기를, “이번 달 11일 고창(高敞)의 사민(士民) 이봉우(李鳳宇)가 손화중(孫和仲)을 붙잡아 들여 현(縣)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12월 23일[二十三日]
겸 대종백(兼大宗伯)이 아뢰기를, “각 능(陵)에 대한 규례도 참작하여 수정하여야 하겠으므로 응당 시행하여야 할 절목(節目)을 삼가 조항별로 적었으니 결재하기 바랍니다”하니 윤허하였다.
각 능에서 시행하여야 할 절목
一. 각 능에서 쓸 향(香)과 축문(祝文)은 해마다 정월(正月) 14일에 1년 간 쓸 것을 일시에 전부 받는다.
一. 각 능에 특별히 내려주는 쌀은 매 석(石)을 시가대로 적당히 값을 정하여 양주목(楊州牧)에서 조정하는 대로 한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지출하는 것은 지금 본미(本米)가 없으니 금년은 14냥으로 가격을 정함≫
一. 각 능에서 명절 제사에 쓸 향(香)을 받을 때에는 같은 구역 안의 능에서는 능의 관리가 수복(守僕)을 거느리고 돌아다니고, 향과 축문(祝文)은 구역 안의 가장 높은 능에 봉안(奉安)하고 각릉관이 받게 한다.
一. 각 능에 딸린 토지의 세입과 지출은 능관 중에서 사판관을 임명하여 실지대로 조사하여 지출을 정한다.
一. 각 능의 수리비는 매 능에 200냥(兩)씩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직접 해당 지방 읍에 할당하여 능(陵)에 들이게 하고 곡장(曲牆)을 수리하고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수라간(水刺間), 수복방(守僕房), 재실(齋室)의 비가 새는 곳과 담장 수리를 하되, 만일 잘 수리하지 않았다가 조사할 때 잘못이 적발되면 본 능의 서원(書員)과 수복(守僕)을 엄하게 과치(科治)하는 외에 수리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시키며, 본 능관에게는 2등(等)에 한하여 월봉(越俸)한다.(매년 2월 안에 보낸다.)
一. 각 능에 개사초(改莎草)하거나 도배를 하고 창문을 바르는 것은 본 능에서 하되 개사초하는 비용 50냥과 도배지 종이 값 50냥은 매해 2월에 지방 읍을 거쳐서 보낸다.
一. 각 원(園)과 묘(墓)에서도 모두 이 규례대로 한다.
○ 12월 25일[二十五日]
순무영 초기(草記)에, “비적(匪賊)의 괴수인 성재식(成在植)과 최재호(催在浩)와 안교선(安敎善)은 그날로 남벌원(南筏院)에서 효수(梟首)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하고, 김개남(金介男)의 머리는 서소문(西小門) 밖 네거리에 매달았다가 3일 후에 김개남과 성재식의 머리를 경기 감영(京畿監營)에서 소란을 일으킨 지방에 조리를 돌리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초기(草記)에, “지난번 소모관(召募官)과 별군관(別軍官) 등이 연로(沿路)에서 폐단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모두 시행하지 말도록 한 뒤에 차첩(差帖)을 환수한다는 뜻을 전령(傳令)하여 방금 소모관(召募官) 천안군수(天安郡守) 김병숙(金炳塾)의 첩보(牒報)를 보니, 해도(該道)의 도원수(都元帥) 전령(傳令)이 있다고 칭하면서 신이 관장하는 순무영의 절제(節制)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거취를 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파직하지 않아 민간에 사단(事端)을 일으키니 군대의 기강으로 보아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천안군수 김병숙을 먼저 내쫓고 그 죄상을 해당 아문에게 엄히 조사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12월 27일[二十七日]
칙령을 내리기를, “남도(南道)의 비적들이 차례로 평정되어가니 순무영을 없애고 토벌에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군무아문에서 절제(節制)하여 나머지 비적들을 수일 내로 없애거나 붙잡게 하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사형죄에 해당하는 능지처참(凌遲處斬) 등의 형률(刑律)은 지금부터 일체 폐지하고 법무아문(法務衙門)의 형벌은 교수형(絞首刑)만 적용하고 군율(軍律)에 의한 형벌은 총살만 적용하라”고 하였다.
총리대신이 아뢰기를, “방금 영남 위무사(嶺南慰撫使) 이중하(李重夏)의 장계 원본을 보니, ‘관리들이 정사를 잘하고 못한 것에 대하여 열거하였습니다. 전 경상감사 이용직(李容直)은 순전히 백성을 괴롭히는 것만 일삼아서 그 해독이 만백성에게 미쳤는데, 뇌물 먹은 돈이 47만 6,356냥(兩) 6전(錢) 9푼[分]이고, 전전 통제사(前前 統制使) 민형식(閔炯植)은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세 도(道)에 다 미쳤는데 뇌물 먹은 돈이 72만 1,077냥입니다.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의 책임은 더없이 중요한데도 백성을 학대하고 나라를 저버린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없이 통분하여 오히려 말을 못하겠습니다. 모두 해당 아문에서 잡아다 심문한 뒤 정죄(定罪)하고 뇌물 먹은 돈은 받아내어 공금에 충당해야 할 것입니다. 민형식은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는 명이 내린 후에도 귀양지에 가지 않았으니 더구나 심히 놀랍고 통분한 일이어서 문목(問目)에 더 넣을 것입니다. 전 감사(監司)의 막비(幕裨) 현명운(玄明運)과 안종우(安鍾祐), 전전 통제사(統制使)의 막비 홍영주(洪永疇), 고을 관아에 있던 추백엽(秋柏燁)은 거간꾼 노릇을 하면서 재물을 사취하는 좀벌레로 되었으니, 역시 법에 따라 엄하게 징계하게 할 것입니다. 전 진주병사 민준호(閔俊鎬)는 겁을 먹고 비적(匪賊)을 후하게 대하면서 하동(河東)에서 급한 형편을 보고하였는데도 군사 한 명도 보내지 않았으니, 잡아다 심문하고 엄한 벌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전 성주목사(星州牧使) 오석영(吳錫泳)은 앞질러 피하여 백성들이 무너지게 하고 성(城)을 비워 비적들에게 넘겨준 죄로 이미 귀양 보내는 처결을 받았으니 논할 것이 없고, 순흥부사(順興府使) 이관식(李寬植)은 교활한 아전에게 맡겨 조세를 바칠 기약이 없고 적들을 보호하여 사람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며, 현풍부사(玄風府使) 김화치(金華埴)는 부역을 과중하게 시켜 폐단을 일으켜서 온 경내가 원망하고, 언양(彦陽) 윤홍식(尹弘植)은 마구 거두어들여 소란을 일으키고 모든 법도가 뒤죽박죽되게 하였습니다. 모두 파출(罷黜)해야 합니다. 함양(咸陽) 김영순(金永順)은 병으로 걷지 못하여 중요한 지방을 맡기 어려우니 개차(改差)하고, 산청(山淸) 정복원(鄭宓源)은 힘을 다하여 폐단을 바로잡았으나 너무 나약한 잘못이 있으니 과오를 추고(推考)해야 할 것입니다. 문경(聞慶) 김정근(金禎根)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향약을 시행한 결과 간사한 무리들이 모두 엎드렸으니, 수사(水使)의 이력을 허용해야 할 것입니다. 거창(居昌) 정관섭(丁觀燮)은 자기 녹봉(祿俸)을 내어 군량에 보태고 여러 번 이웃 고을의 적을 토벌하였으며, 안의(安義) 조원식(趙元植)은 충성과 의리를 발휘하여 요사스러운 적을 소탕하였으니, 모두 가자(加資)해야 합니다. 인동(仁同) 조응현(趙應顯)은 비적(匪賊)을 잡아서 두목의 머리를 베었고 무마하는 일을 잘하였으며, 예천(醴泉) 조원하(趙爰夏)는 백성들을 격려하여 적을 쳐서 각 고을에서 기세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창녕(昌寧) 조병길(趙秉吉)은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일을 철저히 없애고 여러 가지로 은혜를 베풀었으며, 초계(草溪) 이찬희(李贊熙)는 대오(隊伍)를 결속하여 비적을 잡고 자기 녹봉을 내어 구제를 잘 하였습니다. 모두 표과(表裹) 1습(襲)을 줄까 합니다. 경상도 중군(中軍) 박항래(朴恒來)는 군무(軍務)를 정리하고 적의 소굴을 소탕하였으니, 방어사(防禦使)의 이력을 허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보고한 대로 윤허하였다.
총리대신과 각 아문의 대신들이 아뢰기를, “이 달 16일에 칙령이 있었는데, 전후하여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람의 죄상을 밝혀 풀어주고 죽은 사람은 벼슬을 회복시켜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 등이 삼가 명령을 받고 이전 의금부(義禁府)의 문건을 가져다 상고하면서 공동으로 사실을 조사한 결과 죄명을 취소해야 할 사람과 벼슬을 회복시켜야 할 사람을 갈라서 기록하여 보고하니 결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보고한 대로 윤허하였다. 죄명을 취소할 부류는, 홍국영(洪國榮)· 권유(權裕)· 남종삼(南鍾三)· 홍봉주(洪鳳周)· 조연승(曺演承)· 조락승(曺洛承)· 신철균(申哲均)· 장동근(張東根)· 정선교(丁善敎)· 홍재학(洪在鶴)· 김응룡(金應龍)· 오윤근(吳潤根)· 김응봉(金應鳳)· 채동술(蔡東述)· 임철호(任哲鎬)· 이휘정(李彙靖)· 이원진(李源進)· 이회정(李會正)· 임응준(任應準)· 정현덕(鄭顯德)· 조병창(趙秉昌)· 조채하(趙采夏)· 조우희(趙宇熙)· 이재만(李載晩)· 조총희(趙寵熙)이고 벼슬을 회복시킬 부류는 박영교(朴泳敎)· 박호양(朴顥陽)· 홍보유(洪普游)· 홍영식(洪英植)· 김옥균(金玉均)· 이원진(李源進)· 이회정(李會正)· 임응준(任應準)· 정현덕(鄭顯德)· 조병창(趙秉昌)· 조채하(趙采夏)· 조우희(趙宇熙)· 이재만(李載晩)이다.
완백(完伯, 전라감사) 이도재의 장계(狀啓)에, “금산(錦山)의 비도 수만명이 구덩이에 빠졌는데, 본부의 소모관(召募官) 정두섭(丁斗燮)과 순무영 군관(巡撫營軍官) 정지환(鄭志煥)이 싸우다 죽고 전 참판(前 參判) 정숙조(鄭䎘朝)도 상해를 입었으니 모두 돌보아 주는 은전을 베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정두섭과 정지환은 용맹을 떨쳐 적을 막았으며 지조를 지켜 싸움터에서 죽었으니 그 의기와 매서움이 내세울 만하니 모두 특별히 군무아문 주사(軍務衙門主事)를 추증(追贈)하고, 정숙조는 자기 고향에서 세거한 인물로서 그 역시 적을 방비하는 데 많은 힘을 썼고 그 때문에 몸을 다쳤으므로 포상하고 돌보아주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니, 특별히 정2품 도헌(都憲)을 추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보고한 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병사(全羅兵使) 서병무(徐丙懋)의 등보(謄報)를 보니, ‘비적(匪賊)이 더욱 만연하여 이 달 4일 장흥부(長興府)를 함락하고 7일 강진현(康津縣)을 함락하고 10일 병영(兵營)을 침범하여 군사와 백성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죽었으며 장흥부사(長興府使)와 병마우후(兵馬虞候)도 모두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남도(南道)의 비적들이 흩어진 뒤에 이렇게 한 개 영(營)과 두 개 읍(邑)이 연이어 함락당하는 변고가 있었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해당 병사는 비록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성과 해자를 회복하였다고 하지만, 애초에 지키지 못한 책임을 완전히 용서할 수 없으니, 월봉(越俸) 3등(等)의 벌전을 시행하고,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은 고을을 지키다가 국난에 죽었으니 그 지조가 가상하니 특별히 내무아문 참의(內務衙門參議)를 추증하며, 병마우후(兵馬虞侯) 정규찬(鄭逵贊)에게는 특별히 군무아문 참의(軍務衙門參議)를 추증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청나라 섭제독(葉提督, 葉志超)이 5월에 병함(兵艦)을 이끌고 아산(牙山)에 상륙하여 머물며 진을 쳤다. 일본군 3,000명이 먼저 아산으로 향하자 청나라 군진(軍陣)이 아산을 떠나 소사(素沙, 稷山의 素沙坪)에 이르자, 청나라 군대를 맞아 쫓아내었다. 일본군이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큰 길을 방어하자, 청나라 군대는 다시 아산으로 들어가 다시 접전하지 않았다. 섭제독이 병사를 이끌고 관동(關東)으로 향하면서 관북(關北)을 경유하여 관서(關西)의 경계인 양덕(陽德)과 영원(寧遠)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기성(箕城, 평양)에 모였다.
6월에 청나라가 심양(潯陽)의 군대를 출병(出兵)한 뒤 위여귀(魏汝貴)와 마수(馬帥, 玉昆)가 각자 20,000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기성(箕城, 평양)에 머물렀다. 의주(義州)에서 평양에 이르는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도시락밥과 국을 싸들고 와서 맞이하여 쌀과 소, 양식이 서로 이어 떨어지지 않았다. 마수가 거느리고 온 병사들은 모두 질서정연하였으나, 위여귀가 거느린 병사들은 대부분 향마적(餉馬賊)과 고용된 사람들로서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 통솔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지나는 곳은 노략질이 넘쳐나, 백성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위여귀부대와 마옥곤부대, 그리고 섭지초의 부대가 함께 모여 평양에서 중화(中和)에 이르기까지 진을 쳤다. 일본군 역시 서울에서 흩어져서 관서(關西)로 향한 자가 만 여 명이나 되었고 봉산동(鳳山洞) 선령(仙嶺) 밑에 진을 쳤으며, 8월 15일 황주로 진격하였다. 마옥곤부대는 이 소식을 듣고 병사 4천명을 이끌고 중화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큰 전투를 벌인 뒤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청나라 진영은 탄환이 떨어지자 저절로 기강이 없어지고 허술함이 막심하여 더 이상 대적하기가 어려워지자, 위 · 마의 두 부대는 평양에서 청북(淸北)으로 돌아갔다.
8월 16일 일본군이 기성(箕城, 평양)으로 진입하자, 성은 텅 비어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영부(營府)에 거점을 정하고 드디어 병사를 풀어 뒤쫓자, 청나라 군대는 드디어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청나라 군대는 기강이 없었으며 그들이 지나는 여러 고을은 침탈당했다. 그 때문에 청북의 여러 고을은 의주(義州)까지 백성들이 자취를 감추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어 있었다. 일본군이 봉황성(鳳凰城)까지 뒤쫓자, 청나라 군대는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는 달아났다. 일본군 역시 부상자가 많았으나, 청군을 추격하여 이른 자들이 매우 많았다.
○ 민영준(閔泳駿)은 민간의 집에 숨어 있다가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명령을 받고 몰래 평양에 이르렀다가, 벽동(碧潼, 평안북도 벽동군)의 포군(砲軍)들에게 붙잡혀 청나라 진영에 보내졌다. 청군들은 그를 진중(陣中)에 묶어 두고 그의 짐을 뒤져 지폐 30만원 남짓과 별은(別銀) 4,000냥 남짓을 빼앗고 매우 욕을 보이며 3일을 구속하였다. 감사(監司) 민병석(閔丙奭)이 여러 번 청나라 장수에게 빌어 민영준을 감영(監營) 안으로 이감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또 둘러싸고 있었다. 8월 10일 이후 민영준은 평양에서 만부(灣府, 義州府)로 북쪽으로 가다가 또 청군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다시 민영익(閔泳翊)이 사는 홍콩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 기백(箕伯, 평안감사) 김만식(金晩植)은 7월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황주(黃州)에 도착하였다. 그는 평양이 청나라 진영의 거점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들어가 머물며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전 감사는 인수인계하지 못하였다. 8월 16일에 이르러 일본군이 들이닥치자 전 감사는 일본군에게 핍박을 받아 황급히 달아나다 병부(兵符)를 모두 잃어버렸고 바리도 모두 일본군들에게 빼앗겼다. 전 감사는 이를 모두 수습하지 않은 채 선천(宣川) · 벽동(碧潼) 등지로 피해 들어갔다. 11월에 이르러 서울로 올라와 감옥에 갇혔는데, 마침내 원주(原州)에 귀향을 가게 되었다.
○ 민응식(閔應植)은 21일 이후 영국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내다, 낙도로 유배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드디어 물길로 유배지로 가다가 수적(水賊)을 만나 겨우 몸만 탈출하였다. 배소(配所)에 이르렀다는 장계를 올리자 향리(鄕里)로 방축(放逐)하라는 명이 있어, 여주(麗州)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 민형식(閔烱植)은 난리가 일어나고서부터 피신하고 나오지 않았고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명을 받고서도 유배지에 가지 않았다. 마침내 몰래 서호(西湖)의 비당(匪黨)들에게 들어가 스스로 입도(入道)하려고 하자, 비괴(匪魁)가 이치에 근거하여 꾸짖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