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년(庚寅年, 1890) 6월 7일에 동생 낙봉(洛葑)과 함께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 6월 17일에 동생 낙주(洛柱)가 종제(從弟)인 낙정(洛貞)·낙용(洛庸)과 함께 입교(入敎)한 뒤에 7월부터 점차로 포덕(布德)을 해서 신묘년(辛卯年, 1891) 3월에 이르러 신도수가 몇 천 명이 되었다. 해월(海月 )선생님께서 구암(龜菴)·장백원(蔣伯元)·장희용(張喜用)·최덕기(崔德基)와 함께 공주(公州) 보평(湺平)으로 이사를 하셨는데, 집의 주인은 윤상오(尹相五)였다. 동생 낙봉·김영조(金永祚)·손화중(孫化中)과 함께 여러 번 가서 문안을 할 때에 선생님께서 분부하시기를, “천심(天心)을 잃지 않고 식도(食道)를 미리 갖추고 기를 바르게 하는 것[正氣]이 가장 어렵다. 또한 먹는 것이 하느님이다”라고 하셨다. 7월경에 선생님께서 구암·장백원·장희용·최덕기를 인솔해서 부안(扶安) 신리(新里) 윤상오의 소실(小室) 집으로 오시자 교도(敎徒) 수백 명이 모였다. 다음날 옹정(瓮井) 김영조의 집에 가셨는데, 마침 큰비가 내렸다. 선생님께서 측간에 가실 때 가죽신을 신지 않고 왕래하셨으나 짚신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건넌방에서 어떤 교인이 연죽(烟竹)을 두들기는 소리가 있어 구암어른께서 엄중히 금지시켰다.
다음날 태인(泰仁) 동곡(洞谷)의 김낙삼(金洛三)의 집으로 떠나실 때에 선생님께서 말씀하기를, “부안(扶安)에 꽃이 피고 부안에 열매가 맺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892)과 계사년(癸巳年, 1893) 사이에 포교(布敎)를 하여 신도수가 몇 만 명에 이르렀다. 계사년 3월에 대선생님(大先生主)의 신원(伸寃)을 하러 동생 낙봉이 김영조와 교도 몇 백 명과 함께 서울에 갔으나 대선생님의 억울함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때 나는 도내(道內)의 도도집(都都執)을 맡고 있었다. 이때부터 각 도(道)와 각 읍(邑)에서 지목(指目)이 크게 일어나 붙잡힌 자와 죽음을 당한 자가 이루 셀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지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문(中門)을 열어 선약(仙藥)으로 병을 구제하는 일을 하며 3∼4년 동안 별 탈 없이 포교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