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부안군수(扶安郡守) 이철화(李哲化, 化는 和의 오식)씨가 향유(鄕儒, 지방 향촌의 유생) 및 이호(吏戶, 이방과 호장)와 상의하고, 여러 차례 와서 요청하기를, “고을 일이 어떤 지경이 될지 알 수가 없으니 들어와서 성(城)을 지켜 외적(外敵)을 막아 달라”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갑오년 4월 1일에 교인 수백 명과 함께 서도(西道) 송정리(松亭里) 신씨(辛氏)네 재각(齋閣)에 가서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다. 그 때에 군수가 향촌의 유생 및 이호(吏戶)와 함께 경내의 호(戶)에 배정하고 난 뒤에 다시 부민(富民)인 요호(饒戶)에게 배정하였다. 동생 낙봉은 신소능(申少能)과 함께 부안 줄포(茁蒲)에 도소를 설치하였다.
전봉준·김개남·정일서의 포(包)가 동도(東徒)라고 하며 각 포구(浦口)와 부민(富民)을 어지럽히는 것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밤낮으로 힘을 내어 방어를 하였다. 그래서 온 고을이 편안하기가 요순(堯舜)의 시대와 같아서 온 고을의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