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乙未年, 1895) 1월 3일에 나주읍에 도착하였다. 함께 데려간 죄인 32명을 문루(門樓)앞에 줄을 세워 앉혔다. 부안군에 왔던 수성군(守城軍) 50여명과 다른 50여명이 와서 가죽신발과 나무지팡이로 2시간 동안 차고 때릴 때에 유독 우리 형제는 수성군에게 돈 400냥을 주지 않은 혐의 때문에 머리를 뒤로 묶고 진영(鎭營)까지 가는 5리를 나무 지팡이와 철편(鐵鞭, 쇠채찍)으로 때려서 몰고 가 진영의 문 앞에 줄을 세워 앉혔다. 수성군 100여명이 나무지팡이와 철편(鐵片, 쇠조각) 및 주장(周杖)으로 3시간 동안 차고 때렸는데, 그 때의 광경은 입으로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사이 경황이 없는 가운데도 입으로 끊임없이 외고 마음으로 바란 것은 “나는 죽더라도 동생은 목숨을 보전하게 해주소서”였다. 동생도 마찬가지로 입으로 끊임없이 외고 마음으로 바란 것은 “나는 죽더라도 형의 목숨을 보전해주소서”였다고 한다.
3∼4시간 동안을 차고 때린 뒤에 주장(周杖)으로 때려 진영의 토굴(土窟)에 넣으니 사람이 마치 삼묶음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 중에는 어깨와 갈비뼈가 부러진 자가 허다하여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으나 우리 형제는 손가락 하나씩만 부러졌고 다른 상처는 없었으니 진실로 한울님과 선생님[天師]의 덕(德)이었다. 옥에 갇힌 지 3일 뒤에 3명은 다른 사람 대신 잡혀왔다고 풀어주었고, 29명은 일본인 대대장이 있는 곳으로 불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