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 우리 형제는 일인(日人) 순사청(巡査廳)에 가두고 나머지 27명은 을미년 1월 6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모두 쏘아 죽였다고 한다. 먼저 갇혀있던 자들은 보성군수 유기원(柳基元, 奎源의 오식)·박태로(朴泰魯)와 장흥군의 이방언(李方彦)과 운봉군(雲峰郡)의 구모사(丘模史)·백낙천(白樂天)등이었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어제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옥에 갇힌 다음날에 사촌동생 낙정이 은상렬(殷相烈)과 함께 떡을 사서 싸가지고 왔다. 낙정이 말하기를, “어제 들어와서 27명의 시신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곡절을 알지 못해 크게 소리를 내어 울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알려주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상렬은 3일 동안 머무르다가 집으로 돌아갔으나 낙정은 사관(舍舘, 하숙)에 묵으면서 밤낮으로 경병과 일본군에 애걸하니 모두 감복하였다. 6∼7일 뒤에 서울로 길을 떠날 때 일본인이 포(砲)를 지고 뒤를 따랐다. 장성·정읍·금구·전주·여산·노성·공주·천안·수원을 거쳐 서울의 성안으로 들어와서 진고개[泥峴] 일본인 순사청(巡査廳)에 갇혀 조사를 받은 뒤 다음날 감옥소에 들어갔다. 낙정이 어느 곳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교인(敎人) 구암(龜庵, 김연국)어른의 숙부인 김광문(金光文)씨·사촌동생 기원(基元)씨, 성두환(成斗煥)이 죄인 수 백명과 함께 옥에 갇힌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손화중·전봉준·최정선(崔貞先)이 감옥소(監獄所)로 내려왔다. 전봉준은 다리가 부러져있었다. 낙정이 찹쌀밥을 간간히 들여보냈으나 매일 허기와 갈증을 견디지 못하여 술지게미를 얻어먹었다. 조사를 받으러 문을 나갈 때에 잠시 낙정의 얼굴을 보았으나 말을 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 광경은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