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차례 조사를 받은 뒤에 보성군수(寶城郡守) 유원기(柳元基, 奎源의 오식)씨는 먼저 풀려났고, 우리 형제는 김방서(金芳瑞)·이태로(李泰魯)·이방언과 함께 3월 21일에 풀려났다.
문을 나가니 사촌동생 낙정이 감옥의 문 앞에 서있었다. 함께 사관(舍舘)에 가니 주인이 말하기를, “형제분이 풀려난 것은 사촌동생분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촌동생분이 올라와서 2∼3개월 동안 한밤중에 짚신 1짝을 삼고 새벽녘에 1짝을 삼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 매일 감옥의 문 앞에 가서 하루 종일 서 있다가 저물녘에 와서 저녁밥을 먹은 뒤에 여전히 짚신 1짝씩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찹쌀밥 2그릇을 지어 보낸 것입니다. 사촌 형제 사이에 세상에 이렇게 성력(誠力)을 가진 사람은 지금 들을 수가 없고 옛날에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성력에 감동하여 혼자 쌀을 사서 밥을 지어 대접하려고 유숙(留宿)을 권면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촌동생 낙정이 말하기를, “사촌형님이 올라온 뒤에 군수가 불량한 사람들 중 향촌의 유생 유정문(柳正文)과 최봉수(崔鳳洙)등의 사주(使嗾)를 받아 죄없는 교인 20여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집안일을 말씀드리면, 사촌형님 낙주(洛柱)씨는 최봉수와 최치운(崔致雲)의 지목(指目)을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매듭을 풀어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최치운이 무슨 성력(誠力)이 있어 개고기 다리 1짝을 삶아가지고 와서 먹기를 권유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먹었는데, 두눈이 튀어나와 밤에는 길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사촌동생 낙용(洛庸)은 내종(內腫, 고름가슴증)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생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수님은 지난해 12월 11일부터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밤낮으로 청수(淸水)를 바치며 청수단(淸水壇)에 엎드려 비와 이슬, 서리와 눈을 피하지 않고 54일을 이렇게 지내셨으니 그 광경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더욱이 최치운과 최봉수 및 봉수의 아들 광술(光述) 형제가 유정문과 함께 서로 어울려 간계(奸計)를 꾸민 얘기는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에 우리 3명의 사촌형제가 김방서·박태로·이방언과 함께 길을 떠나니, 한울님과 선생님[天師]이 감응한 덕(德)을 누가 알리요. 박태로와 이방언의 한울님[天]과 선생[師]을 원망하는 소리는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내려갈 때에 공주 금강(錦江)머리의 시목점(柿木店)에서 보성군수 유원기씨를 만났는데, 그이 말에 의하면, “나는 토포사(討捕使)로 내려간다. 인심은 서울과 지방이 매우 다르니, 천은(天恩)을 입어 풀려 나왔다고 돌아다니지 말고, 밤을 이용하여 들어가서 가만히 엎드려 읍과 마을의 인심을 정탐하고서 다니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형제분이 보성군에 내려와서 함께 살자”고 하였다. 그리고 술과 안주를 내어 서로 권하며 거기서 묵었다. 다음날에 악수를 하고 서로 이별을 했는데, 박태로와 이방언은 군수(郡守, 유원기)를 따라갔다. 김방서와 함께 길을 가고 같이 밥을 먹으며, 방서와 진심으로 말하기를, “밤을 이용하여 들어가서 종적을 피했다가 가을에 몰래 서로 만나자”라고 약속하였다.
전주의 황등(黃登)장터 등지에서 헤어져 점차로 돌아들어가 음력 3월 29일 한밤중에 몰래 부안(扶安)밖의 갈촌(葛村)마을 정자(亭子)아래에 도착하였다. 그 때 마침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사방에 인적(人跡)이 없어 조용하였다. 사촌동생이 몰래 본가(本家)에 기별을 하여 아내와 잠시 만난 뒤에 본마을[갈촌마을]의 사촌동생의 집으로 가서 곁방에 숨었다. 그 날 한밤중에 본가(本家)에 갔더니 집 모양이 완전히 빈집 같고 차가운 바람이 소슬하였다. 진실로 난리를 겪은 세상이라고 할 만하였다. 나머지는 어찌 다 번거롭게 말을 하겠는가?
새벽녘에 몰래 사촌동생의 집으로 가서 5∼6일 동안 숨어 지내면서 읍과 마을의 인심을 정탐했더니, 어떤 사람은 풀어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죽이라고 하여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