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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그런데 정말로 5월 21일 하오(下午) 7점(七點, 7시)에 동쪽 나루터 큰길로부터 횃불이 영롱하며 감사가 도착하였다. 들으니, “다음날 이른 아침에 장교 1명이 본가의 안방 문 앞에 와서 은밀히 말하기를, ‘일어나셨습니까’라고 여러 차례 말하기에, 아내가 대답하기를, ‘누구시오. 일전에 출타(出他)하였습니다’라고 여러 번 말하였더니 장교가 물러나 사촌동생 낙정의 집으로 가서 낙정을 잡아 갔고, 산야(山野)의 여러 곳을 관인(官人)이 정탐한다”고 하였다. 정탐하는 관인이 정말로 들에 가득 찼고 여문과 도숙의 집 울타리 주위를 에워싸며 돌았으나 집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날 한밤중에 사촌동생 낙정이 풀려나 와서 말하기를, “감사가 ‘너의 사촌형제는 어느 곳에 있는가? 천은(天恩)을 입어 풀려났으니 영문(營門)에 와서 나의 물침표(勿侵標)를 얻으면 다시 후환이 없을 것이다. 네 사촌형제가 오거든 바로 보내어 표(標)를 가져가라’고 하더니, 한참 만에 갑자기 낯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너희 동학군을 민(民)이라고 부르다니 소인(小人)이라고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팔을 들어 올리고 크게 말하기를, ‘너희 접솔(接率)이 몇 백 명이냐? 우리 군병도 400여명이니 기포(起包)하려면 해보라’고 하면서 곤장 8대를 때리고 풀어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이의 광경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경황이 없는 중에 해를 보지 못하고 토굴에 숨어 있다가 사람이 없으면 굴을 나오고 사람이 있으면 굴에 들어갔다. 어느덧 10여 개월이 되었는데, 아내와 사촌동생이 한밤중에 왕래하며 쌀과 반찬을 몰래 보내왔다. 우선 고부 오신(梧新)의 유재오(劉載午)씨에게 몰래 통지했더니, 한밤중에 1길[丈]의 물을 건너 간간히 와서 비밀리에 서로 도(道)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에 점차로 김창후(金昌厚)와 강용래(姜龍來) 및 여러 형님들이 몰래 간간히 밤을 이용하여 왔다.
하루는 나주의 수성군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부안의 김아무개 형제가 30여명의 죄인 중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를 아는가? 다름 아니라, 제주(濟州)의 뱃사람 40∼50명이 배를 타고 영광(靈光)등지를 지나다가 부안의 대접주(大接主) 김낙철·김낙봉 형제가 나주 진영(鎭營)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갑오년에 제주에서 흉년으로 경내(境內)의 몇 만 명이 거의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부안 김아무개 형제의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푼 덕(德)으로 몇 만명이 목숨을 보존하였다. 만약 김아무개 형제가 죽을 지경에 이른다면 하늘이 어찌 돌아보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김아무개 형제 대신 나주군에서 죽더라도 아무개 형제를 살리는 것이 옳다’라고 하고 일제히 나주군에 들어가서 목사(牧使) 민아무개씨[민종렬]에게 등장(等狀)을 내어 말하기를, ‘제주도가 계사년(癸巳年, 1893)과 갑오년(甲午年, 1894) 이태 동안 큰 흉년을 만나 경내의 몇 만명 목숨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어곽(魚藿, 해산물) 등의 물건을 배에 싣고 전라도 각 군(郡) 포구(浦口)에 와서 곡식을 살 때에 다른 포구에선 탁란군(濁亂軍)에게 실은 물건을 모두 빼앗겼는데, 유독 부안의 각 포구에선 탁란군에게 혹시라도 빼앗긴 것이 있으면 김아무개가 바로 사람을 보내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홉의 쌀도 잃어버리지 않아 제주 경내의 인민(人民)이 부안군의 조맥(租麥)으로 모두 목숨을 보전하였습니다. 이것은 김아무개 형제의 덕분이 아닙니까? 만약 김낙철·낙봉 형제를 죽이실 터이면 소인들을 죽이고 김아무개 형제의 목숨을 살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목사가 말하기를, ‘이 죄인은 김여중과 김명중으로 김낙철·김낙봉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뱃사람들이 아뢰기를, ‘여중과 명중은 자(字)이고 낙철과 낙봉은 이름입니다’라고 하니, 목사가 의심이 구름처럼 일어나서 하인 한명을 부안군에 보내어 김아무개 형제의 자와 이름을 상세히 알아오게 하였다. 하인이 부안군에 가기 위해 흥덕(興德) 경계에 이르렀을 때 여중과 명중은 그들의 자이고 낙철과 낙봉은 이름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인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하나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입니다’라고 하니, 목사가 감복하여 폐하에게 장계(狀啓)를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못하자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김아무개 형제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 장성의 김아무개 집에 갔더니, 제주 사람들이 김아무개 형제의 일로 나주목사에게 등장(等狀)을 하여 목사가 폐하에게 장계를 해서 그 회답(回答)을 베껴써서 내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상세히 보았다”고 하였다. 또 들으니 부안의 읍인(邑人)이 와서 말하기를, “김아무개 형제분이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아는가? 전 군수(前 郡守) 이철화(李哲和)씨가 서울에 있을 때에 부안 김아무개 형제가 잡혀서 갇혀있다는 말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10개 관부(官府)의 대신에게 애걸하기를, ‘부안군의 김아무개 형제 덕분에 하관(下官, 자신을 지칭)도 목숨을 보전했고, 경내의 인민(人民)이 모두 김아무개 형제 덕택에 생명을 보전하였습니다. 김아무개 형제를 죽이려고 한다면 나를 대신 죽이고, 김아무개 형제를 바로 풀어주십시오’라고 밤낮으로 애걸을 하여 무사히 특별하게 풀어주었다”라고 하였다.
3월 19일부터 아내에게 태기(胎氣)가 있어 여식(女息) 1명을 낳았는데, 최봉수(崔鳳洙)와 그의 아내 및 그 여식 조만금(趙萬金)의 어미와 그 아들 광술(光述) 및 수용(水用), 최치운(崔致雲)등이 흉악한 말과 괴상한 얘기를 남에게 하여 음모를 꾸민 일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몸이 토굴 속에 있는데 어떻게 바로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할 뿐이었다.

주석
물침표(勿侵標) 통행을 허가하는 표로, 농민군과 관군 양쪽에서 모두 발행했다. 이 표는 신분을 보장하는 징표이다.
등장(等狀) 여러사람이 이름을 연달아 써서 관청에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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