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해를 넘겨 병신년(丙申年) 2월 9일에 부안 하동면(下同面) 신성리(新成里)로 이사를 하였다. 그 때에 최창용(崔昌用)의 어머니는 최봉수의 조카며느리이고 신소능(申小能)의 누이동생인데 신소능이 고창군에서 해를 입어, 창용의 어머니가 창용과 함께 소능을 동학에 입교(入敎) 시켜서 죽게 하였다고 밤낮으로 악담(惡談)과 패악한 말을 하였다. 하루는 정조(正租, 벼) 3석(石)을 빼앗아갔고, 수 백냥의 값이 나가는 가산(家産)등의 물건을 모두 부수어 버렸다. 최봉수는 유정문과 함께 어울려서 근거 없는 말들을 만들어 내어, 갑오년 접솔(接率)이 1,000냥이 넘는 돈을 빼앗아갔으니 마련하여 갚으라는 것이었다. 악담과 패악한 말로 괴로움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화관평(火串坪)의 논 8두락을 200냥으로 쳐서 최봉수가 그의 외손자 조만금에게 주었고, 각 처의 교인에게 수백냥 또는 수십냥씩 거두어서 갑자기 부잣집 늙은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사를 한 뒤에 각 처의 교인이 간간히 몰래 통보하여 김도숙(金道叔)의 집에 왕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