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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0월에 김인규(金仁奎)가 향수금(享需金, 제사를 지낼 비용)을 가지고 와서 3∼4일을 머물고 내려갔다. 그 때에 잠시 화항(火項) 이철우의 집에 가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몇 권을 베껴 쓰고, 며칠 뒤에는 다시 고대(高垈)에 가서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 옆에서 머물렀는데, 하루는 손병규(孫炳奎)·홍계관(洪桂寬)·최익서(崔益瑞 )등 8명이 고대산 아래 물방앗간에 머무르며 9개의 대접(大接)으로 포(包)를 만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분부하시기를, “낙철이 바로 가서 권유하면, 구암을 곧 보낼 터이니 잘 타일러서 함께 내려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분부를 받들어 내려갔다. 8명과 함께 상주(尙州) 갈항리(葛項里) 김치순(金致順)의 집에 갔는데, 저물녘에 구암 어른께서 박희인(朴熙寅)의 집으로부터 오셔서 머무르셨다. 구암 어른께서 8명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두목이 되어 포(包)를 만든다고 하는데, 손화중의 시신은 운구(運柩)를 했는가?”라고 하니, 모두 말없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또한 크게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두목의 시신도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고 두목이 되겠다고 하니 모두 무례한 얘기들이다. 바로 내려가서 손화중의 시신을 운구하여 매장한다면 천사(天師)가 감응한 덕(德)으로 접(接)안의 일은 자연스럽게 크게 드러날 것이다. 김아무개와 함께 내려가라”고 하시었다. 그래서 바로 함께 내려갔다.

주석
손화중의 시신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한 5대 지도자의 시체는 효수를 하는 등 버려졌는데 김덕명만은 가족의 주선으로 시신을 찾아 안장했다. 손화중은 시신을 거두지 못해 고향 정읍에 가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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