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뜻밖에 무술년(戊戌年) 1월 4일 이른 아침에 이천(伊川, 利川의 오식)의 권성좌가 병사 20여명을 데리고 원주군(原州郡) 전거리(全巨里)의 구암 어른 집으로 왔다. 구암 어른이 마침 해월선생님을 모시고 계셔서 집에 있지 않았고 나만 방안에 있었다. 병사들이 집을 에워싸고 성좌는 관인(官人) 한 명과 함께 들어와서 말하기를, “최법헌(崔法軒)·손응구(孫應九)·김치구(金致九)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나는 은진(恩津) 사람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5∼6일전에 주인 이아무개가 이곳에서 훈학(訓學)을 해달고 해서 애들을 가르치며 있다. 주인의 성(姓)은 이씨로 알고 있고, 최법헌·손응구·김치구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성좌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거처를 가르쳐달라고 하기에, “최법헌과 손응구는 지금 처음 들었고, 주인 이씨는 그저께 성묘를 하러 광주(廣州)로 갔다”고 하였다. 성좌가 말하기를, “허기와 갈증이 심해서 죽을 지경이니 김치 1그릇과 냉수 1그릇을 달라”고 하기에, 안방에 들어갔더니 사모님께서 안색이 죽을 지경처럼 변해있었다. 그래서 은밀히 말하기를, “만약 안색이 변하면 저 병사들이 안색을 보고 의심을 할 것입니다. 안심하고 편하게 지나시면 이 사람이 무사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안색이 조금 풀어지셨다. 김치와 물을 내어주니 순식간에 모두 달게 먹어버리고 병사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
그 때 문밖에 큰 길이 있어 바로 피하고 싶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만약 내가 피해 가버리고 저들이 다시 와서 선생님과 구암 및 의암,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잡혀간다면 도가 없어질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서 마음을 정하였다. 나라를 위해 죽는 신하와 선생을 위해 죽는 제자가 마찬가지이다 생각하고 죽기로 마음을 먹고 몰래 선생님께 갔더니, 다른 사람은 모두 피해서 가버리고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김구암(金龜庵)·손의암(孫義菴)·손응삼(孫應三)이었다. 응삼이 선생님께 아뢰기를, “불이 발등 위에 떨어졌으니 바로 몸을 피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니, 구암어른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이런 운수를 내었는데, 이곳에서 어찌 죽게 하겠는가? 사지(死地)에 빠졌다가 살아난다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함이다”라고 하고, 다시 말씀을 하시기를, “사방의 산위에 수색하는 사람이 마치 꿩을 사냥하는 사람들처럼 줄지어 서있는데 이렇게 병중의 선생님을 모시고 가다가 잡힌다면 더욱 남들의 수치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천명(天命)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좋다”고 하였다. 그 때 내가 선생님께 아뢰기를, “성좌(聖佐)가 아까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갔는데, 반드시 다시 올 것 같습니다. 문하생(門下生)이 만약 피하고 없으면 위 아랫집을 병사들과 함께 수색할 터인데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문하생이 내려가서 방에 있다가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잡혀갈 계획이니 이것을 헤아려주시고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마음이 정말로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구암어른의 집에 내려가서 이자선(李子先)을 불러다가 풍안(風眼, 바람과 티끌을 막으려고 쓰는 안경)과 필낭(筆囊, 붓을 넣어 차고 다니는 주머니)을 주며 말하기를, “몰래 보관해두라”고 하였다. 자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풍안과 필낭을 도로 주기에 받아서 자리아래 넣어두고 혼자 앉아 있었다.
정말로 2∼3시경에 성좌(聖佐)가 병사를 데리고 들어와 수갑(手匣, 쇠고랑)을 채우려고 하였다. 여러 차례 변명을 했으나 성좌가 이미 병사들과 밀약(密約)을 한 일이어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따져 물을 때에 병사들이 아래윗집을 수색하다가 병사 1명이 와서 말하기를, “윗집 노인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나는 알지 못하는데, 윗집은 광주(廣州)에서 이사온 이생원(李生員)이라고 하고 노인은 그저께 광주에서 와서 병들어 누워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어떤 노인이 정말로 병들어 누워있고, 윗집은 서울의 사대부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병사 몇 명이 구암어른 집의 방안 가산(家産) 등을 모두 빼앗아가려고 하기에, 내가 크게 화를 내어 꾸짖기를, “너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하고, 가산을 훔치려고 하니 진실로 도적놈들이다”라고 하였다. 늙은 병사 한 명이 그것을 금지할 때에 병사 1명이 말하기를, “윗집에 있는 사람을 데리고 내려오라”고 하였다. 구암과 의암이 내려와서 방에 들어오니 병사가 성좌에게 말하기를, “저 사람을 아는가”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알지 못하고 저 김낙철은 알고 있을 터이니 김낙철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바로 수갑을 채우려고 할 때에 내가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죄없는 사람을 이렇게 하니 바로 가서 재판을 하자”고 하였다. 병사들을 크게 꾸짖을 때에 병사가 구암과 의암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은 상관없으니 바로 올라가라”고 하므로 바로 올라갔다.
나는 선생을 위해 죽을 마음이었기 때문에 어찌 슬픈 마음이 있었겠는가? 의기가 등등(騰騰)하여 병사를 재촉해서 여주군에 잡혀가 갇히게 되었다. 다음날에 이천읍(伊川邑)으로 압송되어 갈 때에 중도에서 성좌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너도 네 목숨을 보전하는 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우리 형제가 갑오년경에 서울로 잡혀가서 우리나라의 관리와 외국의 병사 및 관리들이 우리 형제의 자(字)와 이름을 모두 알고 있다. 나의 자와 이름을 바꿔서, 조사 받을 때 자는 여형(汝衡)이요 이름은 영진(永鎭)이라고 답변을 할 것이니, 너도 그들이 물어보거든 그대로 대답하면 너도 무사하고 나도 무사할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였다. 어느덧 이천읍에 도착을 하니, 옥사장(獄使長)이 두루마기와 허리띠, 가지고 있던 물건을 모두 빼앗고 옥에 가두었다. 한참 뒤에 관정(官庭)에 압송해서 물어보기를, “최아무개·김아무개·손아무개는 어디 있느냐”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저는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이아무개 집에 있다가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잡혀왔습니다. 최아무개·김아무개·손아무개는 전혀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형구(刑具)로 여러차례 악형(惡刑)을 가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는데, 한참 뒤에 다시 성좌를 법정에 잡아와서 형벌을 가할 때에 성좌가 고하여 말하기를, “저 놈이 중도에서 말하기를, ‘자신의 본래 자와 이름은 이러 이러 한데, 자와 이름을 바꿔서 이러 저러 하자’고 했습니다”하고 하고는 또 횡설수설을 하며 “저 놈이 최아무개이고 김아무개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참 뒤에 그를 물러가게 하고 다시 나를 중형(重刑)으로 조사할 때에도 역시 승복하지를 아니하였으나 악형을 견디지 못하여 정신을 잃고 죽었다가 한참 뒤에 깨어났다. 다시 조사를 할 때에 “생(生)이 배고픔과 갈증이 매우 심하여 정신이 없어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하니 술 한 그릇과 국수 한 그릇을 주었다. 그래서 모두 먹은 뒤에 다시 여러 차례 악형을 가하였다. 모진 고문을 참지 못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죽었다가 저물녘에 갑자기 정신이 나서 보았더니 고랑(錮鋃, 쇠고랑)으로 나의 다리 1쪽과 성좌의 다리 1쪽을 함께 묶어놓고 있었다. 성좌가 말하기를, “세상에 몸밖에 만물이 없는데, 한번 죽은 뒤에 쓸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최아무개·김아무개·손아무개를 잡아서 바칠 것을 기약하고 빨리 풀려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일은 당연하지만 나는 타도(他道) 타향(他鄕)에서 고독한 홀몸인데 어찌 하겠는가? 그대는 이곳에 부모형제와 친척이 많으니 널리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하였다. 그가 대답하기를, “어머니와 형제가 지금 각처에서 찾고 있는 중이다”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장방청(將房廳)에 갇혔는데, 이상옥(李相玉, 이용구)·신택우(申澤雨)·전정읍(全井邑)이 갇혀있었다. 갇혀 있은 지 며칠 뒤 5명을 서울로 압송해서 경무청(警務廳)에 가두었다. 하루는 경무관이 4명을 조사하고, 나는 유독 경무사(警務使)가 저물녘에 하방(下房)으로 불렀다. 수 만명의 이름을 베껴 적은 명록(名錄) 5권을 자리 앞에 늘어놓고서 한 권 맨앞의 김낙철이라고 하고 형구(刑具)를 대청(大廳)에 늘어놓으며 긴 칼을 들어 말하기를, “이 이름은 누구인가? 최아무개·김아무개·손아무개는 어느 곳에 있는가? 만약 알려주지 않으면 이 칼로 바로 베어버리겠다”라고 하였다. 크게 화를 내며 악형을 가하기에 조금이나마 늦춘다면 바로 알려주겠다고 하니 조금 풀어주었는데, 횡설수설하니까 다시 모진 고문을 하였다. 연이어 모진 고문을 하는 사이에 새벽녘에 이르러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영영 죽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정신이 나서 눈을 뜨고 보았더니 발은 족쇄에 묶여있었다.
다음날 경무관(警務官)이 다시 불렀는데, 걸어서 가지 못하고 손과 발로 기어서 갔다. 경무관이 다시 조사를 하기에 죽을 마음을 먹고 횡설수설로 대답을 하니 경무관이 어쩔 수 없이 대답을 받아 적고 다시 가두었다. 하루는 최영구(崔榮九)가 밥상을 들여오다가 순사(巡査)가 뒤따르자 바로 도망했다고 하였다. 며칠 뒤에 감옥소에 갇혔다. 하루는 동생 낙봉이 김일서(金一瑞)와 함께 올라와서 몇 냥씩의 돈을 탕 그릇 안에 넣어 5명에게 들여보내기를 간간히 하였다. 어느때에 경기관찰도(京畿觀察道)를 수원군(水原郡)으로 옮겼는데, 그 때의 감사는 김병덕(金炳悳)이었다. 김병덕은 대신(大臣) 권중현(權重顯)씨의 문인(門人)이어서 중현씨가 병덕에게 부탁하여 죄인 5명을 수원군으로 옮겨 가두게 하였다. 동생이 일서(一瑞)와 함께 수원성 남문밖에 머무르며 5명의 아침저녁밥을 계속 보냈고, 각 처의 교우(敎友)들은 힘을 다해 돈을 모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