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3일에 풀려나서 감옥을 나왔다. 그러나 송경인(宋敬仁)이 병사와 송겸수(宋兼洙)를 데리고 가서 해월선생님이 모처(某處)에서 4월 5일에 잡혀 서울 감옥소에 갇혔다가 6월 2일에 처형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려 겨우 수원의 남문(南門)위에 오르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었다. 봉두난발(蓬頭亂髮, 쑥대머리처럼 헝클어진 머리)로 북쪽을 향해 사배(四拜)를 하고 마음으로 곡(哭)을 한 뒤에 내려갔다. 그 때에 장맛비가 며칠 동안 내려 들판에 물이 가득하였다. 바로 서울로 올라가려고 할 때에 홍정삼(洪正三)이 서울에서 와서 말하기를, “선생님의 시신은 어느 곳에 운구(運柩)했는지 모르고, 3암(三菴, 구암·송암·의암)도 어디에 계신지 모르니 올라가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동생·사촌동생·김일서와 함께 고향으로 갈 때에 중도에서 이일호(李日顥)를 만났는데, “지금부터 상종(相從)하자”라고 하였다. 하루는 주점(酒店)에 매달린 자라 4마리를 사서 물에 풀어주니 그 뜻이 양양(洋洋)해서 떠나갔다. 차차 은진(恩津)의 남산리(南山里) 손필규(孫弼奎) 집에 이르러 손광수(孫光洙)와 환규(煥奎) 등 여러 사람들과 처음으로 상종(相從)하였다. 며칠 만에 본가에 도착하니 한편으로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 슬픈 마음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차차 들어보니 각 접내 아무 아무개 씨의 그 사이 걱정스런 일과 처자가 상심한 일을 어찌 다 말로 하겠는가? 사촌동생 낙정이 엽전(葉錢) 130냥을 가지고 2월경에 이천의 권성좌의 집에 가서 성좌의 동생을 만나 소식을 물었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지금 서울에 가서 넣어드릴 터이니 돈을 두고 내려가고 빨리 다시 더 거두어 보내라”고 했으나 그 뒤 1푼도 주지 않고 먹어버렸으니, 세상에 어찌 이처럼 무례한 큰 도적이 있겠는가?
그 뒤에 소식을 차차 알아보니, 해월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여 반신반의(半信半疑)해서 도(道)를 저버리는 자가 태반(太半)이었다. 각 처의 교인에게 더욱 도를 권장하여 말하기를, “옛날부터 대인(大人)의 일은, 몸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성령(性靈)이 죽어야 죽는 것이다. 옛날부터 성현(聖賢)의 일을 생각해보라. 요(堯)임금·순(舜)임금·공자·맹자로 말한다면 몇 천 년 몇 백년 동안 육신이 살아있어서 각 도(道)와 각 읍(邑)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을 하는가? 성령과 도덕(道德) 때문에 배향을 하는가? 대선생님(大先生主)으로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천황씨(天皇氏)라고 한다. 육신이 몇 만 년 동안 살아야 천황씨가 되는가? 그렇지가 않다. 몸은 비록 죽더라도 영(靈)이 천황씨가 되어 창생(蒼生)을 보호하는 것이 이것이다. 해월선생님으로 말한다면 천황씨가 있는데, 어찌 지황씨(地皇氏)가 없겠는가? 몸은 비록 죽더라도 영이 지황씨가 되어 창생을 보호하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들로 말하더라도 영세(永世)동안 잊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도를 닦으면 몸은 비록 죽더라도 성령(性靈)과 도덕으로 5만년 동안 끝없이 전해지는데, 이것이 장생(長生)이다”라고 하니, 반신반의(半信半疑)하던 자가 차차 마음으로 깨달아 상종을 해서 포교가 나날이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