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동생 낙봉·김인규·김일서·전장섭(全章燮)과 함께 짝을 이뤄 왕래하기를 어느덧 기해년(己亥年)이 되었다.
차차 왕래를 했는데, 12월경에 물건을 바치려고 갈 때에 김인규와 짝을 이뤘다. 눈이 산처럼 쌓이고 빙판길이어서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인규가 오태운(吳泰云)의 문앞에서 엎어져 한쪽 발의 뼈가 어긋나서 걷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오태운의 집에서 치료를 하였다. 며칠 만에 겨우 걷기 시작하여 후곡(後谷)에 갔다가 인규는 며칠 만에 내려가고 나만 머물렀는데, 구암어른께서 지난번에 나의 풍안(風眼)을 팔아 썼다고 하시더니 도로 주시었다. 그것을 받고 생각해보니, 결코 팔아서 쓴 것이 아니라 내 심지(心志)를 알아보려고 하셨던 것이다.
하루는 연상(硯床)안에 한 권의 책이 있어 들춰보다가 책속에서 쪽지 하나가 있어 보니, ‘하몽훈도전발은수심훈도전발은(荷蒙薰陶傳鉢恩守心薰陶傳鉢恩) 병신년(丙申年) 정월(正月) 11일 정오’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구암어른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대답하시기를, “해월선생님께서 병신년 1월 11일 정오에 송암(松菴)을 불러 써서 주시며 ‘천추(千秋)동안 바뀌지 않을 법이다’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하루는 구암어른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전에 해월선생님이 분부하기를 ‘뒤에 1차례 설법(設法)하고 치성(致誠)을 드릴 때에 엽전 10,000냥을 쓰되 1푼도 남기지 말고 모두 쓰라’고 하시고, 제관(祭官) 36명을 적어서 보여주시고 바로 불태우셨다”고 하였다. 해월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구암어른을 마음에 선생으로 정하고 동생 낙봉과 전장섭 및 김일서와 함께 계속 옆에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