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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어느덧 경자년(庚子年, 1900)이 되어 구암어른은 연기(燕岐)의 보통리(湺通里)로 이사를 가시고, 의암어른은 해월선생님의 사모님을 모시고 면천군(沔川郡)에서 정산군(定山郡) 등지로 옮기셨다. 3월경에 하루는 동생과 함께 구암선생님을 모시고 해월선생님의 영전(靈前)에 조문(弔問)을 하러 정산의 의암 댁에 가서 선생님의 영전에 조문을 하고 사모님을 뵈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해월선생님의 도장(圖章)을 구암어른에게 전수하였는데, 의암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나서 3년까지는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도장을 영전에 두는 것이 옳다”고 하니, 구암어른이 그렇게 여기고 그것을 주었다. 그 뒤 의암이 내가 선생님의 영위(靈位)를 모시니 도(道)의 종가(宗家)라고 하고 체문(帖文)을 내어주며 말하기를, “3년 안에는 살아계신 것과 같은 예(禮)이니 선생님의 도장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 때에 평안도의 이두횡(李斗橫)이 와서 체문을 내게 되어 밤을 이용하여 동생 낙봉 및 엄주동(嚴柱東)과 함께 체문을 쓰다가 주동이 마침 밖에 나가게 되었다. 동생에게 말하기를, “운수(運數)와 달덕(達德, 덕이 높은 사람)을 따를 것이니, 교의 체지(帖紙) 몇 장 만을 내는 것이 옳다”고 하니, 동생이 “별 말씀 마십시오”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암(義菴)이 아랫방에서 그것을 듣고 이병춘(李炳春)에게 말하기를, “내가 김아무개 형제를 이곳에 있게 할 것이다”하고 체지를 많이 내었다. 며칠 뒤 지목(指目)이 크게 일어나서 여산(礪山) 죽림동(竹林洞)의 고(高) 아무개가 체포되어 죽었고, 김도병(金道柄)·유숙(柳璹)·이철우(李哲雨) 등 10여명이 잡혀서 옥에 갇혔다. 그 뒤에 의암이 말하기를,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운수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본가에서 계속 구암어른의 집을 왕래하였다. 5월경에 해월선생님의 대상(大祥)을 치르려고 동생 낙봉·곽기룡·김일서·전장섭과 함께 구암어른을 모시고 연기(燕岐)의 작은집으로부터 정산군(定山郡)의 신택우 집에 가서 머물렀으나, 동생 낙봉과 김일서·곽기룡·전장섭은 심기(心氣)가 맞지 않아 중도에서 내려갔다. 5월 그믐날에 구암어른을 모시고 큰사모님 댁으로 가는데, 중도에 구암어른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우연히 한 귀절이 생각나서 썼다”고 하시고, 말씀을 하시기를, “해와 달 같은 성령(聖靈)은 억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춘추(春秋)의 예의는 고금(古今)으로부터의 폄론(貶論)이다”라고 하였다. 어느덧 도착하여 해월선생님의 영위(靈位)와 큰사모님 앞에 가서 뵙고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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