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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뜻밖에 6월 10일에 구암어른의 편지가 김일서의 이름으로 쓰여져 손필규(孫弼奎)에게 도착해서 필규가 바로 전달해 주었다. 그 편지에, “이번 6월 1일에 당신과 김일서·최명기·강건회가 잡혀 8일에 공주에 갇혀있으니 각 접(接)에 은밀히 알리고 몰래 숨어서 주선하라”고 하였다. 편지를 다 읽지 못했는데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못하고 머리는 마치 기둥에 부딪힌 것 같았다. 바로 각 접에 알리고, 은진군(恩津郡) 남산리(南山里)의 손필규(孫弼奎)의 집으로 길을 떠나 손광수(孫光洙)·환규(煥奎)·필규(弼奎)·유진규(兪鎭奎)·하우현(河禹鉉)·김양식(金陽植)과 서로 의논을 하였다. 그리고 은진군 화지산면(花枝山面) 취암리(鷲岩里)의 임기형(林基衡)씨 집으로 가서 동생 낙봉·전장섭과 함께 숨고 은밀히 탐문해보니, 이민직(李敏稷)은 몇 해 전에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구암어른과 의형제를 맺고 또한 충청도 도도집(都都執)을 지낸 사람인데, 병사를 데리고 양구의 전월리로 가서 이 달 1일 구암어른을 체포할 때에 병사들이 총을 당신(當身, 구암어른)의 머리위에 쏘아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나서 생사(生死)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때에 김기태(金基泰)·박희인(朴熙寅) 백씨(伯氏, 큰형 )등 10여명이 잡혀서 공주에 갇혔다고 하였다.
하루는 구암어른께서 일서(一瑞)의 이름으로 쓴 편지가 외종(外從) 필규에게 왔는데, 그 편지에, “긴급하게 의논할 일이 있으니 이종(姨從) 박해룡(朴海龍)을 바로 보내라”고 하므로 바로 보냈다. 그랬더니 밀서(密書)를 가지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저들의 대장 이민직이 구암어른에게 은밀히 며칠 내로 돈 몇백원을 주면 바로 풀어주겠다고 했다”고 하므로 토물(土物) 20여개를 박해룡과 이덕련(李德連)에게 주어 보냈다. 그래서 2사람이 공주부에 가서 사관(舍舘)에 묵고 있었는데, 저 민직이 흉계를 내어 병사를 보내어 토물 20여개를 빼앗고 두 사람을 잡아가두었다고 하였다.
그 때에 각 처에서 주선한 사람은 전라도에 곽기룡·사촌동생 낙정·김창후(金昌厚)·김인규(金仁奎)·주순범(朱淳凡)·오권선(吳權善)·조중형(趙仲衡)·박기주(朴基柱)·이일호(李日顥)·박노철(朴魯哲)·주인순(朱寅淳)·백영덕(白永德)·엄대영(嚴大永)·전의식(全湜)·김학권(金學權)·주동윤(周東潤)·이종태(李鍾太)·이연상(李煉相)·김상업(金相業)·전방섭(全芳燮)·정난용(鄭蘭容)·정기태(鄭驥兌)·권동섭(權東燮)·김상철(金相哲)이었고, 충청도에는 김지택(金知擇)·박상훈(朴相勳)·배성천(裵成天)·김택정(金澤貞)·김완수(金玩洙)·박봉규(朴鳳奎)·김정의(金正義)·이동규(李東奎)·이창규(李昌奎)·하상하(河相夏)·최덕준(崔德俊)·김창준(金昌駿)·박봉의(朴鳳儀)·남정신(南廷愼)·김생하(金生河)·김용석(金容錫)·손정식(孫貞植)·이종대(李鍾大)·조형원(趙亨元)·이용림(李用林)·손광수(孫光洙)·손필규(孫弼奎)·손환규(孫煥奎)·손정진(孫禎鎭)·조창식(趙昌植)·유진규(兪鎭奎)·송태진(宋泰鎭)·이용태(李容泰)·윤영교(尹榮喬)·길종태(吉鍾泰)·황재호(黃在鎬)·박동하(朴東夏)·김유방(金裕芳)·하우현(河禹鉉)·남중원(南仲元)·김양식(金陽植)·길창만(吉昌滿)·편귀언(片貴彦)·하재홍(河在弘)·김신풍(金愼風)·임기형(林基衡)·진성삼(陳成三)·손제철(孫濟哲)·전대연(田大淵)·이태숙(李泰叔)·김상운(金尙云)·김낙순(金洛舜)·김도숙(金道叔)·김낙도(金洛圖)·김숙현(金淑鉉)·정여진(鄭汝鎭)·임백호(任伯鎬)·최찬식(崔贊植)·안임신(安任神)·한양기(韓良基)·한겸주(韓謙朱·)정학련(鄭學蓮)·이영순(李永淳)·이배식(李培植)·이도중(李道中) 등이었다.
어느덧 알지 못하는 중에 이민직(李敏稷)이 병사들을 충청과 전라도에 널리 보내어 지목(指目)이 크게 일어났다. 엄대영(嚴大永)과 성덕수(成德守) 및 각 처의 두목들이 간간히 체포될 때에 윤일병(尹日炳)과 이민직이 병사 몇 십 명을 데리고 내 집에 들이닥쳤다. 나를 보지 못하자 아내를 총과 칼로 치고 때려서 왼쪽 정강이와 갈비뼈가 부러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며칠 뒤에는 민직이 올라와서 몰래 간계(奸計)를 내어 박해룡(朴海龍)을 유인해 갖옷 입은 차림으로 함께 각처를 다니며 두목을 가리켜 알려달라고 했기 때문에 해룡이 어쩔 수 없이 함께 고부군 신성리(新成里)의 내 본가로 갔다. 가는 도중 고부의 여백(汝伯)나루를 건널 때에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강물에 뛰어들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병사가 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구해내어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하였다. 민직이 병사를 데리고 해룡을 유인해서 해룡이 어쩔 수 없이 나의 본가에 갔으나 내가 집에 없으니까 저 민직과 병사들이 총칼로 내 아내를 차고 때렸는데, 그 광경을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다. 한참 뒤에 바로 고부(古阜) 거마면(巨麻面) 반월리(半月里)의 동생 낙봉의 집으로 가서 안방에 들이닥쳐 가산(家産) 등의 물건과 봉상전(捧上錢) 500여냥을 모두 빼앗아갔다고 하였다. 민직이 해룡을 유인하여 두목을 알려달라고 했으나 지금 끝내 모른다고 하고, 며칠 동안 함께 다녔으나 별다른 도움이 없자 해룡을 다시 임실군(任實郡)에 압송하여 가두고 가버렸다. 해룡의 아내 김씨가 남편의 생사(生死)를 몰라 그 종적을 탐문하다가 어떤 죄인 한 명을 민직이 임실군에 가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알아보았더니, 해룡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 아내 김씨가 임실군 군수에게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여 풀려나왔다고 하였다.
그 때에 필규는 김일서와 내외종(內外從)사이라고 하고, 여러 차례 공주의 감옥소에 가서 상세히 안부를 탐문하여 왔다.

주석
봉상전(捧上錢) 전세로 상납할 돈으로, 상납전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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