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임인년(壬寅年, 1902)이 되어 감옥소의 청사(廳使, 심부름꾼)를 만나 자리 하나를 얻어 차차 비밀리에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당신의 얼굴위의 상처는 점차로 회복되었고, 조사를 받는 자리에서 비록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권병덕이 지난해 부친상을 겪고 다시 아내를 여의는 아픔을 당하였는데, 형편이 어찌할 수가 없을 때 딸 1명을 둔 어떤 과부에게 청혼을 했더니 순종을 하였다. 당신의 식사가 불편했기 때문에 형들과 서로 의논하여 집 한 채를 전세(全貰)로 얻어, 우선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同居)하며 아침저녁밥을 바치는 일을 몇 달 동안 하였다. 하지만 당신께서 아침저녁식사가 불편하다고 하시고 작은댁을 올라오게 하라 하시므로, 한양동(漢陽洞)의 집 한 채를 전세로 얻어 이사하고 식사를 바치는 일에 더욱 갑절로 정성을 들였다. 제공하는 일이 전보다 갑절이나 힘들었다. 그 때의 상노(床奴)는 김성봉(金成鳳)이었다.
하루는 밀서(密書)가 있었는데, 그 편지 안에 “공주에서 길을 떠나는 날 새벽녘에 비몽사몽(非夢似夢) 중에 하늘에서 큰소리로 말하길, ‘억천년이 지나도 산은 여전히 푸르고, 보름날 밤이 되면 달은 다시 둥글어진다’고 하였다”라고 하시다. 모두 지휘를 따라 규칙을 어기지 않고 각 처의 교인마다 몇 십·몇 원·몇 전을 올려 보내었다.